금강삼매경
2월 8일 입실제품 제오(入實際品 第五) 11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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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법회는 예상치 못한 일로 동영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선원이 고정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강의실을 빌려주는 건물에서 일주일에 한 번 빌려서 쓰고 있는데,
건물의 관리자가 깜박 잊고 문을 잠그고 열쇠까지 가지고 퇴근하고, 또 그 관리자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외로 볼일을 보러 나가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장소에서 임시로 법회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법회에 참석한 도반들과 법회는 하였지만, 동영상을 만들 모든 장비가 모두 강의실에 있는 바람에 동영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원이 문을 연 이후 초유의 사건(?^^)이어서 우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이번주 법회의 동영상을 올리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
대신에 법회때마다 법회준비를 한 강의노트를 동영상이 아닌 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입실제품 제오 11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양은 합하여 이룬 것도 아니고 홀로 이룬 것도 아니며, 얽매인 것도 아니고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 모으거나 흩을 수도 없고,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오는 모양도 없고 가거나 머무는 것도 아니니, 불가사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말처럼 불가사의하다. 마음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마음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여여함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데,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으니,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인 까닭으로, 성품과 모양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모양은 연을 따르고 있어 일어남이 없으니, 일어나는 모양의 성품은 여여하고, 여여함은 움직이는 모양이 없고, 인(因)과 연(緣)의 성품과 모양은 그 모양이 본래 공적하여 없어, 연과 연(緣緣 )이 모두 공적하고 공적하여(空空), 반연하여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연의 법은 미혹한 마음이 망령되이 보는 것이니, 드러난 것이 본래 일어남이 없는 것은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고, 마음은 법의 이치와 같아 그 자체가 공하므로 없어, 마치 저 공의 왕(空王)이 본래 머무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은데, 범부의 마음으로 망령되이 분별하여 보는 것이다.
大力菩薩言 不可思議 如是法相 不合成不獨成 不羇不絆 不聚不散 不生不滅 亦無來相 及以去住 不可思議 佛言 如是 不可思議 不思議心 心亦如是 何以故 如不異心 心本如故 衆生佛性 不一不異 衆生之性 本無生滅 生滅之性 性本涅槃 性相本如 如無動故 一切法相 從緣無起 起相性如 如無所動 因緣性相 相本空無 緣緣空空 無有緣起 一切緣法 惑心妄見 現本不生 緣本無故 心如法理 自體空無 如彼空王 本無住處 凡夫之心 妄分別見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법이다. 보살들이 부처님께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법이니 깨달음이니 하면 어디에 깊숙이 숨어 있거나 아주 고상하거나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이 그대로 법이라 하니, 그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하는 것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라는 단어에서 의(議)는 의논하다, 꾀하다, 강론하다, 논쟁하다, 여러모로 두루 생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니, 여기서는 우리가 늘 쓰는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가사의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즉, 법은 생각으로 헤아려 아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너무나 엄청나고 우리의 지식으로는 감히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아주 깊거나 고상하거나 대단한 뜻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데, 불가사의(不可思議)는 그런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터무니없고 흔한 것이어서 그러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불가사의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불가사의는 바로 이런 뜻이다.
너무나 흔하고 널려 있고 모두가 똑같아서 진리가 그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니 마치 법이 대단하고 숭고하고 현묘하고 거룩하여서 우리가 못 본다는 뜻으로 불가사의하다고 해석을 한다.
그러면서 일체가 한 법이어서 티끌부터 우주 전체까지 법 아님이 없어 특별할 것도 성스러울 것도 없는 이 법을 아주 높고 깊고 거룩하고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 꼭꼭 숨겨놓고는, 자신들은 미욱한 중생이어서 그것을 알려면 온갖 노력을 해야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온갖 수행이 나왔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불가사의는 너무나 평범해서 설마 이것이 법일까? 하는 그런 불가사의다.
내가 2004년 서울지방의 첫 모임인 안산에서 모였을 때에 거기에 한 부부가 왔는데, 이 부부는 대학 때 이 법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만나 결혼하여 늘 이 공부를 하던 부부인데, 신랑이 그날의 모임에서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 속에서 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을 문득 알고 돌아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커피를 마시다가 뭔가 달라진 신랑의 모습에, 무엇을 봤냐고 아내가 물었더니, 자신이 마시던 커피 잔을 들면서
“그냥 이거야.”
라고 하였다. 참으로 신통한 것이 그 말에 그 아내도 그것이 쑥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 다음날 대구로 내려오는 고속버스를 타고 있는데 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와서는 다짜고짜 아주 경이로우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목소리로
“선생님 너무해요~~!!”
라고 하고는 자신이 안 것을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는 내가
“바로 그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아내가 말한
“선생님 너무해요~!!”
하는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불가사의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고, 그러면서도 ‘이 법의 불가사의함이 이렇게 당연하고 편안한 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이 법의 불가사의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가끔 이야기하는 것이 보임이 다 되어갈 때쯤이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낙엽이나 돌멩이가 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도 역시 불가사의다.
어찌 길가에 굴러다니는 낙엽과 돌멩이가 법이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법이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래서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라고 말하는 이것이 바로 법이고, 이러한 것 이외에 다른 법이 없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고, 또 이렇게 손을 흔드는 것이며, 손으로 탁자를 치는 것이고, 조주선사가 가리키는 잣나무요, 또 향엄지한(香嚴智閑)이 밭을 갈며 솎아내어 던진 돌이요, 그 돌이 날아가 대나무에 부딪혀 ‘딱’ 하고 소리 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 도처에 널리고 널려서 도저히 법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 거룩하고 거룩하다고 여기며 수십 년을 공부하거나, 아니면 지금의 생(生)에서는 근기가 모자라 다음 생에서나 깨닫고자 하는 그 법과 불성이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래서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다음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양은 합하여 이룬 것도 아니고 홀로 이룬 것도 아니며, 얽매인 것도 아니고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 모으거나 흩을 수도 없고,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오는 모양도 없고 가거나 머무는 것도 아니니, 불가사의합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일체가 한 법인 불이법이어서 둘이 없지만, 그 드러남은 서로서로 인연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화엄세계, 즉 온갖 꽃으로 장엄한 것처럼 온갖 모양으로 존재하지만, 이는 오직 한 법의 발현일 뿐, 다른 일이 없으므로, '합하여 이룬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나는 만법, 즉 법의 모양들은 모두가 연기법에 의해 서로서로 인연이 되어 드러남으로 또 홀로 이룬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합하여 이룬 것도 아니고 홀로 이룬 것도 아니며’라고 하고,
또 이렇게 서로 인연이 되어 일어나니 마치 서로 얽매여 있는 것 같지만, 그 합하고 헤어짐이 이 한 법의 자연스러운 연기법칙과 작용으로 이루어질 뿐이니 ‘얽매인 것도 아니고’라고 하고,
그렇게 변해가면서도 만법이 스스로의 개체적 성품이 없어 개체 스스로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고, 그래서 또한 어떤 집착도 간섭도 없으니, 인연이 끝나면 바로 다른 인연으로 변해버려 어떤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여여하게 흘러가니 우리나 아니면 만법이 스스로 인위적으로 모으거나 흩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으거나 흩을 수도 없고,’라고 한다.
그렇게 만법이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니 스스로 일어나거나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이 한 법 역시 본래부터 있으니 남도 없고 멸도 없다. 그래서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라고 하고,
이렇게 연기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고 어떤 것도 머묾이 없으니 고정되어 이것이다 할 것도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연기의 조건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리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하는 모양도 없다. 그래서 ‘오는 모양도 없고 가거나 머무는 것도 아니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결국 이 법이 상대가 없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오직 이 한 법의 일이어서 상대를 두고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절대로 알 수 없어 드러난 모든 것이 그냥 그런 본래 그러한 일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가 나누어 분별하지만 않으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냥 인연이 그렇게 되어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 뿐,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일로 아무 일이 없고, 이 우주는 모든 일이 일어나면서도 늘 그렇다. 이것이 여여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보고 상대적인 논법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시비가 일어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인간이 태어나서, 그토록 인간의 생각에 맞는 세상을 만들려고 수천 년을 노력해도 여전히 그러한 세상이, 왜 아직도 그런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인간적인 생각, 인간이 지어놓은 도덕적 가치 윤리적인 가치가 이 우주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가치라고 생각하는 그런 교만한 생각으로 이 법을 깨달으려고 하면 이 법이 얼마나 불가사의한지 모른다.
그래서 또한 대력보살이
'불가사의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법이 어떤 거룩하고 현묘한 모양으로 어디에 따로 숨어 있으면서 우리를 관장하거나 심판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음을 대력보살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법이고, 그리고 이 글을 내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법이라는 것이 바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41장에 보면
“상근기(上士) 사람이 도에 대한 말을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려 하고, 중근기(中士) 사람이 도에 대한 말을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하근기(下士) 사람이 도에 대한 말을 들으면 크게 웃는다. (그런데 만약) 웃게 하지 않으면 족히 도라고 할 것이 못된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라고 한다.
이것이 불가사의한 것이다.
도가 이렇게 우리 안에, 우리 옆에, 우리와 함께 있어, 없는 곳이 없는데, 법이 거룩하고 현묘하고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곧 코웃음을 치고 가버린다.
부처님 회상에서 외도들이 부처님의 말씀에 소매 자락을 떨치며 가버린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나 거룩하고 성스러워서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어찌 이런 것이 도인가?’라는 마음에 믿지 않으니 불가사의한 것이다.
불교, 아니 이 법에서 말하는 불가사의는 이런 뜻으로 들어야 하지, 그 속에 뭔가 숨어 있고 거룩하고 현묘하다고 들으면 절대로 법을 깨달을 수가 없다. 도덕경에서 말하듯이 하근기 사람들이 ‘저게 무슨 도야?’ 하고 웃어야 비로소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위만 바라보고, 깊은 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이 스스로 불성이요, 부처요, 일체만법이 그대로 법임을 꿈에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수경 개경게에서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하는 것이다.
천수경에서 무상(無上)즉, 위없다는 말은 최고라는 뜻도 있지만 불이법(不二法)이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심심미묘법(甚深微妙法)은, 이 무상을 최고라는 뜻으로 듣고, 그것을 찾으려 하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법이, 깊고 깊으며 미묘하기 짝이 없는 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 법을 스스로 깊고 깊으며 미묘하기 짝이 없는 법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어찌 만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것이든 인연만 되면 한 톨의 삿됨도 불편부당함도 없이 꼭 맞는 조건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이 법이 얼마나 대단한 법인가? 다만, 우리가 바로 그것이니 거룩할 것도 미묘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냥,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법이요 불성이요 자성이요 도다. 그래서 일체 다른 것이 없으니 찾지 않으면 여러분의 매 순간 그 모습 그대로가 바로 법임을 분명하게 아는 날이 올 것이다.
“너의 말처럼 불가사의하다. 마음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마음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여여함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대력보살이 이미 이 뜻을 안 것을 알고 ‘너의 말처럼 불가사의하다.’라고 말씀하신다.
‘마음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마음 또한 이와 같다.’
법이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지난 시간에 법담을 나눌 때에 내가 우리가 평상시 말하고 행동할 때는 나라는 것이 없다가, 나를 인식하는 순간 나라는 것이 생겨난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법이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게도 하고, 행하게도 하고, 말하게도 하며, 침묵하게도 하므로 생각으로는 절대로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생각이전에 있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거기에서 태어나고 생각도 거기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비유하면, 전자제품이 생산되거나 되지 않았거나 전기는 늘 있고 작동하는 성품이 있어, 이 전자제품이 생산되어 그곳에 전기를 꽂으면 전자제품이 작동을 한다. 그런데 한 전자제품이 생각하기를, ‘내가 태어났으니 전기가 작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다. 우리가 태어나든 나지 않든 이 법은 늘 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는 것도 이 법의 법칙과 작용에 의한 것이고, 그렇게 태어나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작동이 다 이 한 법에 의한 것이다. 그 한 법이 우리 인간에게 적용되면 마음이라고 이름할 뿐, 법 그 자체다. 그래서 한 개인의 경험으로 얻은 좁은 지식으로 아무리 생각을 내어 헤아려도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를 만든 것도 법이고, 나의 재료도 법이고, 내가 만들어져 그 법의 작용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행하고 있다면, 내가 법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서 나라는 이름을 빼버리면 그냥 법이 스스로 재료가 되어 나라는 이름을 가진 법이 되고,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법이니, 법과 마음은 이름만 다른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마음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마음 또한 이와 같다.'
라고 하시고, 좀 전에 말한 것처럼 법이 스스로 재료가 되어 나를 만들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행하게 하니, 모든 것이 법의 일일 뿐이니 여여한 일이다.
여기서 여여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했듯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두가 이 한 법의 연기법칙과 작용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생각 어떤 행을 행하더라도, 모두가 다 법의 일이니 여여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법의 여여함이 바로 마음의 여여함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마음이라는 것은 시비하고 분별하며, 감정을 일으키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슬프다 기쁘다 하는 생각에 감정 호르몬이라는 것을 섞은 감정샐러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인연에 즉하여 일어나는 작용, 즉 법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즉심이고, 마조스님은 이 마음을 두고 즉심시불(卽心是佛), 즉 ‘인연에 즉하여 내는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늘 즉심으로 행한다. 즉,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그냥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다. 그러다가 무슨 이해관계가 섞여서 나라는 인식을 하는 순간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여기서 나만 옳다 하고, 나의 이익만 취하려 하고, 나의 생각으로 헤아려 옳다 그르다 하는 순간부터 번뇌가 일어나고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이 법의 연기작용일 뿐이다. 그래서 그러다가도 문득 그러고 있는 그것이 바로 이 법의 작용임을 알고, 내 생각을 놓아버리면 그 순간 시비분별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 멈추고, 이 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부처님께서
'왜냐하면 여여함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이 마음이 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 마음이 바로 법이요 작용이니 늘 여여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데 누가 만약, ‘그렇다면 내 맘대로 욕심대로 살아가도 되겠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물론 그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절대로 내 맘대로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마음은 우리가 생각으로 헤아려 내는 분별하는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내가 시비분별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까지만 해준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기관은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고, 그 프로그램이 바로 법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비분별하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마음이 바라는 것이 인연이 맞지 않으면 이 법은 절대로 그대로 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연은 수많은 조건들이 모여 일어나고, 티끌만한 인연이라도 인연의 법칙은 이 아주 엄정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어서 그 수많은 조건들과 법칙에 딱 들어맞을 때 하나의 인연이 일어나는 것이지, 한 개인과 한 집단의 이해와 욕심과 바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우주의 법칙이 티끌만큼도 되지 않는 인간의 뜻, 게다가 욕심으로 가득찬 한 인간의 바람대로 움직이는 그런 가벼운 법칙이 아니다.
그래서 내 맘대로 욕심대로 살아가려 한다면 그래도 누가 나무랄 수 없지만, 그 삶은 녹록하지 않고, 오히려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삶이 따라올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시비분별하는 마음을 일러 허망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여여한 마음은, 모든 것의 바탕이며, 모든 것을 인연에 맞게 흘러가게 하는 이 한 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이 이 우주를 움직이니, 모두가 이 마음의 법칙과 작용으로 일어날 뿐 다른 일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이 법과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에 중생이니 불성이니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중생과 불성이 같다고 해도 틀리고, 다르다고 해도 역시 분별하는 말이니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데'
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를 지금 설명한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으니,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인 까닭으로, 성품과 모양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중생과 불성이 같거나 다름이 없음을 말하고 이 아래의 말은 중생과 불성이 다르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 말은 별로 설명할 것이 없이 말 그대로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으니’, 라는 말은 세상에 드러난 만법이 나고 사라지는 것은 이 한 법의 성품으로 인한 것으로 나는 것도 불성이요 사라지는 것 역시 불성이어서 불성 아님이 없으니, 중생도 곧 불성으로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인 까닭으로’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품과 모양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는 말은, 중생뿐만 아니라 만법이 아무리 생기고 멸하더라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다른 인연으로 계속 이어져가고, 그 이어짐이 이 한 법의 여여한 성품으로 인한 것인데, 이 성품은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어떤 움직임도 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실에 물체를 묶어 돌리면 물체는 돌아가지만, 내 손은 그저 돌리는 작용만 할 뿐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만법이 우리의 눈에는 마치 생기고 변하고 멸하는 것 같지만, 이 만법이 단 한 번도 이 법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생멸이 없는 것이고, 그렇게 변하고 변하는 것이 바로 이 한 법의 엄정하고 평등한 법칙과 작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늘 여여(如如)한 것이다.
그래서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인 까닭으로’라고 한 것은 모든 중생들이 생사를 여의고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곧 열반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
‘성품과 모양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말은, 생사가 바로 열반이고, 중생의 성품, 즉 자성과 드러난 생멸의 모양이 하나이니, 우리에게 어떤 인연이 일어나고 어떤 삶에 들어가도 늘 여여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법은 공하고 중생들의 모양은 드러나니, 같다 다르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앞에서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데’라고 말했듯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든지, 같지 않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다고 한다면, 이미 시비분별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같다 다르다 하는 이유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일으키는 생각이다. 애초에 다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같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중생이니 불성이니 하는 그런 생각과 시비분별자체를 애초에 일으키지도 말라는 말로,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데',
라고 하는 것이다.
'일체법의 모양은 연을 따르고 있어 일어남이 없으니, 일어나는 모양의 성품은 여여하고, 여여함은 움직이는 모양이 없고'
일체 만법이 생기고 멸하는 것은 오직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인한 것일 뿐, 스스로 하는 것이 없으므로 ‘일체법의 모양은 연을 따르고 있어 일어남이 없으니’라고 하고,
이 연(緣), 즉 일체만법의 모양을 일으키는 인연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이고 드러난 만법의 모양들은 늘 이 한 법의 엄정하고 평등한 법칙과 작용인 인연을 따르니, 일어나는 모양이 어떤 모양으로 일어나더라도 다 법의 일이요 인연이니 역시 여여하다. 그래서 ‘일어나는 모양의 성품은 여여하고’라고 하는 것이다.
늘 말하지만, 여여하다는 말은 늘 그렇다는 말이고, 늘 그렇다는 말은 늘 법으로 일어날 뿐 다른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여함은 움직이는 모양이 없고’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여(如如)하다는 말은 법과 하나라는 말이고, 법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고, 법과 같다 다르다 할 것이 없음을 말하니 시비분별이 끊어짐과 같다.
그래서 세상에 법이 없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 시비분별이 사라지지 않으니 법을 보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因)과 연(緣)의 성품과 모양은 그 모양이 본래 공적하여 없어, 연과 연(緣緣)이 모두 공적하고 공적하여(空空), 반연하여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인과 연(因緣)과 연과 연(緣緣)은 유식학파의 4연(四緣)에서 기인된 말로 4연은 인연(因緣)과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소연연(所緣緣)과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먼저 인연(因緣)은 일체만법이 모두 인연으로 생겨나는데, 인이란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원인과 그 인을 도와주는 간접적인 원인인 연으로 세상만법이 일어나고 변하고 흘러감을 말한다. 즉 나무가 생기려면 먼저 직접적인 원인인 종자(種字)가 있어야 하고, 그 종자가 제대로 자라게 도와주는 물과 햇빛 흙, 공기 영양분 등 간접적인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인과 연은 이 한 법의 엄정하고 평등하며 모양 없는 법칙과 작용으로, 일체만법에게 조금의 차별도 없고 또 끊임도 없이 늘 한결같이 적용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여여(如如)하다고 하고 본래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인연(因緣)은 일체만법이 이 인과 연으로 화합해 생기고 변하고 멸함이 정확하게 운행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등무간연(等無間緣)은, 인간의 생각에 대한 것으로 앞의 생각이 인이 되어 뒤의 생각인 연을 일으키는 것으로, 앞 생각이 사라지고, 사라지는 그 앞생각이 연이 되어, 그 사이가 찰나의 틈도 없이 뒷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하고, 앞의 생각이나 뒤의 생각이나 모두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에 의하기 때문에 그 법의 체(體)는 똑같다고 하여 같을 등(等)을 써서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 하는데, 우리의 생각이 앞생각과 뒤 생각이 똑같은 법칙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등무간연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숨이 끊어지면, 더 이상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에 대한 인연을 말한다고 한다.
소연연(所緣緣)은 사람의 생각이 의지하는 대상, 즉 인식대상을 말하니, 눈에는 모양, 귀에는 소리 등을 말한다. 즉,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려면 대상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소연연은 인연의 필수조건이다.
증상연(增上緣)은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연 이외의 간접적인 모든 연을 말한다. 즉, 집과 땅 등의 물질적인 것도 있고 학연(學緣) 지연(地緣) 등 무형의 관계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이 정상적이고 대상이 뚜렷이 있다 해도 햇빛이 없으면 볼 수 없으니 햇빛도 또한 증상연이라하고, 또 소리도 공기가 없으면 소리가 전달되지 않으니 공기 또한 증상연이니, 엄밀히 말하면 우주의 모든 것은 총체적으로 증상연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본문을 다시 설명하면
‘인(因)과 연(緣)의 성품과 모양은 그 모양이 본래 공적하여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름하여 인과 연이라는 말을 붙이지만, 이 인과 연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이어서 본래 그러한 성품이지, ‘인(因)은 이런 모양이다.’ 또 ‘인의 성품은 이러한 물건의 성품이다.’ 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세상 만법이 법의 여여함으로 존재할 뿐, 개체적인 인과 연의 성품과 고정된 모양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연과 연(緣緣)이 둘 다 공적하고 공적하여(空空)’
라고 하는 말에서 연과 연, 즉 연연은 소연연(所緣緣)을 말하는데, 소연연은 우리의 인식대상을 말한다.
우리가 비록 소연연이 없으면 생각을 할 수 없지만, 우리의 대부분의 생각은 이 인식대상인 소연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알음알이로 지금의 대상을 보고 있으니 그런 소연연은 지금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세상에는 잠시도 머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다 하고 잡을 것이 없다. 그래서 소연연을 세상을 보는 잣대로 삼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연연의 법, 즉 만법이 인연의 수대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어떤 고정된 모양도 없고 또 지속가능한 뜻도 없기 때문에 ‘공적하고 공적하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연하여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하니, 만법이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자기 마음대로 인연을 왜곡하여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되어라.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안 돼.’ 등으로 반연하는 마음으로 바라고 얻으려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본래의 인연은 엄정하고 평등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일어나지만, 우리의 생각은 과거의 지식으로 습득된 알음알이로 인연을 짓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든 인연의 법은 미혹한 마음이 망령되이 보는 것이니,
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와 일체만법은 이 한 법의 엄정하고 평등하며 모양 없는 법칙에 의해 정확하고 빈틈없이 흘러가는데, 우리의 생각이 그것을 알지 못해 번뇌와 고통이 일어남을 말하는 것으로,
본문 전체의 뜻은 중생이라는 것은 번뇌와 고통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라 하지만, 본래는 마치 눈에 눈병이 들어 헛것을 보는 것처럼 망령된 생각이 지나간 과거의 모양을 들고 매 순간의 인연을 왜곡시켜 봐서 번뇌와 고통이 생겼을 뿐, 본래는 티끌하나 삿됨이 없는 법 그 자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인연에 대한 말과 아래에 설명할 말은, 중생이 불성과 다르지 않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드러난 것이 본래 일어남이 없는 것은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고, 마음은 법의 이치와 같아 그 자체가 공하므로 없어'
이처럼 세상만법이 끊임없이 변하여 흘러가도 본래 그러할 뿐, 그 개체로서의 인과 연의 뜻도 모양도 성품도 없고, 마음 또한 그저 비춰만 줄 뿐,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아 공적하다는 말이다.
'마치 저 공의 왕(空王)이 본래 머무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은데, 범부의 마음으로 망령되이 분별하여 보는 것이다.'
공왕(空王)은 부처님을 말하고, 본래 머무는 곳이 없다는 말은 일체만법과 이 한 법의 공적함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아 어떤 일에도 걸림이 없어 늘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실인데,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또 부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중생이 참다운 성품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는 헛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법을 말할 때에 어떻게 말하고 어떤 비유를 들든, 항상 ‘일체가 한 법이고 내가 부처다.’라는 생각으로 들어라.
그러면 부처님은 이 한 법을 말하고, 이 한 법으로 드러난 일체만법을 말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선사들이 도를 물으면 하나같이 옆에 보이고 들리는 대로 들어서 말하고, 깨달음도 그렇게 얻었다.
그래서 조주선사(趙州禪師)는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켰고, 그 조주의 잣나무를 오조법연(五祖法演)은 벽암록을 지은 제자 원오극근(圓悟克勤)에게,
“누가 선사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한 것은 법의 모양을 가리킨 것이다.”
라고 하였고, 원오극근은 그 말에 마음이 열려 밖으로 나갔는데 마침 닭이 회를 치며 우니, 그것을 보고 외치기를
“이 소리가 바로 그 소리가 아닌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 향엄지한(香嚴智閑)은 자신이 던진 돌이 대나무에 맞아 ‘딱’하고 내는 소리에 깨달았고, 서산대사는 새벽 닭소리에 깨달은 것이다.
법과 만법이 이러하여, 어떤 것이 공왕이다. 무엇이 공왕이다 할 것이 없고, 그러면서도 일체가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공왕(空王)이 아닌 것이 없어 일체만법이 모두 공왕이니 공왕이 어디에 따로 자리 잡고 머물겠는가?
그래서
'마치 저 공의 왕(空王)이 본래 머무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은데'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연에 휘둘리는 중생의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실제로 중생이 미욱하고 어리석고, 또 참된 성품이 없어서 중생이 된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비교하고 시비하는 알음알이에 속아 번뇌와 고통에 빠진 것일 뿐이다.
그래서
'범부의 마음으로 망령되이 분별하여 보는 것이다.'
라고 하니,
그 망령된 마음만 잊으면 될 뿐, 범부 중생은 본래부터 미혹함이 없으니 따로 얻을 부처도, 참 성품도 해탈, 열반도 없는 것이다.
서양동화에 개구리 왕자 이야기가 있다. 사람인 왕자가 마법에 걸려 개구리가 되었지만, 어느 왕국의 공주가 우물에 빠뜨린 금으로 된 공을 빠뜨렸는데, 이 개구리왕자가 공주에게 자신을 친구로 삼는다면 그 공을 건져주겠다고 제안을 하고, 공주는 다급한 마음에 약속을 하였지만, 공을 돌려받은 공주는 마음이 변하여 도망치듯 궁으로 갔는데, 개구리는 끝까지 따라가 약속을 지키라고 조르니 화가난 공주가 개구리를 벽에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마법이 풀려 공주와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까지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조금 세밀히 생각을 해서 보면, 개구리 왕자가 사람이 되려면 애초부터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들어온다. 왜냐하면 만약에 왕자가 본래부터 개구리인데 마법으로 사람이 된다해도 마법이 풀리면 반드시 개구리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반대로 사람인 왕자가 마법으로 개구리가 되었기 때문에 끝내 개구리가 될 수가 없고 마법이 풀려 왕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정말로 부처와는 완전히 다른 중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무리 마법을 써서 부처가 된다 해도, 조금만 잘못하면 마법이 풀려 중생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깨달아도 평생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고, 또 늘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實相)은 중생이 참된 성품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시비분별이라는 마법만 풀면 바로 부처가 되고, 다시는 그 마법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 마법을 푸는 열쇠가, 이 세상의 인연이라는 것은 모두가 이 한 법의 본래 그러함이지, 우리의 생각으로 지은 그러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예쁨과 추함, 사랑함과 미워함 등의 뜻과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체의 시비분별을 여의는 것이다.
오늘 법문은 우리가 인연이라 하며 생각하고 짓고 분별하는 것은 모두 생각으로 지은 것일 뿐, 참된 인연은 이 한 법의 엄정하고 평등한 법칙과 작용이니, 모든 시비분별을 여의라는 말이다.
그래서 늘 말하듯이 오늘도 말한다.
“일체가 한 법이다. 내가 부처다.”
늘 염불하듯 쉼 없이 되뇌라. 그것이 또한 마법을 푸는 열쇠다.
댓글목록
없음님의 댓글
읔!손가락이.. ^^
돈을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반야지님의 댓글
그래서 저는 매주 로또를 삽니다.아름다운 생각을 하면서 ....... 선지식이 있어야되고. 도반이 있어야되고.. 선원(장소)가 있어야 됨을 기다려 봅니다. 다 ㅡ 잘될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