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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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부족한 우리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43

20-05-09 18:34

본문

늘 부족한 우리들.

  

삶은 완전한 것을 구하는 곳이 아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누구든 남들에 비해 모자란 구석이 있고, 아무리 완벽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며 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터전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곳이 삶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또 완전하고 거룩한 척해도 자신이 참을 수 없는 것이 건드릴 때는 자신도 모르게 반응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이 삶의 세상이다.

그것이 부끄러움이든 참지 못하는 화든, 절대로 자신에게는 감출 수 없는 것이 삶이다.

 

그러한 곳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삶이요 터전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아무리 고치더라도 끝내 완전한 모습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 얼마나 부족함이 넘치는 곳인가?

우리는 절대로 이 부족함을 메울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삶이란 부족함을 넘어서는 것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곳이다.

부족함을 극복하려는 그 마음으로는, 즉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분별하고 취하고 버리는 시비(是非)의 마음으로는 결코 부족함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 바로 삶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존재요 이 한 법의 터전임을 가르쳐주는 곳이 삶이다.

 

즉, 그 부족함을 통해서 부족 속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완전하다는, 그 완전함을 알게 해주는 곳이 이 세상이요 삶이다.

그리고는 부족하고 못났음을 서로 공유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서로 나누고 이야기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지만 삶이란,

자신은 부족에 진실하지 않으면서, 들은 이야기나, 또는 자신이 얻고 싶은 경지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의 완전함을 경외하고 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마취되어 어느새 마치 자신이 그렇게 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다가,

누가 그 부족한 부분을 건드릴 때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화를 애써 감추고 완전한 척하며 살아가는 그런 완전한 세상이 아니다.

 

부족하며 부족한 대로, 완전하면 완전한 대로 자신과 서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로를 보듬으며 나누는 곳이다.

 

우리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존재로, 0.000....1초 앞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한계적인 존재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세상,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일에는 실수하고, 잘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리고 이러함을 비켜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당연한 세상이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서로 솔직해질 때, 그 솔직함 속에서 자신과 상대를 품어 안고 부족이니 완전이니 하는 우열을 다 녹여버린다.

 

실제의 세상은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곳이다. 그래서 부족하면 부족하고,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새로운 일에는 늘 부족하다. 왜? 우리는 이 우주의 티끌과 같은 수많은 인연의 일과 변화를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부족함을 나누며 살아가는 곳이지, 알지 못하는 것을 탓하고 쥐어짜며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한 곳이 바로 우리의 삶의 터전이다.

 

어제 말한 것처럼 일어나는 일이 우리와 인연이 될 때는 우리가 할 수 있지만, 우리와 인연이 되지 않으면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뒤집을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인연 없는 일은 하지 못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못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삶에서 인연이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은 하는데 나는 못할 수 있다. 그것 역시 인연이다. 그래서 남이 못할 때는 오히려 내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족함, 아니 이런 당연함의 용매(溶媒)가 우리의 삶에 들어갈 때, 비로소 삶의 용광로는 제대로 가동이 되고 열을 내고 모든 잘함과 부족을 녹여버린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잘하라고 교육받아온, 고점수를 받아도 잘했다는 칭찬 뒤에 ‘더 잘해라.’는 말, 백점을 받아와도 ‘앞으로 계속 잘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존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에 길들여져 밖을 향해서는 자신(특히 가치관이나 판단기준)이 옳다고 생각하고 믿고 내세우면서도, 안으로는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부족한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꽁꽁 묶어두고는 그런 자신을 못 믿어하며 찢어지게 쥐어뜯는다.

 

그러면서 열을 내지 않는 용광로를 한탄한다. 자신은 용광로에 아무런 용매도 넣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우스운 것은, 사람들이 들은 것은 많아 '뭔가' 잘해야 용광로가 불타서 녹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뭔가'라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미리 알아야 한다는 예언자 같은 능력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은 없다.

설사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간혹 있었지만 그러한 자도, 매 순간의 모든 삶을 마치 거울을 비추듯이 그렇게 아는 자는 없었다.

 

우리 잘못의 대부분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일을 예측하지 못한 것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존재로, 그런 능력이 없는데,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대비하고 완전해야 자신의 삶에 평화가 온다고 믿으니, 이는 평화는커녕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생각인가?

 

생각해보라.

평화가 솔직하지 않은 곳에 온다고 생각하는가?

 

그대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가장 부끄럽고 보기 싫은, 또 계속되고 싶지 않은 그것을 만나라.

그것을 만나서 자기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화해를 할 때 비로소 평화가 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원수는 자기 안에 있다. 

이 자기 안에 있는 이 원수를 사랑할 때 바깥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지,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로 바깥의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의 원수는 바로 부족하고 못난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부족하고 못남을 스스로 인정하고 드러내고, 서로가 공유하면 보듬는 것이다.

 

그것만이 살길이요, 삶은 그것을 원한다.

바로 자기가 살고 있고, 자기가 살아 숨 쉬는, 온전한 자신의 삶이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제 올린 글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잘못하고 부족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것과의 인연이 없는 것일 뿐임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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