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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알아차림에 대해 여쭙니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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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일체가 한 법입니다.
이 우주삼라만상은 이 한 법의 정확하고 평등하고 엄정하며 모양없는 작용과 법칙에 의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티끌부터 우주 전체까지 다 이 법의 성품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일체가 법 아님이 없고 둘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은 알아차리는 주체와 알아차림의 객체가 둘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려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없으면 그냥 살지 알아차리려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법의 모양, 깨달음의 모양을 생각으로 그리고 그런 모양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알아차림이 옳은 방법이라면, 일체가 한 법이라는 말이 거짓이 됩니다.
앞에서 티끌부터 우주전체까지 이 법의 성품을 똑같이 가지고 있어 일체가 법 아님이 없다고 했는데,
거기서 다시 알아차리려 한다는 것은 법이 다시 법이 되려하고 깨달으려 하는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은 이미 법인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게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필요없이 그냥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법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깨어있음, 알아차림 등의 교묘한 말에 속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지 않고 법이란, 또는 깨달음이란 어떤 모양을 만들고는, 그 모양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늘 알아차리려 하고 깨어 있으려 하기 때문에, 그 생각의 모양에 갇혀 있는 그대로 법인 자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행위가 모자라서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란 이런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라는 모양을 짓고는 그 모양에 자신을 빗대어 보니 자신이 모자라고 부족해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그 한 생각이 다시 자신이 그린 모양의 법과 깨달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고 이리저리 고치려 합니다.
그러니 그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어떻게 제대로 바르게 볼 수 있으며 법임을 믿겠습니까?
알아차림은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듣고 배운 지식으로 마치 자신이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는 그런 모양을 만들어 그것에 가까운 자신을 만들려고 하는 망상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그 생각의 잣대에는 아주 만족하고, 또 법에 가까운 자신을 만드는 착각과 성취감을 줄지는 모르지만, 정작 자신을 생각의 잣대에 비추어 끊임없이 살피고 분별하고 시비하여 있는 그대로 살게 놔두지 않는 망상일 뿐 절대로 법의 모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바로 모양 없고, 엄정하고 평등하며 차별 없는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가로막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조당집(祖堂集)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육조스님의 제자이며 인도사람인 굴다삼장(堀多三藏)법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신수(神秀)대사의 제자가 초막에서 홀로 앉아 마음을 관하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무엇을 하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고요함을 지켜봅니다.”
“지켜보는 이는 누구이며 고요함이란 무엇인가?”
스님이 얼른 일어나 절을 하고 물었다.
“그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지시해 주소서.”
삼장이 말했다.
“왜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하지 않는가?”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굴다 법사는 그의 근성이 매우 둔한 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신수(神秀) 화상이십니다.”
“그대의 스승은 이 법만을 가르치던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던가?”
“저더러 그저 고요함만을 지켜보라 했습니다.”
“그것은 서천(西天)의 하열한 외도들이 익히는 법이다. 이 땅은 선종인 줄로 알았는데, 역시 사람들을 대단히 그르치고 있구나.”
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육조(六祖)대사이시니라.”
이어 다시 말했다.
“바른 법은 듣기 어려운 것인데 그대는 어째서 거기로 가지 않는가?”
그 스님이 삼장의 충고를 받자, 바로 조계로 가서 육조대사를 뵙고, 위의 일을 자세히 아뢰니, 육조대사가 말했다.
“굴다의 말이 옳다.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해 지려고 하지 않고, 누구더러 그대를 고요하게 하라 하는가?”
그 스님이 이 말씀에 크게 깨달았다.
(조당집 굴다삼장편)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이 몇 개 있는데 첫째는,
굴다삼장이 신수의 제자가
“고요함을 지켜봅니다.”
할 때
“지켜보는 이는 누구이며 고요함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바로 일체가 한 법인 불이법인데, 누가 누구를 지켜보고, 또 일체가 한 법인데 고요함이라는 것이 따로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굴다삼장이 신수의 제자에게
“왜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하지 않는가?”
라고 하는 말입니다.
스스로를 보라는 말은 고요함과 네가 둘이 아닌데 너는 너와 고요함을 나누어 보고 있구나, 왜 스스로가 고요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하는 말입니다.
즉 스스로 고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바로 네가 바로 고요함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요함이라는 것이 또 없습니다. 일체가 한 법인데, 고요함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굴다삼장이 신수가 어떻게 가르치더냐? 하고 물었을 때,
“저더러 그저 고요함만을 지켜보라 했습니다.”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요함을 지켜보면, 이미 이 사람은 법을 하나로 보지 않고 나누어진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굴다삼장은
“그것은 서천(西天)의 하열한 외도들이 익히는 법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서천의 외도는 소승인데, 그것을 다 설명하려면 너무나 길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신수제자가 육조스님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육조스님이 말한
“굴다의 말이 옳다.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해 지려고 하지 않고, 누구더러 그대를 고요하게 하라 하는가?”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굴다삼장이
“왜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하지 않는가?”
라고 한 말과 조금도 다른 말이 아닙니다.
거기에 좀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누구더러 그대를 고요하게 하라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일체가 하나여서 네가 바로 고요함인데 누구에게 다시 너를 고요하게 하라는가? 하는 말입니다. 즉 법이 두개인가?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요함이라는 것은 이 법이 공(空)하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공하다는 말은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고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고요하다는 말은 인간들이 쓰는 고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삼라만상은 이 한 법의 연기작용으로 모든 것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깨달은 자는 이 한 법과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의 연기법의 이러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은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중도연기란,
일체 만법, 님과 저를 포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만법이라는 것은 이 우주의 티끌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양과 사물뿐만 아니라, 그 형태와 사물의 움직임까지도 일체만법입니다.
그래서 님과 저뿐만 아니라 님과 저의 생각과 행동 등 모든 것도 다 일체만법입니다.
그 일체만법이 이 한 법의 성품을 빠짐없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미산이 겨자씨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모양으로만 보면 좁쌀보다 더 작은 겨자씨 안에 어찌 한 세계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수미산이 들어가겠습니까만, 겨자씨가 가지고 있는 이 한 법의 성품이 수미산이 가지고 있는 이 한 법의 성품과 조금도 차별이 없기 때문에 수미산이 겨자씨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일체만법이 조금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도(中道)라 하고, 연기(緣起)는 중도와 떨어지지 않는데, 이 한 법으로 드러난 만법은 정확하고 엄정하며 평등하며 모양 없는 법칙과 작용, 즉 연기법과 연기작용에 의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기작용을 일으켜 세상에 갖가지 모양으로 나타나기 위해선, 일체만법이 모두 똑같이 평등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중도와 연기가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중도연기(中道緣起)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도연기가 바로 이 한 법의 성품이요, 법칙이요 작용입니다. 일체가 한 법이니 성품이 곧 법칙이요, 작용입이다.
그렇게 중도연기는 일체만법이 모두 이 한 법의 성품을 가지고 서로 인연이 되어 변해가는 것으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님과 저, 그리고 님과 저의 행동과 생각들까지 어떤 것도 이 한 법의 성품과 연기법에 의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서로 인연이 되어 변해갑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온갖 모양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양만 보면 어떻게 보면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한 법의 작용이요, 무엇이든지 예외가 없으니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본래그러함이 바로 여여(如如)입니다. 여(如)란 같다. 또는 그렇다는 뜻이니, 여여는 '같고 같다.' 또는 '그렇고 그렇다.'는 뜻입니다. 뭐가 그렇다는 것이겠습니까? ''일체가 법과 같고 법 법이 그렇듯 다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 시끄럽고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이 세상의 일이, 모두 이 한 법으로 드러나고 이 법의 성품과 법칙을 지니고 있어, 이 세상의 일은 모두 법과 같이 늘 그렇다는 말입니다.
늘 그러하는 것은 곧 본래 그렇다는 뜻이니, 모든 것이 본래 그러한데 거기에 무슨 일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고요한 모양을 가지고 고치려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고요함은 오히려 이 법으로 볼 때는 시끄러운 일이요, 망상일 뿐입니다.
본래 그러하기에 그것에 대해 어떤 시비도 하지 않는 것을 일러 법대로 두는 것이요 고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조사들이 '시비분별을 여의라.' 하고, 또 '본래 아무 일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 연기법의 변화를 두고 시끄럽다 하여 그것을 그치려고 하고는 마음대로 안 되니 스스로 번뇌에 빠져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신수의 제자가 고요함을 지켜본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치고 고요하게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요함을 지켜보는 그 마음은 과연 고요할까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시비하는 마음을 그치는 것이 고요함인데, 인연에 의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을 그치려고 지켜보는 것이 고요함이라면 오히려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인데 과연 고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굴다삼장과 육조대사가
“지켜보는 네가 시비하지 않으면 이미 네가 바로 고요함인데, 누구더러 다시 너를 고요하게 하려고 하는가?”
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우주는 우리의 생각이나 시비나 잣대와 아무런 상관없이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그것이 중도연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 그러함이고 여여이며, 금강삼매경에서 말하는 결정성(決定性)입니다. 즉, 이 우주는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에 의해 흘러가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본래 그러한 것을 인간의 시각으로 자꾸 잣대를 대니 시끄럽게 여겨지고, 시끄럽게 여겨지니 알아차리려 하고 깨어 있으려 하는 것입니다.
모두 망상입니다.
그리고 이 법은 단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고 늘 깨어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지만, 님의 물음이 장문을 쓰게 하니 그 인연을 따릅니다.
중국에 고봉원묘(高峰原妙)라는 선요(禪要)를 지은 선사가 있습니다.
이 선사가 깨닫지 못했을 때에, 나름대로 수행이 깊어 꿈에서도 자신을 지켜보고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스승 설암(雪庵)선사가 하루는 고봉을 불러
“너는 생시에 주재(主宰)가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주재가 된다는 말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즉, 알아차림을 말한 것입니다.
스승이 묻자 고봉은
“네 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잠잘 때 꿈에서도 주재가 되느냐?”
하고 물으니 고봉은 역시
“네 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만하면 이 사람의 공력이 얼마인지 알겠지요? 아마 알아차리려는 사람들은 이 사람처럼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설암선사가 다시 묻습니다.
“그런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고 듣는 것도 없을 때에 주재가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주재라는 것은 살피는 주체와 살펴지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도 듣는 것도 없는데 어떻게 주재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에 고봉은 콱 막혀 깜깜한 밤중을 헤맨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곳 저곳 만행(萬行)을 하면서 오로지 주재가 되는 것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4~5년이 지난 후 어떤 절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잠이 들었다가 중간에 깨어 잠이 오지 않자, 늘 그렇듯이 자리에 앉아 알아차리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옆에서 자던 도반이 몸부림을 치면서 목침을 떨어뜨려 목침이 떨어지면서
“탁~!”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 고봉은 가슴이 뻥 뚫려 모든 것 의심이 한 순간에 날아갔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동안 스스로 깨어 있으면서 알아차리려 했던 것이 얼마나 생각의 마구니에 속았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즉, 저렇게 도반이 잠을 자는데도 이 법은 그 도반을 끊임없이 움직여 목침을 떨어뜨린 것을 보며, 깨어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이 한 법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늘 이렇게 살아가도록 깨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성적적(惺惺寂寂)입니다.
이 한 법이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어 우리가 알 수 있는 어떤 흔적도 없어 고요하고 고요하여 적적(寂寂)하지만, 인연이 되면 늘 만법을 인연따라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 성성(惺惺), 즉 깨어 있음입니다.
그래서 성성적적(惺惺寂寂)은, 모양 없고 기미도 없고 흔적이 없어 적적한 이 한 법이 잠시도 잠이 들지 않고 늘 깨어 있어 우리가 이렇게 묻고 답하기를 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한 법이 만법을 움직이므로 우리가 이렇게 보고 듣고 말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연 따라 살아가면 될 뿐, 따로 깨어 있거나 알아차릴 것이 없습니다.
만약 따로 알아차리려 하면, 고봉선사처럼 설암의 말에 막혀 깜깜한 밤을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고, 알아차림을 멈추지 않으면 그 긴 밤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님의 자유이지만, 알아차림은 수행이 아니라, 마군이 집으로 들어가는 망상일 뿐입니다. 다만 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말에 속아서 수십 년을 공부하면서도 이 자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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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능조님의 댓글
수행이라는 생각에 지배되어 바른 길에 접어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 올려진 선생님의 가르침을 찬찬히 읽어 보고 있습니다.
가르침 하나 하나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선생님의 자상한 가르침 너무나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도움이 되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늘 둘이 아닌 이 자리를 잊지 마시고 나아가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