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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 10월 27일 육조단경 40. 전법게(傳法偈) 1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6,731

16-10-28 16:04

본문

대중들이 듣고 난 뒤 대사의 뜻을 알고는 감히 다투지 못하고 법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였다. 일시에 예배하며 곧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을 알았다.

상좌 법해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대사님, 대사께서 가신 뒤에 가사와 법을 누구에게 부촉하시렵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이 곧 부촉을 마친 것이니 너희는 모름지기 묻지 마라. 내가 떠난 뒤에 이십여 년은 삿된 법이 요란하여 나의 종지를 흐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몸과 목숨(身命)을 아끼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하고 똑바로 세울 것이니 그것이 바로 나의 바른 법이다. 그러므로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들이 믿지 않을까 하여 내가 선대(先代)의 다섯 조사(五祖)들께서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한 게송을 외워주겠다. 만약 제 일조 달마조사 게송의 뜻에 의거하면 가사를 전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잘 들어라.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외우겠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제 일조 달마화상(達磨和尙)께서 게송에 말씀하셨다.

나는 본래 당나라에 와서 가르침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려 하니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衆僧旣聞하고 識大師意하고는 更不敢諍하고 依法修行하였다 一時禮拜하며 卽知大師不永住世하였다 上座法海向前言하되 大師여 大師去後에 衣法을 當付何人하리이까 大師言하되 法卽付了니 汝不須問하라 吾滅後二十餘年은 邪法撩亂하여 惑我宗旨하나 有人出來하여 不惜身命하며 定佛敎是非하여 竪立宗旨하리니 卽是吾正法이라 衣不合傳이니라 汝不信하니 吾與誦先代五祖傳衣付法頌하리라 若據第一祖達磨頌意하면 卽不合傳衣니 聽하라 吾與汝誦리라

頌曰

第一祖達磨和尙 頌曰

吾本大來唐國하여 傳敎救迷情하니 一花開五葉하니 結果(菓)自然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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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초당님의 댓글

깊은 법문!..... '깨달음을 막는 가장 큰 원인'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밤 불교TV를 잠깐 보았는데, 간화선특별법회에 대종사가 나와서 하시는 말씀이, 화두 들고 수행을 열심히 해서 "한국 간화선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정진하라"고 학인들에게 당부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요. 이 또한 '없는 것을 있게 하려는' 부질없는 망상이겠지요.

윤기붕님의 댓글

간화선이란 볼 간(看)자에 화두의 화(話)자의 합성어로 화두를 본다는 뜻인데,
화두란 말머리라는 뜻이지만, 말이 일어나기 전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어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이 일어나기 전의 것이라 하면, 또 말이 일어나기 전의 무슨 뜻이 있는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조주선사께서 법을 '뜰 앞의 잣나무'라 한 것이 바로 말이 일어나기 전을 가리킨 것입니다.
물론 이름을 붙였으니 이미 말이 일어났지만,
뜰 앞의 잣나무는 우리가 이름을 그렇게 붙였으니 뜰 앞의 잣나무라고 호칭을 하지만,
원래 이름이 없고 그렇게 그런 인연이 되어 그 자리에 있는 무엇인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조주선사가 말한 법입니다.
조주선사가 법에 대한 물음에 뜰앞의 잣나무란 말을 붙인 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부르니 그렇게 부른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름을 붙이기전이나 붙인 후나, 다만 이름만 붙었을 뿐, 그것은 여전히 그것입니다.
그 속에 다른 의미나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두를 말이 일어나기 전이라 하니 무슨 숨은 속 뜻이 있는 줄 알지만,
사람이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붙이고 모양을 지은 것이 아닌,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숨은 뜻이 있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있는 것에 뜰 앞의 잣나무라 이름을 붙인 것이 숨은 뜻입니다.
잣나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부터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진 나무는 내가 본 잣나무의 잣대 아래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렇게 그런 인연으로 있는 무엇이 잣나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고, 그것이 사람마나 그것을 보는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결국 숨은 뜻은 사람이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지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그냥 그것을 그대로 보면 그것은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만법이 모두 그것과 같은 법칙으로 생기고 변하며 흘러갑니다.
그것을 바로 연기법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조주선사가 법을 묻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것은 그것 그대로 법이니 그렇게 보라는 뜻입니다.
이는 금강경 첫 사구게에서 범소유산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무릇 모든 모양은 허망하니 만약에 모든 모양이 모양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본다.'
는 말에서 모든 모양이 허망하다는 것은 사람이 의미를 지어서 붙인 모양은 모두 실재하지 않은 허망한 것이라는 뜻이고,
모양이 모양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본다는 것은
그래서 사람이 의미를 지어서 붙인 모양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본래 모양 즉 여래, 법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주선사의 화두로 보면
'뜰앞의 잣나무라는 것은 사람이 붙인 이름과 모양을 가진 허망한 것이니 만약 사람의 생각으로 지은 모양을 가진 뜰앞의 잣나무로 보지 않으면  곧 그대로 여래(법)을 본다.'
는 뜻입니다.

일체 만법은 모양이 없는 모양입니다.
이말은 잣나무니 뜰이니 하는 등의 이름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인간이 붙인 이름이요 모양이어서 실재 모양이 아니라 인간의 뜻과 감정이 들어간 허망한 것들입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 즉 만법은 그냥 그렇게 법의 인연으로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로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입니다.

즉, 사람의 뜻으로 뜰앞의 잣나무로 보지 않고는 것이 범소유상 개시허망이고
그냥 그러한 것이 저렇게 인연으로 있는 저 모든 것이 다 법이구나 하고 보는 것이 바로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입니다.

일체 만법을 이렇게 볼 때에 일체가 모두 법 아님이 없으니 곧 여래를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오랜 습으로 세상 만물을 다 이름짓고, 그 이름마다 뜻을 붙여 보니, 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모양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이 바로 법임을 알지 못하고 개체적인 모양과 뜻을 가지고 있어 법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간화선이란 바로 이처럼 모양을 모양으로 보지 않고 그대로 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뜰 앞의 잣나무는 우리가 붙인 이름과 모양이고, 그저 매 순간 법의 인연으로 변해가는 법 그자체로 보는 것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두를 뜻풀이 하듯이 궁리를 합니다.
그리곤 자신이 아는 모든 생각을 총 동원하여 헤아리고 있으니 법은 인간의 생각과 뜻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흘러가니
아무리 생각으로 헤아리고 궁리해도 법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화두가 그대로 법입니다. 그 속에 어떤 숨은 뜻도 없습니다.
자신이 자꾸 전도된 생각으로 찾으니 마치 무슨 뜻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그래서 '이뭣고'하는 화두도 역시 '이뭣고' 하는 그놈이 바로 법입니다.
그러니 간화선을 하고 있는 그 놈이 바로 법임을 아는 것이 바로 볼 간(看)에 화두를 말하는 화(話)를 붙여서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화두는 말머리입니다. 말머리란 말에 머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의미가 붙기 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붙지 않은, 모양을 붙이지 않은, 의미를 붙지 않은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래서 뜰앞의 잣나무는 금강경에서 말하듯,
잣나무는 잣나무가 아니라 이름이 잣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양이 모양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 즉 법을 보는 것이라는 사구게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가 다 그러합니다.
운문의 마른 똥작대기도 그대로가 법이고, 동산의 삼 서근도 삼베서근 안에 법의 뜻이 들은 것이 아니라 삼 서근 그대로 법입니다.
일체가 다 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렇게 간화선을 할 수 있다면 일체가 법이요 선이어서 따로 간화선이라 할 것도 없고
세상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법임을 알고, 또 그것을 법임을 알면
그것을 아는 자신 역시 법임을 아는 것이니 따로 간화선을 하는 놈도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간화선을 하는 것이지
만약 간화선이 수행이 된다면 이미 간화선은 죽어버린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데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유위요 조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없는 것을 있게 하려는 부질없는 망상'이라는 안선생님의 말씀이 옳은 말씀입니다.

조나단님의 댓글

장문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