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
Re: 오매일여
작성자 : 수연(隨緣)추천수 : 0조회수 : 3,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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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대혜종고의 오매일여>
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다"는 뜻인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말에 미혹되어 그릇된 방향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안목없는 스님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매일여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오매일여라는 어떤 경계를 얻어야 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하여 차근차근 그 경계를 성취해가야 한다고 여기면서, 하루종일 쉬지 않고 그 경계를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전부 유위의 조작으로서 본래면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망상을 만들 뿐인데도, 마치 그렇게 애쓰는 것이 곧 올바른 공부인양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선 공부에서 오매일여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대혜종고 스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오매일여가 궁금하신 분들은 반드시 꼼꼼히 잘 읽어 보시고 바른 길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1). 오매일여의 경전 상의 근거
*. [수능엄경] 제10권 첫 부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경전에서 말하는 오매일여의 유일한 증거이다. [수능엄경]에선 오매일여라 하지 않고 오매항일(寤寐恒一)이라 표현하고 있으나 같은 뜻이다.
“아난(阿難)아, 저 선남자는 삼매(三昧)를 닦아서 상온(想蘊)이 다 소멸한 자이다.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깨나 늘 한결같다. 깨달음은 밝고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아서, 다시는 굵직한 앞서의 티끌 그림자가 없다. 세간의 모든 산하대지(山河大地)를 보면 마치 거울에 밝게 비추인 듯하여, 다가와도 붙잡지 않고 지나가도 흔적이 없다. 헛되이 비추고 반응하니 오래된 습기(習氣)가 전혀 없고 오직 하나의 맑고 참됨이 있을 뿐인데, 생겨나고 사라지는 뿌리가 원래 이것에서 나타난다.
”(阿難, 彼善男子 修三摩提 想陰盡者. 是人平常 夢想銷滅 寤寐恒一. 覺明虛靜 猶如晴空, 無復麤重 前塵影事. 觀諸世間 大地河山 如鏡鑑明, 來無所粘 過無蹤跡. 虛受照應 了罔陳習, 惟一精眞, 生滅根元 從此披露.)
*.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깨나 한결같다"한 것에서 "소멸"을 "다 사라져 없다"는 단멸(斷滅)한 경계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불법(佛法)은 단멸도 상주(常住)도 아닙니다. 단멸과 상주는 한 쪽으로 치우친 변견(邊見)이니, 외도의 분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조단경]에서 육조스님은 지도선사에게 [열반경]을 가르치면서 생멸(生滅)이 곧 적멸(寂滅)이어서 생멸과 적멸은 둘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입니다. "꿈과 생각이 소멸하였다."고 하여 "꿈과 생각이 없다"고 이해해서도 안되고, "자나깨나 한결같다"고 하여 "자나깨나 한결같음이 있다"고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2). 『대혜서장』의 내용.
*. 이참정(李叅政) 한노(漢老)에 대한 답서⑵
편지를 받아보니 우러러 보는 마음이 더욱 더합니다. 매일 매일 인연을 따라 놓고 비워가서 뜻대로 자재합니까? 가고․머물고․앉고․눕고 하는 행동거지에서 티끌 경계에 끄달리지는 않습니까? 잠과 깸의 두 경계에서 한결같을 수 있습니까? 이전처럼 생활하면서 원래의 모양에서 달라짐이 없습니까? 생사심(生死心)을 이어가지는 않습니까?
다만 범속(凡俗)한 정식(情識)을 없애면 될 뿐 따로 성스런 지해(知解)는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한 번 웃음에서 활연히 바른 눈이 열려서 세간의 소식을 문득 잊었으니, 힘을 얻음과 얻지 못함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보아 그 차갑고 따스함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信後益增瞻仰. 不識日來隨緣放曠如意自在否? 四威儀中不爲塵勞所勝否? 寤寐二邊得一如否? 於仍舊處無走作否? 於生死心不相續否?
但盡凡情別無聖解. 公旣一笑 豁開正眼 消息頓亡, 得力不得力 如人飮水冷煖自知矣.
*. 향시랑(向侍郞) 백공(伯恭)에 대한 답서
편지에 말씀하신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꿈과 깸이 하나다.”는 한 개 인연(因緣)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대가 반연(攀緣)하는 마음으로 법(法)을 들으면 이 법도 인연(因緣)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없다’는 말은 ‘있다 없다’라고 할 때의 ‘없다’가 아닙니다. 꿈과 꿈 아님이 하나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이 황금북[金鼓]을 꿈꾼 것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 얻는 것을 꿈꾼 것과 공자(孔子)가 두 기둥 사이에서 제물(祭物)을 올리는 것을 꿈꾼 것을 또 꿈과 꿈 아닌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세간(世間)을 살펴보면 오히려 꿈 속의 일과 같습니다.
경전 가운데 분명한 글이 있습니다. “오직 꿈은 곧 전적으로 망상(妄想)인데도 중생이 거꾸로 뒤바뀌어 매일 대하는 눈 앞의 경계를 진실하게 여기고 이 모든 것들이 꿈인 줄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 가운데에서 다시 허망한 분별을 내어, 얽매인 생각 속의 헛된 의식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을 참된 꿈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꿈 속에서 꿈을 말하는 것이며 거꾸로 된 가운데 다시 거꾸로 되는 것임을 전혀 모르는 짓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큰 자비와 간절한 노파심으로 모든 법계를 전부 안립(安立)해 놓은 바다 속의 티끌 속으로 두루 들어가,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몽자재법문(夢自在法門)을 가지고 세계가 늘어서 있는 바다 속의 티끌 수 만큼 많은 중생이 삿된 선정(禪定)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일깨워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곳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것을 또한 거꾸로 된 중생들에게 두루 보여 주어, 눈 앞에 실제로 있는 경계를 안립(安立)된 바다로 여겨서 꿈과 꿈 아님이 모두 환상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꿈이 곧 진실이며 모든 진실이 곧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지인(至人)에게는 꿈이 없다는 뜻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보내신 편지의 질문을 보니 바로 제가 36세 때에 의심했었던 것이더군요. 읽어보니 자신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는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일찍이 이 문제를 가지고 원오(圓悟) 선사(先師)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원오 선사는 다만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만, 그만하고, 망상을 쉬어라. 망상을 쉬어라.”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제가 아직 잠이 들기 전에는 부처님이 칭찬하신 것에 의지하여 행하고 부처님이 비난하신 것을 감히 범하지 않으며, 이전에 스님들에게 의지하고 또 스스로 공부하여 조금 얻은 것을 또렷하게 깨어 있을 때에는 전부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상에서 잠이 들락말락할 때에 벌써 주재(主宰)하지 못하고, 꿈에 황금이나 보물을 보면 꿈 속에서 기쁘함이 한이 없고, 꿈에 사람이 칼이나 몽둥이로 해치려 하거나 여러 가지 나쁜 경계를 만나면 꿈 속에서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이 몸은 오히려 멀쩡하게 있는데도 단지 잠 속에서 벌써 주재할 수가 없으니, 하물며 죽음에 임하여 육체를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흩어지며 여러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다가올 때에 어떻게 경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러면 마음이 허둥지둥 바빠집니다.”
원오 선사께서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는 허다한 망상이 끊어질 때에, 너는 스스로 깨어 있을 때와 잘 때가 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믿지 않고 매양 말하였습니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면, 깨어 있음[寤]과 잠들어 있음[寐]이 분명히 둘인데, 어떻게 감히 입을 크게 벌려 선(禪)을 말하겠는가? 다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깨어남과 잠이 늘 하나라는 말이 망녕된 말이라면 나의 이 병을 없앨 필요가 없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사람을 속이지 않으시므로 이것은 곧 내 스스로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뒤에 원오(圜悟) 선사(先師)께서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에 따뜻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서 홀연 가슴에 걸려 있던 것이 내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한 말이며, 있는 그대로의 말이며, 속이지 않는 말이며, 망녕되지 않은 말이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참으로 커다란 자비로서, 몸을 가루로 만들어 목숨을 버리더라도 갚을 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가슴에 걸려 있던 것이 없어지고나서야, 비로소 꿈꿀 때가 바로 깨어 있는 때이며 깨어 있는 때가 바로 꿈꾸는 때라는 것을 알았으며, 비로소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늘 하나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도리는 꼭 집어내어 남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습니다. 마치 꿈 속의 경계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편지에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하고 저에게 질문한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니 글자 하나하나가 지극히 정성스러워서, 선을 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따지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 까닭에 옛날 의심했던 곳을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원컨대 거사(居士)께서는 “다만 모든 있는 것을 비워버릴지언정 모든 없는 것을 결코 진실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방거사(龐居士)의 말을 시험삼아 느긋하게 분들고 있어 보십시오. 먼저 눈 앞에 매일 사용하는 경계를 꿈이라고 분명히 이해한 뒤에 도리어 꿈 속의 일을 가지고 눈 앞으로 가져온다면, 부처님의 금고(金鼓)와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얻은 것과 공자(孔子)가 두 기둥 사이에서 제물(祭物)을 올린 것이 결정코 꿈이 아닐 것입니다.
答向侍郎(伯恭)
示諭 “悟與未悟夢與覺一.” 一段因緣. 黃面老子云. “汝以緣心聽法, 此法亦緣.” 謂‘至人無夢’, 非有無之無. 謂夢與非夢一而已. 以是觀之 則佛夢金鼓 高宗夢傅說 孔子夢奠兩楹 亦不可作夢與非夢解.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敎中自有明文. “唯夢乃全妄想也 而衆生顚倒 以日用目前境界爲實 殊不知 全體是夢.” 而於其中復生虛妄分別 以想心繫念神識紛飛爲實夢, 殊不知 正是夢中說夢 顚倒中又顚倒.
故佛大慈悲老婆心切 悉能遍入一切法界諸安立海所有微塵, 於一一塵中 以夢自在法門 開悟世界海微塵數衆生 住邪定者入正定聚. 此亦普示顚倒衆生, 以目前實有底境界 爲安立海 令悟夢與非夢悉皆是幻. 則全夢是實 全實是夢 不可取不可捨. 至人無夢之義 如是而已.
來書見問 乃是宗杲三十六歲時所疑. 讀之不覺抓著痒處. 亦嘗以此問圜悟. 先師但以手指曰. “住住. 休妄想休妄想.” 宗杲復曰. “如宗杲未睡著時 佛所讚者依而行之 佛所訶者不敢違犯, 從前依師 及自做工夫 零碎所得者 惺惺時都得受用. 及乎上床半惺半覺時 已作主宰不得, 夢見得金寶 則夢中歡喜無限, 夢見被人以刀杖相逼 及諸惡境界 則夢中怕怖惶恐. 自念 此身尙存 只是睡著已作主宰不得, 況地水火風分散 衆苦熾然 如何得不被回換? 到這裏方始著忙.” 先師又曰. “待汝說底許多妄想絶時, 汝自到寤寐恒一處也.” 初聞亦未之信每曰. “我自顧, 寤與寐分明作兩段, 如何敢開大口說禪? 除非佛說寤寐恒一是妄語 則我此病不須除, 佛語果不欺人 乃是我自未了.”
後因聞先師擧 “諸佛出身處熏風自南來.” 忽然去却礙膺之物. 方知黃面老子所說 是眞語實語如語不誑語不妄語, 不欺人眞大慈悲, 粉身沒命不可報. 礙膺之物旣除, 方知夢時便是寤時底 寤時便是夢時底, 佛言寤寐恒一 方始自知. 這般道理 拈出呈似人不得, 說與人不得. 如夢中境界 取不得捨不得.
承問 “妙喜於未悟已前已悟之後有異無異?” 不覺依實供通. 子細讀來敎字字至誠, 不是問禪 亦非見詰. 故不免以昔時所疑處吐露.
願居士試將老龐語謾提撕. “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 先以目前日用境界 作夢會了 然後却將夢中底 移來目前, 則佛金鼓 高宗傅說 孔子奠兩楹 決不是夢矣.
(3). 『오등회원(五燈會元)』 제19권 임안부(臨安府) 경산(徑山) 종고대혜보각(宗杲大慧普覺) 선사(禪師의 내용.
하루는 원오(圜悟) 스님이 상당하여 말했다.
“어떤 승려가 운문(雲門)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몸을 드러내는 곳입니까?’라고 하자, 운문이 말했다. ‘동산(東山)이 물 위로 간다.’ 나라면 그렇지 않다. 문득 누가 묻기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몸을 드러내는 곳입니까?’라고 한다면 다만 그에게 말하겠다.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殿閣)이 좀 시원하구나.’”
대혜(大慧)는 말 끝에 문득 앞뒤의 시간이 끊어졌다. 비록 그렇긴 하였지만, 활동하는 모습은 생기지 않고 도리어 깨끗이 벗어난 곳에 머물러 있었다. 원오가 말했다.
“네가 이런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죽어 버리고 살아나지를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나. 언구(言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커다란 병이다. 이런 말을 듣지도 못했느냐? ‘절벽에 매달려 손을 놓아,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대를 속일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런 도리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이윽고 원오는 대혜를 택목당(擇木堂)에 머물게 하고는 시자(侍者)의 일을 조금도 맡기지 않았다. 대혜는 매일 사대부들과 함께(택목이란 곧 조정의 사대부들이 머물며 쉬는 곳이다.) 원오의 조실방에 들어갔다. 원오는 매번 ‘말 있음과 말 없음은 마치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서 대혜에게 물었는데, 대혜가 입을 열자마자 원오는 곧장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반년 정도가 지난 뒤 드디어 대혜가 원오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스님께서 오조(五祖) 노스님 문하에 계실 때에 오조 스님에게 이것을 질문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오조 스님께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원오는 미소만 지을 뿐, 답을 하지 않았다. 대혜가 말했다.
“스님께서 그 당시 대중들 앞에서 질문을 하셨을 터인데, 지금 말씀하신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원오가 마지못하여 말했다.
“내가 ‘말 있음과 말 없음은 마치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오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해도 말이 되지 않고, 그림을 그려도 그림이 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물었다. ‘나무가 쓰러지고 등나무 덩굴이 말라 버릴 때에는 어떻습니까?’ 오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함께 간다.’”
대혜는 당장 모든 의문이 풀려서 말했다.
“제가 알겠습니다.”
드디어 원오가 몇 개의 인연을 들어 대혜를 시험해 보니, 대혜가 막힘 없이 답변하였다. 이에 원오가 말했다.
“내가 너를 속일 수가 없음을 이제 알겠구나.”
一日聞悟陞堂, 擧: “僧問雲門: ‘如何是諸佛出身處?’ 門曰: ‘東山水上行.’ 若是天寧卽不然. 忽有人問: ‘如何是諸佛出身處?’ 只向他道: ‘熏風自南來, 殿閣生微涼.’” 師於言下忽然前後際斷. 雖然, 動相不生, 卻坐在淨裸裸處. 悟謂曰: “也不易你得到這田地, 可惜死了不能得活. 不疑言句是爲大病. 不見道: ‘懸崖撒手, 自肯承當, 絶後再蘇, 欺君不得.’ 須信有這箇道理.” 遂令居擇木堂, 爲不釐務侍者. 日同士大夫入室(擇木乃朝士止息處). 悟每擧: ‘有句無句如藤倚樹.’ 問之. 師纔開口, 悟便曰: “不是, 不是.” 經半載, 遂問悟曰: “聞和尙當時在五祖曾問這話, 不知五祖道甚麽?” 悟笑而不答. 師曰: “和尙當時須對衆問, 如今說亦何妨?” 悟不得已謂曰: “我問: ‘有句無句如藤倚樹, 意旨如何?’ 祖曰: ‘描也描不成, 畫也畫不就.’ 又問: ‘樹倒藤枯時如何?’ 祖曰: ‘相隨來也.’” 師當下釋然曰: “我會也.” 悟遂擧數因緣詰之, 師酬對無滯. 悟曰: “始知吾不汝欺.”
(4). 대혜의 공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깨어 있을 때에는 마음대로 주인공 노릇을 하는데, 잠이 들거나 꿈 속에서는 주인공 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수능엄경』에서는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늘 동일하다’고 하는 말을 보고는 자신의 공부에 의심이 생겼다.
② 원오에게 물어 보니 “네가 말하는 허다한 망상이 끊어질 때에, 너는 스스로 깨어 있을 때와 잘 때가 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답만 하여서 더욱 답답할 뿐이었다.
③ 원오(圜悟)가 설법을 하면서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에 따뜻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문득 앞뒤의 시간이 끊어졌다.
④ 이렇게 문득 가슴에 걸려 있던 주인공 노릇한다는 망상이 없어지고나니, 비로소 꿈꿀 때가 바로 깨어 있는 때이며 깨어 있는 때가 바로 꿈꾸는 때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다만 범속(凡俗)한 정식(情識)을 없애면 될 뿐 따로 성스런 지해(知解)는 없다’는 체험을 한 것이다. 즉, 생각으로부터 풀려나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깨끗하고 텅 빈 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이처럼 생각에서 풀려나 깨끗하고 텅 빈 곳에 머물러 보니, 비로소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본래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 저절로 분명해진 것이다. 마치 해가 떠올라 밝을 때나 해가 져서 어두울 때나 허공은 변함 없는 것과 같아서, 생각에서 풀려나면 본래 만법이 한결같다. 이것이 바로 대혜가 말하는 오매일여(寤寐一如)이다.
⑤ 그러나 이때 대혜는 생각에서 벗어난 깨끗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 뿐, 생각을 하면서도 언제나 둘이 없는 하나의 입장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원오는 대혜에게 ‘언구(言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커다란 병이다.’고 하면서, 매번 ‘말 있음과 말 없음은 마치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가지고 대혜에게 질문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말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말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생각에서 풀려나 있는 둘 아닌 하나를 확인시키려고 한 것이다. 원오는 『원오심요』에서 이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 즉 하나가 된다고 말하였다. 대혜는 아직 생각과 생각 없음, 말과 말 없음이라는 두 경계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⑥ 약 반년 뒤, 대혜는 원오가 전해준 오조의 말인,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은 ‘말을 해도 말이 되지 않고, 그림을 그려도 그림이 되지 않는다.’이고, 나무가 쓰러지고 등나무 덩굴이 말라 버릴 때에는 ‘함께 간다.’는 말을 듣고서, 모든 의문이 사라져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원오가 던진 어떤 말에도 속지를 않았다.
이러한 대혜종고의 오매일여와 퇴옹성철의 [선문정로], 조계종 수행지침서인 [간화선] 등에서 말하는 오매일여가 어떻게 다른지 한 번 살펴 보십시오. 바른 공부를 원하신다면, 대혜종고의 말을 잘 살펴 보시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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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수연(隨緣)님의 댓글
에잇... 아쉬운 데로 이거라도 보세요. 어서 퍼왔습니다 ㅡㅡ;
산호초님의 댓글
퍼오느라 수고 하였습니다 ,여하튼 그건 모 선원장의 글이고 ...
윤선생의 글이 아직 안올라와서 많이 궁금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