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무기에 빠짐 2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347

15-12-16 15:17

본문

 

 

이 우주(宇宙)의 법칙(法則)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서 일체(一切)가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

그래서 무엇이든 ‘이것이다’ 하면, 하는 순간 ‘이것’이라는 상(相)에 잡히고 빠져버린다.

법(法)이니, 진리(眞理)니, 도(道)니, 자성(自性)이니, 불성(佛性)이니, 여래(如來)니 진여(眞如)니,부처(佛)니 하는 모든 이름과 돈오(頓悟)니, 정혜(定慧)니, 선정(禪定)이니, 해탈(解脫)이니 열반(涅槃)이니 하는 모든 말도, 다 이름일 뿐, 그런 것을 말하는 일정한 것이 없다. 그래서 무유정법(無有定法), 즉, ‘정해진 일정한 법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가 잠시도 머물지 않으니 무주(無住)라고 하고,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다.’할 모양이 없으니 무상(無相)이라 하고, 머물지 않아 잡을 모양이 없는데 시비를 한다는 것은 모두 허깨비 장난이니 무념(無念)이라 한다. 무주와 무상은 말 그대로이지만, 무념은 ‘생각이 없다’는 뜻인데, 이는 불교에서는 망상심(妄想心 : 시비분별)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결국 무주, 무상, 무념은 일체가 머물지 않아 잡아서 이것이다 할 모양이 없으니 시비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무주, 무상, 무념을 근본과 몸과 으뜸을 삼는다 했다.

 

어떤 부두에 달팽이가 있어 부두의 끝에 기어가고 있는데 마침 들어오는 배의 고물에 부딪혀 죽어버렸다.

어떤 이가 그것을 두고 물었다.

“이러한 때에 달팽이가 잘못인가? 아니면 부두가 잘못인가? 배의 고물이 잘못인가? 아니면 사공이 잘못인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누구의 잘못인가?

 

법당의 목불(木佛)을 쪼개어 방에 군불을 떼어 유명한 단하(丹霞)스님은 어느 날 운력(運力)을 하는데, 풀을 베다가 풀 속의 독사를 건드렸다.

그러자 독이 오른 독사는 단하스님을 물려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을 본 순간 단하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낫으로 냉큼 독사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옆에서 그것을 본 다른 스님이 단하스님을 꾸짖었다.

“웬 중이 그리 거치냐?”

살생을 금하는 스님이 살생을 했으니 계율을 어긴 거친 행동이라는 꾸지람이었다. 그말을 들은 단하스님은 도리어 그 스님을 보며 꾸짖었다.

“내가 거치냐? 네가 거치냐?”

 

누가 거친 것인가?

 

여기의 답은 간단하다. 시비를 건 놈이 잘못이다.

달팽이 사건이나, 단하스님의 일이나 인연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옳다 그르다 하는 견해를 내었으니 그 놈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도리를 모르면 상당히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 단하스님의 일에는....

하지만, 단하스님은 살의를 가지고 행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일 뿐, 거기에 옳다 그르다는 생각이 없었다.

 

무념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를 보고,

‘그럼 내 맘대로 하면 되겠네?’

하는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욕심과 집착으로 내 맘대로 하면 그것은 무념이 아니다. 이미 욕심과 집착이라는 것이 이미 좋고 나쁨이라는 분별에서 나온 것이어서 시작부터 이미 사견(邪見)이 들어간 행동이기 때문이다.그런 생각을 가진 자가 다른 일에도 시비분별이 없다고 할 수가 없고, 그의 삶은 늘 시비분별로 번뇌가 잠잘 날이 없기 때문이다.

 

‘무기(無記)에 빠짐 1’에서 무기란 수행(修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법과 관계되는 이름에 걸린 것도 역시 무기에 빠진 것이다.

즉, 앞에서 달팽이 문제나 단하스님의 일에 법상(法相)을 내는 것이 무기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랬더라도, 그것을 ‘음, 내가 그랬군.’하고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다.

 

그래서 법상에 걸린 무기란.

무주라는 것을 배웠는데도 우리는 어쩌다가 머무는 마음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내어버린 마음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잡아서 다시 분별하며 탓하는 것을 말한다.

 

또, 온갖 생각들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잡아서 분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탓하는 것도 또한 무기에 빠진 것이다.

공(空)에 집착하여서 또 하나의 공아님에 대한 분별을 내는 것도 또한 무기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다.

설사, 지금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떠 올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비록 과거의 기억이라고 하더라도,지금의 순간에 올린 생각이므로, 과거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집착한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자신을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있다고 탓하고, 마치, 공부가 덜 된 것이라고 자신을 탓한다. 그러면 무기에 빠진 것이다.

 

또, 어떤 순간에 분별의 마음을 내었다. 그러나 분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그 한 생각에 치우친 나머지, 분별의 마음을 낸 자신을 두고, 또 분별했다고 탓한다.

이것 또한 무기에 빠진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라도.....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든, 분별의 생각을 떠올리든, 올라오는 생각을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마음을 닦는 것(사실은 생각을 길들이는 것인데)은 마치 벼룩 길들이기와 같다.

벼룩은 그 뛰는 높이가 자신의 몸의 수십 배 수백 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차츰 차츰 뛰는 높이를 제한하여서 부딪치게 하면, 점점 높이 뛰는 버릇이 사라지면서, 종래에는 뛰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벼룩이다.

즉, 마음을 닦고 또 닦아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에는 마음인 것이다. 즉 생각인 것이다.

즉, 길들인 벼룩이라고 하더라도 벼룩의 속성은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돌발 상황이 되고 자신의 생명과 관계되는 상황이 되면, 즉, 생각의 틈이 개입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본성이 튀어나와서 벼룩은 원래의 높이로 뛰어버리는 것이다.

 

그처럼 아무리 생각을 자신의 마음에 들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생각의 분별하는 속성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아무리 화를 내는 마음을 다스려서 웬만한 것에서는 화를 참을 수 있다고 하지만,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화가 분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분별하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젠가는 돌출상황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막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아무리 다스려도 분별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종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분별하는 생각은 없앨 생각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그 생각을 자신이 그것을 마음대로 못한다고 탓을 한다.

진정한 마음 닦음은 시비하고 분별하는 생각을 없애야 한다.

 

분별하는 생각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별하는 생각을 탓하고 없애려한다고 해서 없어질까?

분별하는 대상은 엄밀히 말하면 분별한 생각이다. 과거시제(過去時制) 즉, 이미 지나간 생각이다.

그것을 없애려 한다고 없어지겠는가? 이미 지나가 사라져 버리고 없는, 생각 속에만 생각인데?

오히려 그것을 탓하고 없애려하는 그것이 바로 분별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탓하고 길들여서 어느 정도는 분별을 덜 하겠지만, 분별하는 그 뿌리는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데도 분별하지 말아야한다는 그 한 생각으로 분별하는 생각이 일어났다고(이미 지나간 생각)그것을 탓하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분별하지 말아야한다는 무기에 빠진 것이다.

즉, 분별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에 집착하여서 분별 아님에 집착하여서 또 다른 분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에 집착하여서 공에 빠지는 것이나, 분별 아님에 집착하여서 분별 아님에 빠지는 것이나 다른 것이 없다.

이러한 것을 무기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기라는 것이 이러하다고 해서 또 무기라는 이름에 매이지 말라.

이름이 어떻든 그것의 상황은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그 모양은 달라도 하는 짓은 똑 같기 때문에....

 

생각의 하는 짓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은 원래 없는 것이고 인연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이 생각이다. 그래서 일체의 만법이 그러하듯이 생각도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생각을 아무라 한다고 하더라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꼭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생각의 출신이 그러기 때문에 늘 자신이 있다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이 자신을 건드려 주기를 원한다. 그것을 인정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것으로 자신이 마치 존재한다는 위안을 받으려한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든 시비를 하고 늘 보다 나아 보이는 것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생각은 분별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렇게 분별해서 만든 바람직한 곳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래서 생각은 또 집착을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상을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나간 자신의 생각에까지 시비하여 분별하는 생각과 분별하지 않는 생각을 나누고는, 분별하지 않음에 집착하여 시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에 대해서도 공과 공아님을 분별하고는 공에 집착하여 공에 빠져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분별의 생각을 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분별치 말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고 해도, 그것 역시 머물지 않는 바의 살아있는 지금의 찰라 간에 일어난 현재의 생각인 것이니, 과거의 것을 떠올리는 것은 머무는 생각이라고 하면서 머무르지 않는 생각이란 상에 매여서 비교하고 판단하지 말라.

그 분별의 생각과 과거의 기억 역시 그냥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생각일 뿐이다. 그것을 잡으려 하지 말라.(분별하여 집착하지 말라)

 

분별에 분별을 더하더라도, 자신이 분별하고 있음을 아는 순간에 그 분별을 내버려두고 멈추면 된다.

 

무념(無念)은 시비분별이 없는 생각이다.

분별이 없는 생각은 일체를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분별하더라도, 마지막에 분별하고 있는 자신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고 문제 삼지 않으면 분별이 없는 것이요 무념이다.

그것이 무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댓글목록

청정심님의 댓글


잘 읽었습니다.. 분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데 참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분별심을 없애려하면 그것 역시 분별심입니다.
그냥 분별했으면 인식하는 순간 그냥 내버려두고 신경을 끊으면 됩니다.
처음엔 생각이 상당히 곤혹스러워합니다.
마치 해결할 것을 두고 덮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몇번 해보면 그 곤혹스러움이 바로 생각이 우리를 묶으려는 꼼수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해결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도 알게 되구요.
하지만 어렵다고만 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청정심님의 댓글


네...단지 일어났을 뿐이고...거기서 끝인데 내용에 빠지면 마음이 그만 힘들다고 합니다..그것이 꼼수군요..
~ 이젠 고정관념에 직면해도 중도로 ...어려운 것이 몇 개 있는데 생각이 범인임을 알았으니 어렵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