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모름과 이심전심(以心傳心)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459
관련링크
본문
우리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내가 보는 것만 본다.
남이 보는 것은 절대로 볼 수가 없다.
남 역시 자기가 보는 것만 본다.
내가 보는 것을 절대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겪은 것은 남이 절대로 알 수가 없고
남이 겪은 것 역시 내가 절대로 알 수가 없어서
우리는 절대로 서로를 알 수가 없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지식으로만 알 뿐,
남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우주가 따로 있고
다른 이의 우주가 따로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국토안에 수많은 불국토가 있듯이...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다.
각자 각자 그리고 사물 사물이 모두 우주의 중심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의 우주 안에서만 아는 자이지 한 치라도 그것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다.
내가 바라보고 안다고 하는 대상들은 바깥의 우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우주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바라보는, 또 우리가 만나는 대상은 분명 바깥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느끼고 감정이나 생각으로 정리하는 것은 온통 내 기억에 저장된 정보로 판단하고 느낀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만나는 대상은 모두 내 생각이 그린 홀로그램을 만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바깥은 보는 시력이 좋다고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실물을 내 안의 홀로그램으로 본다.
내게 대상인 그 역시 나를 그의 우주 안에서 홀로그램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이것을 이해하기란 좀 어려울 수가 있겠지만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고 삶의 전반을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그는 그에겐 그가 아니며
그 안에 있는 나 역시 나에겐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그를 내 생각으로 보고 그려놓은 그의 그림이며
그가 본 나 역시 그의 생각으로 그려놓은 나의 그림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가 이 우주를 인식하는 것은 모두 저 나름대로 보는 것일 뿐,
서로가 소통하여 나눌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이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 특성상 육체를 가진 한계와 육체를 벗어날 수 없는 생각의 한계로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모든 생각이 우리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숙명적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것이 지혜라는 착각과 알려는 모든 노력을 그만 두고
그 ‘모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에 참된 지혜가 우리에게 생긴다.
우리의 생각은 사물을 기억하는 능력으로 마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되면 그 상황과 비슷한 과거의 경험과 지식으로 유추하여 나름대로 답을 만든다. 그리고는 자신이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이야기의 연속이지만, 내가 살아온 삶의 테두리에서 오직 나의 감각으로 얻은 것인 나만의 세계에 있는 답일 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서 유추한 답이, 매 순간 변하며 한 번도 같은 일이 벌어진 적이 없는 우주의 최첨단의 시점에도 맞길 바라는 것 자체가 참으로 생각의 어리석음이다.
다만, 우리는 비슷한 환경 속에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이 느끼며, 나아가 서로 나눌 수 있는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 언어로 대상에 대한 개념들을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해놨기 때문에, 마치 남이 느끼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또 믿을 뿐,
실제로는 각자가 느끼는 모든 것은 결국 자신만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어는 모두 관념적인 것뿐이다. 사과라는 말 속에 사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라는 말을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도 사과를 떠올리는 감정과 느낌과 그림이 모두 다르다. 또 실제로 사과를 보고 만지고 함께 먹어도, 그 느낌은 절대로 혼자만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어에 속아서 이런 사실을 서로 모른다.
사과는 달고 새콤하다,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달다.’와 ‘새콤하다.’의 느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 수가 있고, 그 느낌은 아무리 노력해도 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벗어난 소통은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다툼이 생긴다.
서로가 다 안다고 생각하니 상대에게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떼를 쓰고 화를 내고 섭섭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서로를 알 수가 없다.
이 사실만 알아도 우리는 나란 존재의 바깥에게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어떤 불만이나 섭섭함도 가질 수가 없다.
서로가 너무 달라서 이별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관념(觀念)...
관념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견해나 생각으로,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이다.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언어라는 통로 외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앞에서 말했듯이, 언어란 생각에서 비롯되고, 생각은 오직 자기의 경험을 축적해놓은 기억에서 도출되기 때문에, 같은 단어라도 깊이 파고들면 사람마다 모두가 다른 뜻으로 저장이 되어 있다.
그래서 직접 만나는 순간에도 서로가 서로의 말과 행동을 보는 시각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우리가 서로 통한다고 여기고 쓰고 있는 언어는 단어도 있지만, 눈빛도 있고, 스킨십을 통한 촉감도 있고, 분위기를 바라보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역시 자신만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뿐,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아무리 노력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보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그리고 종교적인 신에 대한 느낌조차도 예외일 수가 없다.
우리가 믿고 이해하고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태어날 때엔 텅 비었던 우리의 머릿속에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쌓아왔던 경험적 지식이 믿고 이해할 뿐,
정말로 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이가 이야기해주는 신의 형상을 도출해낼 뿐인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설사 신이 와서 내게 직접 말해준다 하더라도,
그 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결코 내 경험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신에게 의지하는 것 역시
내가 그려놓은 구원의 그림에 의지할 뿐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이며
부처도 내가 만들고, 중생도 역시 내가 만드는 것이다.
물론 생활적인 삶의 방법이나, 어떤 일을 하기 위한 기술적인 방법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 순간 그것을 할 때마다 새롭게 배워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사용하는 방법조차도 아무도 같은 사람이 없다.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알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상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삶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앎이란 모름과 서로 상대하고 있기에 앎이 생기면 모름이 드러난다.
그래서 앎이 탑이 높아질수록 모름의 어둠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알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모름에 대한 두려움만 늘어갈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르는 존재로 철저히 혼자다.
그리고 우리가 본래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고, 알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살아온 우리로선 모른다는 사실에 너무나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서로가 소통된다고 믿는 세상에서 ‘모름’은 소외되는 것이고, 사회성을 지닌 인간으로선 소외는 너무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정말로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노력을 해도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한계를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외로움에서 벗어난다.
실제로 삶이란 이해하여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에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란, 생각이 자신의 앎으로 분석하여 동조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쓰는 단어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해관계가 크지 않을 때는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그것을 이해라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될 때는 그런 공간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이해만으로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만 사람들이 서로 양보해야 타협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부분 갈등을 겪어도 결국 소통이 되지만, 남이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그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면 절대로 타협이 되지 않는다.
서로의 우주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곧이곧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해라는 것 역시 상대의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사 양보해서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끝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의 앙금은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는 다른 이해의 현장에서 폭발을 한다.
그것이 이해의 한계이다.
깨달은 자들은 이해를 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의 세세한 감정이나 느낌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 소통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모름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남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다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는 철저하게 자신의 우주에 갇혀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노력을 통하더라도 자신의 우주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고 이 우주 삼라만상은 서로가 알아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주 삼라만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안다고 생기고 모른다고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고 모름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인연이 되기만 하면 일이 생기고, 인연이 끝나면 일이 떠나간다.
숭산스님이 ‘오직 모를 뿐’이란 말을 그냥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모름을 온전히 받아들일 우리는,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며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며
남의 이해에 기대어 위태롭게 서 있는 자가 아닌
홀로 우뚝 선
‘의지할 바가 없는 사람’이 될 것이며,
자신의 앎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른다는 것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일체가 한 법인 세상에는 알고 모름이란 것이 없음을 알고,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인연이 본래 그렇다는 것을 알고,
- 다음글 경허선사의 파전
- 이전글 나쁜 나무엔 나쁜 열매가...
댓글목록
청정심님의 댓글
선생님 이글을 생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약간 허무한 생각이 들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다만 있는 그대로 삶의 흐름대로 산다면
에고에 갇혀 사는 삶보다는 훨씬 더 큰 자유가 있겠죠.
왜냐면 우리에 본질은 사랑이니까요.. 고통까지도 자비인걸요...^^* 긴법문 잘 읽었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우리가 알고 모름을 떠난 법 그자체임을 알면 오히려 애써 알려고 하거나 자신을 알리려는 헛힘을 훨씬 덜 쓰겠지요. ^^
반야지7 님의 댓글
이심전심으로 누립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네~ 이심전심으로 내일 뵈요~^^ㅋ
無事人님의 댓글
편히들 쉬십시오..!!
_()_
윤기붕님의 댓글
하루 잘 지내십시오.^^
지도무난 님의 댓글
"깨달은 자들은 이해를 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인다"
법문 잘들었습니다 ^^
윤기붕님의 댓글
오랜만이십니다.
지도무난님의 댓글
네...까페는 지주들어옵니다 ^^
나루토님의 댓글
선생님 관념(?)이 너무 심해 가슴이 꽉 막힌것 마냥 늘 답답하고 누가 숨이라도 조이고 있는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구하지 않을뿐 ... 이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요 ()
이런 사람은 수행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요?
구하지 않을뿐 이라는건 ..
윤기붕님의 댓글
나루토님.
선가(禪家)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들어가도 30방, 나와도 30방이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해도 안되고 안해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님께서 제게 물은 것이 구하지 않을 뿐이란 자세를 물었는데, 님은 이미 무언가를 자꾸 하려는 관념속에 살고 있는데, 그것을 하지 말고 구하지 않을 뿐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로 구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구하지 않으려고 하겠습니까?
구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그냥 구하지 않는 것이지 구하지 않으려는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하려 해도 30방, 구하지 않으려해도 30방'인 것입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즉 관념이 너무 심해서 답답하면 관념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관념적이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면, 관념적인 것을 없애려 합니다.
그것 역시 관념입니다.
관념이란 원문에서도 말했지만, 현실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관념을 없애는 것이 현실적이겠습니까?
관념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적이겠습니까?
관념을 없애는 것은 이미 해버린 관념을 없애려는 것이니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하나의 관념을 짓는 것이지요. 그래서 관념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관념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윤기붕님의 댓글
이미 해버린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니 그것을 탓한다고 과거를 돌이킬 수도 없으니 사라질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인식기능은 대상이 있어야 인식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관념을 일으키기 전에는 인식할 수가 없어서, 일어나지 않은 관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일으키지 않으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참 문제입니다.
제가 문제라고 하는 강조하는 것은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어떤 생각이 올라오든 시비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님께서는 이미 관념의 습이 들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일어난 관념에 대해 어떤 신경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신경을 쓰면 동그라미에서 나가는 짓이고 30방을 두들겨 맞습니다.
님께서 답답하신 것은 관념때문에 답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싫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물론 관념으로는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어렵지만, 더 어렵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에 시비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미 습이 되어 있는 것이니 일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시비하지 않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니 건드리지 마십시오.
건드리지 않는 방법은 그냥 일어남을 인정하고 흘려보내십시오.
그리고 또 자신도 모르게 시비했으면 그것 또한 흘려보내십시오.
윤기붕님의 댓글
그렇게 계속 흘려보내다보면, 흘려보내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흘려보내는 마음이 바로 시비하지 않는 마음이니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생각에서 시비가 줄어들고, 시비가 줄어드니 늘 현재에 살게 되어 관념은 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것을 다시 시비하는 것은 마치 빨간색을 파란색으로 닦는 것과 같아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청정심님의 댓글
맞습니다..핵심은 그것을 어떻게 하려 하지 마시고.. 그냥 생각이 일어났구나! 라고 알면 됩니다.
아는 놈이 틈을 만듭니다.. 이게 자각이죠.. 그러니 한생각 일어났구나! 에서 멈추시면 이상하게 문제 자체가 없어집니다.
또한 그 답답함이 진리이니 반갑게 맞이해 보세염.
(답답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망가지 말고..경험과하나되는..).^^
나루토님의 댓글
아 이렇게 답을 빨리 달아 주실줄 몰랐어요
두고두고 헷갈릴때마다 읽어보겠습니다 ()
감사드려요...
윤기붕님의 댓글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래요~^^
idlesky 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윤기붕 님의 댓글
잘 지내지?
idlesky 님의 댓글
윤기붕 네 별일 없어요~~^^
박제님의 댓글
편안하시지요, 선생님!
日日新又日新입니다.
고맙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박제님의 댓글
윤기붕 사람을 만나는 게 고통었습니다
이제는 살레인답니다
윤기붕 님의 댓글
박제 좋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