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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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훔치는 부처님(중간 부분에 수정할 부분이 있어 청색글자로 수정함)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023

20-05-11 19:41

본문

신발 훔치는 부처님

 

우리는 청정한 법, 또는 청정한 마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윤리적으로 세속적으로 어떤 죄도 짓지 않고 어떤 나쁜 마음도 없고 착하고 선하며 순결한 법과 마음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또한 청정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이 법은

악(惡)이나 죄(罪)나 불순(不純)한 것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도 없다.

그래서 일체의 모양과 이념과 사상과 윤리적인 모양이 없기에 청정하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신 후에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양변에서, 선, 옳음, 좋음이라는, 인간사회에서 추구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우주는 연기중도(緣起中道)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연기중도를 잘 이야기해주는 것이 중국 고사(古事)에 나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이야기다.

새옹지마는 회남자(淮南子)의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옛날에 중국 북쪽 변방에 사는 노인이 있었는데, 새옹(塞翁)이라는 말은 변방 새(塞) 노인 옹(翁)으로 ‘변방에 사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그 내용이 이렇다.

 

무릇 화와 복은 서로 번갈아 일어나서 그 변화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국경 근처에 사는 사람으로 술법을 잘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 말(馬)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랑캐 땅(胡 : 호)으로 도망쳐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위로하니 그 집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일이 어찌 복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소?”

하였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나자, 그 말이 오랑캐(胡)땅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고, 사람들은 찾아와 축하하였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말했다.

“이일이 어찌 화가 되지 않으리라 하겠소?”

 

그로부터 집에 좋은 말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여 말을 타다가 떨어져 넓적다리뼈가 부러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또 찾아와 위로하였다.

그 아버지가 말하였다.

“이일이 어찌 복이 되지 않겠소?”

 

일 년이 지나자 오랑캐가 대거 국경을 넘어 쳐들어와서 젊은 장정들은 활을 들고 전쟁에 나갔는데, 국경 근처의 사람들이 열에 아홉은 죽었다.

하지만 그 아들은 홀로 절름발이가 된 까닭에 아버지와 아들은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하니, 이 변화는 끝이 없고 그 깊이는 측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夫禍福之轉而相生 其變難見也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吊之 其父曰 此何遽不為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能為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髀 人皆吊之 其父曰 此何遽不為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故福之為禍 禍之為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세상 이치가 이러하다.

이러한 이치의 삶은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가면서 작든 크든 겪는다.

처음엔 나쁜 일이 좋은 일을 초대하고, 좋은 일이 오히려 나쁜 일을 초대하여 좋아하고 싫어했던 지난날을 후회한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이러한 이치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람이 식당을 하는데, 가끔 남의 신발, 그것도 헌 신발을 신고 와서 깨끗하고 좋은 새 신발을 신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 주인 된 입장에서 물어줄 수밖에 없을 때, 돈도 아깝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미우면서도 안타깝고, 또 그런 일이 벌어지는 세상의 삶도 속상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내가 그랬다.

“신발 훔치는 부처님이네, 오히려 그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할걸요?”

 

그 사람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르고 불난 데 부채질하는가 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내가 신발을 훔쳐 가는 사람의 마음이나, 사람들이 절에 가서 부처님께 복을 비는 마음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 모두 자신의 처지가 지금에 비해 더 나은 것을 구하는 마음으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다만 신발을 훔쳐 가는 사람은 그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내 말이 이해는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신발 훔쳐 가는 사람이 아직 마음에서 썩 지워지지 않는 고민을 나중에 학원을 하는 도반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 도반도 똑같이 애들이 미운 아이를 골려 먹으려고 신발을 감추는 일이 가끔 있어서 골치 아프다고 이야기하면서, 둘은 ‘세상은 똑같네?’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거기에 내가 신발 훔쳐 가는 부처라고 했다는 말까지 함께 나누며 세상과 법을 더 넓게 이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와의 대화에서 세상의 이치를 더 배울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신발을 훔쳐 갔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미워하는 마음의 고민을 떨치고는, 오히려 그 사람이 자신에게 지혜를 가르쳐주려고 온 보현보살(普賢菩薩)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만났을 때에 내가 늘 일체가 한 법이다. 내가 부처다. 라고 되뇌라고 하였듯이 이 세상에 법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다고 했듯이 내가 ‘신발 훔쳐 가는 부처다.’라고 한 말이 참 신선하다고 하였다.

 

물론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잘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더 나은 것을 바라는 마음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나, 절에 가서 복을 비는 마음이나, 눈앞의 이익을 취해 신발을 훔치는 마음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음을 이런 일을 통해서 배우라는 말이다.

 

그리고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방법이 잘못된 것이니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고, 또 세간법(世間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사회적 규칙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규칙을 어길 때는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해야 한다.

 

다만 그들이 남의 신발을 훔치는 마음이 다만 그 방법과 표현이 잘못되고 규칙을 어긴 것이어서 사회적인 지탄을 받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더 나은 상태 즉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으려는 마음과 같이, 둘 다 자신에게 없는 더 나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이다. 

다만 깨달음은 현학적이고 정신적인 발전을 구하고, 신발을 훔치는 것은 물질적으로 겉으로 더 나아보이는 쪽으로 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 다름은 그들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본래 성품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인연의 삶의 환경이 달라, 한 사람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의 환경을 만난 인연으로 깨달음을 구하고 다른 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며 도덕적이지 못한 삶의 환경을 만난 인연으로 신발을 훔쳤을 뿐, 지금의 자신의 환경에서 더 나은 것을 구하는 마음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 말하지만 일체가 한 법이어서 어떤 것도 이 법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고 어떤 환경도 조성될 수 없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매 순간 이모습 이대로가 완전한 법의 모양이요 부처인데, 그것을 알거나 믿지 못하고 늘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는 생각이 짓는 더 나은 모양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말이다.

 

그래서 만약 정신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자신이 그대로 부처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만약 더 나은 어떤 것을 구하여 얻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오히려 신발을 훔치라고 선동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보다 이 법을 먼저 깨달은 어떤 동생이 오래전 어느 모임에서 말하기를

"형이상학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나 형이하학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나 집착하는 것은 똑같아."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학문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학문에 집착하는 것이나, 성도착자가 성에 집착하는 것이나 이 법에서 보면 그냥 집착일 뿐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그 당시 그 말이 깨닫지 못한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이 말은 사실이다. 

이 세상은 오직 불이법의 법계여서 오직 이 한 법의 인연의 삶만 있을 뿐, 그 삶의 모양에는 어떤 모양도 가치의 차별이 없다. 그래서 따로 집착할 것이 없다.

즉 일체가 한 법이고 모두가 다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의 가치로 볼 때에 좋고 나쁨이 있을 뿐, 법으로 볼 때에는 학문에 집착하는 것이나 성에 집착하는 것이나 그저 집착일 뿐 하등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발을 훔쳐 작지만 더 나은 형편을 만들고 싶은 마음과 깨달음을 구하여 더 나은 자신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차이나 차별이 없음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을 세간의 차별된 감정으로 생각하지 말고 법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리의 마음은 아주 간단하다. 

다만 삶의 인연에 길들여진 생각이 복잡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몸짓을 할 뿐이다.

그래서 더 나은 것을 구하려는 마음은 아주 누구에게나 있는 간단한 마음이다.

그래서 그 생각이 표현이 물질을 중시하느냐, 관념을 중시하느냐, 도덕을 중시하느냐 등등으로 나뉘어 행동으로 나올 뿐, 그 마음은 무엇을 구하든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앙굴리말라는 본래 이름이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힘사카’로 아주 잘생기고 바르고 착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유학을 하러 갔는데, 잘 생긴 아힘사카를 보고 흑심을 품고는 그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스승의 부인이 스승에게 오히려 아힘사카가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고자질을 하여, 그것을 믿은 스승은 아힘사카에게 100명(혹은 1,000명이라는 말도 있음)의 사람을 죽이면 반열반에 들 수 있다고 속였다.

아힘사카는 깨닫고 싶은 마음 간절한 마음과 하늘 같은 스승이 말을 하니,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는 남을 해치는 ‘힘사카(남을 해치는 사람)’가 되었다.

그리고는 99명의 사람을 해쳐 그 손가락을 목에 걸면서 사람들에게 ‘앙굴리말라(손가락을 목에 건 사람이라는 뜻)’라는 악귀가 되어 무수한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부처님을 만나 바른 법을 배우고는 과거의 악행을 버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쳐 다시 예전의 착하고 바른 학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국 수많은 사람의 돌을 맞아 죽었지만 죽는 순간에 반열반(般涅槃)에 들었다.

 

이 또한 더 나은 것을 구하려는 마음이 지은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더 나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많은 사람이 깨달음을 구하려 하겠는가?

 

신발을 훔쳐 간 사람 역시 도덕적인 소양이 없어서 그렇지 더 나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은 아힘사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도 깨닫기 전 수행자가 되신 것도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밤에 성의 담을 넘었겠는가?

 

이처럼 드러난 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그 마음의 근본을 보면 부처님의 마음이나 도둑의 마음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일체가 한 법이요 내가 부처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알 때 좋고 나쁨이 사라지고, 좋고 나쁨이 사라지면 탐진치(貪瞋癡)도 함께 사라지니, 도둑과 부처가 함께 가면서 도둑이라는 이름과 부처라는 이름을 벗어던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법이요,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깨달을 때 본래 아무 일도 없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마음이 늘 고요하여 적멸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총지품(總持品)에서

“일체가 공적(空寂)한 법, 이 법은 적멸(寂滅)하지만 공(空)하지 않다.”

고 하신 말의 뜻이다.

 

이 말에서 ‘적멸(寂滅)하다.’는 뜻은 드러난 모양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이요, ‘공(空)하지 않다.’는 뜻은 일체만법은 모두 인연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연의 모양을 보고 그러하니 좋고 나쁨이 적멸(寂滅)한 것이요,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모두 이 한 법의 인연으로, 우리 역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또한 공(空)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일체만법이 이 한 법의 인연으로 흘러가는 세상, 그래서 모든 것은 이 한 법의 인연의 모양일 뿐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선과 악, 귀천이 없는 이 한 법의 세상, 이것을 일러 부처님께서

“일체가 공적(空寂)한 법, 이 법은 적멸(寂滅)하지만 공(空)하지 않다.”

고 하신 것이다.

 

이 뜻을 분명하게 알았다면 힘사카가 어떻게 앙굴리말라가 되었으며, 또 그 사람이 신발을 훔치겠으며, 또 그 식당의 주인이 신발 훔친 사람 때문에 속이 상하겠는가?

 

신발을 훔치는 그 사람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좋은 부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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