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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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自性)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886

20-04-12 13:30

본문

자성(自性)

 

자성, 또는 자성이라 불리는 우리의 성품은 이 세상을 내고 움직이면서도 그것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떨어져 있다는 표현이 필요 없는 한 몸이다.

그래서 자성은 어디에 따로 존재하여 우리가 애를 써서 찾아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여기고 그것을 찾으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잠 못 이루고 자성을 찾아 그곳을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경전과 선지식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자성은 늘 쓰는 이 마음을 떠나 바깥으로 찾으려 한다면 절대로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이 성품과는 멀어져 찾을 수 없을뿐더러 자성이 무엇인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이는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고, 물속에서 물을 찾고 있는 것과 같이 이미 그것과 하나이면서도 따로 있다는 생각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체만법이 이 한 법의 성품이 아닌 것이 없어 ‘따로’라는 장소 자체가 없는데, 생각이 ‘따로’라는 장소를 가정하고는 그것 찾으려 다니니 자성은커녕 그 장소라도 찾겠는가?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머리를 찾는 것과 같아 나를 떠나 바깥에서 나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것과 같아 절대로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깨달음은 이 자성을 찾은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찾음은 생각이 그토록 바라는 ‘따로’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자신이 그대로 자성으로 단 한 번도 자성을 떠난 적이 없음을 알아 찾은 자성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자성과 하나다.’라는 말의 ‘하나다.’라는 말도 군더더기요 생각이 끼어들 틈을 만드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둘과 셋과 넷을 생각하게 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성과 하나가 아니라 이 모습 이대로 자성 그 자체다.

자성은 순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한 자성 그 자체여서 하나라는 말도 군더더기로 끼어 들 틈이 없다.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불이법(不二法)이다.

둘이 아닌 법, 사실 이 말도 궁여지책인데, 사람들이 하도 이것저것 나누고 비교하는 버릇이 있다 보니 그런 것은 없다는 뜻으로 불이(不二)라고 하는 것이다.

불이에는 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그 하나는 애초부터 나뉜 적이 없는 하나를 말하는 것이지, 나눠진 것이 대충 끼워 맞춰 하나가 된 것이 아니다.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우리가 한 법이다.’ ‘자성과 하나다.’라고 하면, 선지식이 말하니 긍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그 하나는 자신에게 자성과 하나가 되는 요인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 내게는 자성 이외에 자성과 상관없는 군더더기도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을 듣고도 끊임없이 자성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것은 모두 생각이 지어낸 헛것이다.

그러니 생각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믿어라.

그 믿음이 강할 때 어느 순간에 생각이 거꾸러질 것이다.

절대로 생각이 이해해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말라.

생각이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자성 자체임을 믿어라.

 

그럼 자성은 무엇인가?

 

이 우주는 체(體)와 상(相)과 용(用)으로 이루어져 있다.

 

체(體)란 우주의 근본으로 이 우주가 있건 없건 존재하는 것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성품을 말한다. 보통 자성이라 할 때 이것을 의미하는데,

이 체(體)는 세상의 관점, 우리도 그것에 포함되니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세상이 끊임없이 인연으로 변해가고 우리도 변해가니, 세상이 그런 것은 이 한 법의 연기 법칙과 작용에 의한 것이므로, 체를 연기법(緣起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리고 체의 이름이야 우리의 관점에 따라 자성(自性), 불성(佛性), 진여(眞如), 법(法), 도(道), 진리(眞理), 이것, 성품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을 연기로 만들어내는 근본이라는 뜻인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추가한다고 해서 체(體)에 손상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용(用)은 자성이 정확한 법칙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만법의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인연이 되는 것이 정확한 인연의 무게로 변해가도록 하는 작용을 말한다. 즉 움직이고 쓰이고 수명이 다하여 분해되어 사라지고 분해된 것들이 모여 새로 생겨나게 하는, 즉 연기 법칙에 의해 변화할 수 있게 해주는 작용과 그것이 정확하고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 과학적인 용어로는 에너지로 보면 큰 문제가 없다.

 

상(相)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눈에 보이는 물질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관념적 형상들을 종합한 것을 말하는데,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관념적 형상들도 엄밀히 말하면 모양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은 감각기관과 뇌가 합성하여 만들어낸 홀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의 자료가 되는 세상만법의 정보가 우리에게 전달되려면 빛이나 소리, 그 외 감각기관과 소통하는 물리적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물리적이라는 것이 바로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모든 생각과 관념 역시 상(相)이다.

이렇게 알아야 이 법을 분명하게 공부할 수 있다.

 

우리가 자성, 또는 자성이라 할 때, 크게 말하면 이 세 가지 모두를 말하고 하고, 보통 자성, 또는 불성(佛性)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근본 원리인 체(體)를 말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절대로 떨어져 있지 않은 하나다.

그것을 우리에게 비춰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라는 존재, 즉 나를 움직이는 그것은 우리의 눈이나 감각기관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체(體)요,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용(用)이요, 그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매 순간의 모양은 상(相)인데, 이 세 가지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이 법도 체상용이 하나이지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법을 이렇게 세 가지의 의미로 나누는 것도 인간과 만물의 특성 때문이다.

내가 늘 말하듯이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한다.’

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나와 무엇을 하는 작용과 무엇이라는 모양이 이 말속에 들어 있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상용(體相用)이라는 식으로 세 가지로 나뉜 것일 뿐 법은 단 한 번도 나뉜 적이 없는 그냥 하나다.

그래서 또한 불이법이라 한다.

 

어쨌든 상(相)과 용(用)은 우리의 눈이나 의식에 잡히지만 이 체(體)는 우리의 눈과 의식 등 외부와 소통하는 기구로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달마조사(達磨祖師)는 양무제(梁武帝)가 자신 앞에 있는 조사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비록 드러난 모습은 달마 자신이지만, 그것이 있게 하고 움직이고, 또 자신이 인연되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은 다만 그 작용만 볼 수 있을 뿐 어떤 방법으로도 보여줄 수 없고,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므로

“나도 모르오(不識).”

라고 하였고,

 

약산유엄은 석두선사가 뭣하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고,

그 대답에 석두선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을 때

“천명의 성인(千聖人)이 와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어쨌든 체상용(體相用)을 설명하는데 사람마다 책마다 종파마다 조금씩 해석을 달리하고 또 그것을 말하는 시점에 따라 그 환경에 따라 조금씩 해석을 달리하지만,

제대로 깨달은 사람과 종파는 체와 상과 용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으니 그 해석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자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자신이 자성 그 자체임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굳이 따져서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것은 그런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일이지, 우리같이 삶에서 자유를 구하는 사람이 그런 것에까지 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성(自性)이라 이름을 붙인 이 연기성(緣起性)으로 생겨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홀로 존재할 수가 없고, 늘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혜능조사는 신회에게 말한 것처럼 ‘양변을 본다.’ 하는 양변(兩邊)이다.

그 양변이 서로 인연이 되어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드러나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생각도 반드시 인연이 있어야만 일어날 수가 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엇이든지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우리의 육체 역시 육근(六根 :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있어서 단 한 순간도 외부와 단절되어 홀로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의 각각의 기관과 세포 들은 말초신경으로 외부와 닿아 관계, 즉 인연을 이루고,

그것에서 얻어진 정보를 신경세포와 인연이 되어 그것을 통해 뇌로 보내지고,

뇌에서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와 이미 있는 유전자나 생각 등과의 인연을 맺어 서로 비교하고 분석하여, 다시 기존의 저장창고에 분류하고 저장한다.

그리고는 이것을 다시 다른 정보와 인연이 될 때 그것을 분석, 파악, 분류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처럼 외부에서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그에 관련된 기존의 정보로 분석하고 궁리하는 것이 바로 생각이고, 생각은 인연이 없으면 절대로 생겨날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뿐만 아니라,

어머니 품에서 씨앗과 같은 우리가 어머니의 탯줄로 들어오는 영양분과 인연이 되어 기존의 유전자 정보를 깨워 점점 사람답게 만들고,

그렇게 세상에 나온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외부로부터 음식과 공기와 물을 공급받는 인연을 지어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외부와의 인연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는데, 하지만 이런 인연을 짓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절로 되어 간다.

 

그래서 혹여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외부와의 모든 것들이 단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속의 세포와 그 세포의 모음인 신체 기관과 뇌, 그리고 장부(腸腑) 등이 이미 들어와 있는 정보와 교류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몸은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고 뇌세포는 우리도 모르게 무수한 생각을 만들어낸다.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움직이는 중에도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금방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신호를 주고, 그 신호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또 그대로 반응하며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선원(禪院)을 열지 않았거나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았으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모든 도반님도 내가 지은 인연에 인연이 되어 들어와 보고 있으니, 내가 없으면 여러분과의 인연이 없고, 여러분이 없으면 역시 내가 여러분들과 인연을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생각에 다시 이 글에서 느끼는 것을 더하여 뇌 속에 또 하나의 정보로 저장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생각과 조금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인연에 의해 변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선지식이 한결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 인연이되지 않으면 생길 수도 유지될 수도 없고, 또 사라질 수도 없다.

 

그 법칙이 바로 연기성이고, 이 우주가 있게 한 원인이다.

그리고 그것의 작용으로 세상이라는 모양, 상이 나왔으므로 이 체와 용과 상은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존재하게 하는 근본 성품인 체와 우리를 움직이는 용과 그 움직임으로 매 순간 드러나는 상이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을 때도 그러하고

또 우리가 죽어서 소멸할 때도 그 육체가 썩고 분해되는 것 역시 그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단 한 순간도 체(體) 상(相) 용(用)이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고, 또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좁게 말하면 그 원인, 즉 체(體)인 연기성이 바로 자성이고,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 이 세상이 존재하게 하는 근본 성품을 말한다.)

 

좀 더 넓게 말하면 연기성에 의해 움직임이 생기니 우주의 모든 것들을 생기고 움직이게 하는 작용인 용(用)까지 합하여 자성이라고 하고,

 

또 더 넓게 말하면,

그 법칙과 작용에 의해 드러난 만법이 한순간도 체와 용을 떠난 적이 없으니, 드러난 만법, 즉 상(相)까지 합쳐 체상용(體相用)을 묶어 자성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결국, 체와 용과 상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육신이 바로 법신이다.”

라는 말을 하니, 문제는 무엇을 자성이라고 하느냐 하는 학문적인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이해하고 자성의 속성(?)을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았는데,

 

이 연기성(緣起性) 즉 체(體)는 이 우주의 모든 만물을 서로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사라지게 하는 법칙이요, 원인이요, 근본이긴 하지만, 그것은 오직 한 법, 즉 하나뿐이어서 서로 연기할 짝이 없다.

그래서 이 한 법(法) 즉 체(體)인 연기성(緣起性) 자체는 연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홀로 밝다.”

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홀로 밝은 이것은 모양도 없고 한계도 없어 우주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펼치면 천지를 감싸고도 남는다.”

고 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그 자체로서는 오직 한 법으로 인연이 없어 어떤 것에 의지하여 모양을 드러낼 수 없어서 우리가 알아챌 수 있는 어떤 모양도 없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모두 비춰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의 모양은 드러난 것들의 성질과 무게에 맞게 드러나게 할 뿐, 어떤 것도 이 한 법의 뜻으로 독단적인 모양을 만들어 세우거나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처럼 이 성품은 엄격하고 평등하여 시비와 분별이 없으니 그 성품에 좋음도 없고 나쁨도 없고,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늙음도 젊음도, 모든 상대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리고 용(用)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들어가 움직여준다.

착한 일을 해도 용이 있어야 할 것이고,

악한 일을 해도 용이 있어야 할 것이며,

더러운 것에도 용이 있어야 할 것이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에도 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어떤 분별도 없이 어떤 것에도 작용해 주는 것이 바로 용(用)이어서, 이 또한 좋음도 없고 나쁨도 없고,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늙음도 젊음도, 모든 상대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리고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드러난 만법, 즉 상(相)도 마찬가지다.

드러난 만법이 성질과 모양이 어떻든 서로 인연이 되고 조건만 맞으면 어떤 모양이든지 만들어진다.

그 좋은 예로, 우리가 먹고 배설하는 것이 동식물의 먹이가 되고, 그 먹이로 인하여 다시 동식물이 자라고 다시 우리의 먹이가 되는 순환을 이룬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 역시 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의해 기존의 정보로 어떤 생각이든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인연이 되는 생각을 일으키므로 때론 무서운 생각도 들고, 즐거운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래서 드러난 모양도 사실 분별이 없어 이 또한 좋음도 없고 나쁨도 없고,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늙음도 젊음도, 모든 상대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부처님께서 동서남북을 일곱 발자국씩 걸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라고 하신 것도,

이처럼 드러난 만법 역시 오직 그것만의 인연으로 드러나는 그것만의 모양과 성질이 있을 뿐 어떤 것도 상대되거나 또는 똑같은 것이 없어 비교할 수 없는 오직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분별하는 한 생각이 이 세상을 정밀하게 살필 수 있는 기능이 결여되어 실상을 보지 못하고, 또 개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없어, 자신의 경험 한계 내에서 만들어낸 잣대를 세워서 세상 만법을 그것에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분별과 시비가 생긴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의 개체성 때문에 양쪽에 다 있을 수 없으니,

동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서쪽이 있게 되고 서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쪽이 있게 되며,

착하다는 개념을 세우니 악한 것이 있게 되며,

좋다는 생각이 있으니 나쁨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때그때 이 한 법의 연기성에 따라 일어나는 인연의 모양일 뿐, 어떤 것과 상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을 모양 짓고 좋고 나쁜, 이익과 손해 등으로 보는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나누고는 그것이 마치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성이 무엇인지, 체 상 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이 한 법의 속성인 분별없음을 깨닫고, 일체의 시비분별을 여의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 법만 깨달은 것을 일러 이사무애법(理事無碍法)을 깨달았다 하고, 이 한 법의 분별없음을 분명하게 알아 세상 만법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저마다의 인연으로 생겨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독립된 소중한 것임을 알아 일체의 시비를 거두는 것을 일러 사사무애법(事事無碍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 자성(自性),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그 무엇이 하고, 우리는 그 무엇 그 자체이므로,

그렇게 일체의 시비분별 없이 살아간다면 따로 자성을 찾고 부처를 이루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체상용을 여의지 않은 부처요, 자성을 지닌 존재이다.

 

물론 깨달음이라는 통과의식이 체득되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은 사실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고 역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 역시 우리가 자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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