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삶을 도박판에 던지지 마라.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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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상가 파스칼(Pascal)은
“도박을 하는 것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건다.”
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많은 사람들은
“인생은 도박이다.”
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볼 때에는 정말로 인생은 도박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확실한 삶을 버리고 생각이 바라거나 옳다고 믿지만, 있지도 않는 불확실한 삶을 찾아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평생을 그렇게 산다.
더 끔찍한 것은 그렇게 떠나는 그곳에 확실한 것이 있다는 무모한 믿음과 그 생각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에 그렇게 떠다니지만,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조차도 깨달음이란 상(相)을 만들어 지금 이 자리를 떠나 생각이 만든 모양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즉, 파스칼이 말한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거는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그래왔으면서도 아직도 떠다닌다.
아직도 떠다닌다는 것은 수십 년을 떠다녔어도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보통의 일로 그렇게 노력해도 도달하지 못했으면 진즉에 그만뒀을 텐데, 깨달음이나 욕심에 대한 일은 그만두지 못하고 아직도 떠다니고 있으니, 그러한 노력이나 방법에 대한 그 무모한 믿음이 어디까지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제는 그 생각을 의심하고 또 지칠 때도 되었건만 말이다.
일체가 한 법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티끌하나도 이 법이 있기에 일어난다.
이 한 법이 없으면 티끌하다도 생길 수가 없다.
우리 역시 머리 털끝부터 발바닥, 몸의 형상을 이루는 바깥 피부부터 몸을 움직이는 기관과 핏줄 세포, 그리고 생각을 만들어내는 뇌세포, 신경전달물질, 그리고 감정을 만들어내는 감정호르몬까지 이 법이 없으면 생길 수가 없다.
우리의 생각은 바깥 피부(감각기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몸을 움직이는 기관과 핏줄 세포, 그리고 뇌세포 신경전달물질, 감정호르몬등의 종합체로 그 정보를 분석하여 생겨난다.
생각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나’라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가 한 법이고 불이법이어서 일체가 다 이 한 법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 역시 인연에 의해 생기고 변하고 사라진다. 그래서 생각은 매 순간 변하는 허깨비다.
그런데도 ‘일체가 한 법이다.’ 라고 하면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놈이 생각이어서, 생각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을 한다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이 사실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 역시 오랜 습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의지하는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늘 생각의 검증을 받아야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생각이 주인이 되고, 세상 만물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생각을 만들어낸 창조주가 바로 이 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무도 이 사실을 제대로 검증해주지 못하고 그런 사람이 있다해도 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이 옆에 있다해도 생각은 자신의 검증에 어긋나면 인정하지 못한다.
생각의 덫에 걸린 자의 모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오온과 십이연기 등을 통해서 수 없이 설명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 오온과 십이연기임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리고 부처님께서 그것을 설명한 것은 인간이 그러한 복잡한 생각의 구조와 욕심과 집착으로 인한 착각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또 그런 구조여서 허깨비이므로 생각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시기 위해 자세하게 단계를 나누어 설명하셨는데,
생각은 그것을 듣고 헤아리면서 스스로는
‘아~! 생각은 허깨비구나!’
하며 그렇게 알면서 그것을 알고 느끼는 생각 자신은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는 부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법을 깨닫는 것으로 착각하여 역시 생각으로 이해하고 지식으로만 생각하고 정작 생각에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부처님 이래로 깨달은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수많은 경론(經論)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으로 헤아려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래서 황벽스님은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소털처럼 많지만, 깨달은 자는 소뿔만큼도 없다고 하였다. 한 마리의 소에 뿔은 두 개밖에 되지 않지만 털은 얼마나 많은가? 참으로 기가 막히고 슬픈 비유다.
하지만 이런 슬픈 일은 사람들의 노력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세상에서 기가 막히는 일들 중에 사람 사이에 서로 미워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뜻을 몰라 서로를 생각하고 위한다는 것이 방법의 차이로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아닌데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맹복적인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고는
“야! 넌 왜 내 맘을 그리 몰라 주냐?”
라고 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스토커가 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이 짓는 것이다.
이 공부도 똑 같다. 사람들이 열심히 깨달음을 향해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왜 내 맘을 몰라주냐는 식으로 자신은 아주 열심히 잘 하고 있고, 많은 결과를 얻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것을 마구 자랑한다. 깨닫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자신의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친다는 말이다.
애인은 그가 하는 것이 싫은데 그 사람이 실망할까 차마 말을 못하고 있는 줄을 모르는 것처럼 깨달음과는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는 방법인데도 말이다.
지금에 경전에 있는 문자와 들은 이야기를 생각으로 조합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자들이 다 이런 슬픈 노력을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또 목적지가 잘못된 것이다. 깨달음이 어디에 있는지, 법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서 경전의 문자를 생각으로 헤아려서 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러고 있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그 자리가 바로 목적지인 줄 모르고 말이다. 아니 발을 움직이는 자체가 바로 법이요 목적지다.
그래서 소승(小乘)에서 대승(大乘)으로 또 대승에서 최상승 선(最上乘禪)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참선이 나왔고 좌선이 나왔고 선문답이 나왔는데, 사람들은 이것조차도 생각으로 하고 있다.
참선과 화두는 생각을 쉬라는 뜻으로 만든 것이다. 생각을 쉰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대해
“동방(東方)에서도 다만 마음만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방(西方)이라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죄과(愆)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 있으므로 한 그 마음만 깨끗이 하면 깨달음도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확실한 것으로 불확실한 것에 거는 도박심리를 버리는 것이다.
즉, 시비분별을 그치는 것이다.
확실한 것을 쥐고도 불확실을 꿈꾸는 것은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시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서방도 동방도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이 바로 정토요 깨달음의 세계요 법의 바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도 믿지도 않고 생각이 시키는 대로 지금 여기를 버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곳을 찾아 떠나니 그 시비의 마음이 어찌 조용한 날이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생각에 속지 말라고 그렇게 복잡하고 미세하게 생각에 대해서 말씀하건만, 그것조차도 생각 속에 집어넣어버리고는 그것을 안다는 생각을 쥐고 그 생각이 지은 또 다른 정토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생각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란 놈은 자신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즉, 여우가 호랑이 힘을 빌려 으스대듯이 생각이란 놈이 자신이 법에 의해 생기고 변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인줄 착각하거나 생각에 세뇌되거나 생각이 준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어도 사실은 아무런 상관없다. 지금이라도 생각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주인 자리에 두고 모든 것을 시비하고 분별하던 것을 멈추고 법에 맡기기만 하면 말이다.
법에 맡기는 것이 바로
마조스님깨서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고 하고, ‘즉심이 부처다(卽心是佛)’라고 하신 ‘우리가 평상시의 마음(卽心)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도요 부처라는 말이다.
즉심이란 것이 별 것 아니다.
인연에 즉하여 내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만나며 내는 마음이 바로 즉심(卽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 것이 평상심(平常心)이다. 세상을 만난다고 하니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세상을 만나는 것이고,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픈 것도 세상을 만나는 것이고, 길을 가며 자동차도 보고 사람도 보는 것이 세상을 만나는 것이고, 멋진 차를 보고 감탄하는 것도 세상을 만나 즉심을 내는 것이고, 멋진 사람을 보고 감탄하는 것도 역시 세상을 만나 즉심을 내는 일이고, 등산을 하고, 또 올라가다가 힘이 들어 땀 흘리고 헉헉거리는 것도 산더미 같이 쌓인 설거지를 보고 끙~ 하는 것도 세상을 만나 즉심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다 평상시의 일이요, 평상시의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털끝만한 틈도 없이 세상을 만나고, 그에 대해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반응한다. 그것이 바로 평상시의 마음이요, 이 평상(平常)의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법이다. 그러니 이처럼 확실한 법과 부처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마조스님은 이 ‘평상시의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 하고, 이 평상심을 즉심이라 하여 ‘즉심이 부처(卽心是佛)’라고 하신 것이다.
즉심은 인연에 즉하여 내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니 우리가 평상시에 세상을 대하면서 그때그때 내는 그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요 즉심이다.
따로 도와 부처는 없다. 이 즉심과 평상심이 도요 부처라는 말이 일체가 한 법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불이법이란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생각은 그러지 못한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나은 것을 얻으려 하고, 그래서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을 버리고 다른 것을 찾으러 떠난다. 늘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고는 한쪽을 선택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조차도 생각이 바람직하지 못하면 그 생각을 없애려 하며 자신을 쥐어뜯는다.
(그런데 실제론 생각만 떠난다.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현실을 떠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래서 오히려 생각이 더 괴롭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의 종이니 이 생각이 그럴 때마다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생각이 시키는 대로 괴롭다. 참으로 기가 차는 일이다.)
이런 모습이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현재의 삶, 평상시의 삶, 평상심, 즉심)을 거는 도박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인생을 생각이 아무리 애를 쓰고 용을 쓴다 해도 자신의 입맛대로 되지 않는다. 인연이 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의 열매가 열려 언젠가는 바라는 것이 될 수는 있다. 그것마저 탓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삶밖에 없는데 이것을 버리고 있지도 않는 삶을 바라는 불가능한 일을 두고 마치 그것을 진짜라고 생각하고 이 삶을 가짜라고 생각하는, 확실한 지금을 버리고 있지도 않은 불확실한 것에 투자하라는 사기꾼 같은 생각을 두고 도박꾼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가 걸리지 않는 평상시의 일엔 어떤 일을 하든 수많은 생각을 하여도 시비하거나 분별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요, 이 평상심은 매 순간 인연과 즉하여 내는 마음이다. 그래서 즉심이다.
그리고 그렇게 평상시 매 순간 만나는 세상의 일에 대해선 우리는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설사 나누더라도 그냥 그뿐이다. 그것을 가지고 두고두고 고심하거나, 지금을 탓하고 있지도 않은 미래나 다른 상황을 탐내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일체가 법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의 현재가 단 한 순간도 법을 떠난 적이 없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이런 도박을 멈춰야 한다. 특히 깨달음은 도박을 멈추고 지금처럼 더하고 뺄 것 없는 확실한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단 한번만이라도 현재를 받아들여보라.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밑천이 얼마나 진실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 것이다. 그러면 그 밑천을 이유도 결과도 알 수 없는 도박판에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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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반야지7님의 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꾸벅.^^^
윤기붕님의 댓글
날씨가 흐려 기온은 낮은 데 후텁지근 하네요.
건강 조심하시고 내일 보입시더~^^
Gary님의 댓글
Gary 16.06.29. 13:26
선생님 후텁지근한 날씨에 시원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예전에 법륜스님의 말씀중에 이세상을 칼라로 볼수있는 눈을 가진것이 기적이라고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이 기적같은 현실을 외면한체 있지도 않은 망상의 홀로그램에 속아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긴것 같습니다.
즉심ㅅ ㅣ불이란 의미를 선생님의 법문을 듣고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동대구 역에서 KTX를 기다리며 글을 올닙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윤기붕 님의 댓글
그것을 느껴가는 님의 글을 읽으니 제 마음도 참 행복하네요.^^
어디를 가시나 보네요.
여행길 조심하시고 잘 다녀 오세요^^
Gary 님의 댓글
윤기붕 저는 인천에 사는 노명환이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대구에 출장왔다가 올라가는 중입니다.
나중이 기회가 되면 서울 법회에 참석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Gary 일체가 인연이어서 삶이 인연 아님이 없지만,
그래도 맘이 통하는 인연은 참으로 멋지지요.^^
저도 님과의 오프라인의 인연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오후시간 잘 지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