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주인은 갈 곳이 없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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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갈 곳이 없다.
“수보리(須菩提)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如來)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알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여래(如來)라는 것은 오는 곳도 없고 또한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부르는 것이니라.”
-금강경(金剛經) 위의적정분 제이십구(威儀寂靜分 第二十九)-
세존(世尊)께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비구에게 물으시기를,
“ ‘일체 중생이 보리와 아라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모두 객진번뇌(客塵煩惱)로 인하여 그르치는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너희들은 그때에 무엇을 깨달아서 지금 성인의 과업을 이루었느냐?”
그때 교진여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아뢰기를,
“제가 지금 장로(長老)로서 대중 가운데에서 유독 저만이 '알았다'는 이름을 얻은 것은 객진(客塵)이란 두 글자를 깨닫고 부처님의 과업을 이룩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길 가는 사람이 여정에 들어 잠을 자거나 밥을 먹다가 밥 먹고 잠자는 일을 마치고는 행장을 꾸려서 머물 여가가 없이 길을 떠나지만, 만약 참다운 주인이라면 갈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머물지 않는 것은 나그네이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니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나그네’라고 이름 하겠습니다.”
-수능엄경(首楞儼經)에서-
두 글 중에 위의 글인 ‘금강경’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그래서 들은 바가 많아서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아래 글인 수능엄경(首楞儼經)에서 말하는,
‘참다운 주인은 갈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는 말은 듣기에 따라서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물론 내 생각이겠지만) 이 글을 쓴다.
이 글에 오해할 여지가 있는 것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는 것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기 때문인데,
만약 삶의 한 단면을 가리켜 ‘이것이다’ 하면 그 순간 이미 흘러가버리고 없어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으니 ‘색(色)이 곧 공(空)이다’ 하고,
그렇다고 없느냐 하면 너무나 이렇게 생생하게 드러나 모습을 나투고 있으니 ‘공(空)이 곧 색(色)이다,’ 라고 하여,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는 것이니, 그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는 근거가 바로 머물지 않고 늘 흐르는 삶, 즉 연기법(緣起法)에 있다.
그래서 금강경 장엄정토분 제 십(莊嚴淨土分 第十)에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而生其心)”
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眞理)인 이 한 법(法)은 모양이 없고, 법의 드러난 모양인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이 한 법의 연기작용(緣起作用)에 의해 늘 머물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또한 모양이 없다.
이처럼 우리가 진정한 진리를 깨닫고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면, 우리의 마음도 머물지 말고 연기 작용에 의해 변해 흐르는 제법(諸法)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능엄경(首楞儼經)에서 교진여(憍陳如)가
“만약 참다운 주인이라면 갈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머물지 않는 것은 나그네이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니,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나그네’라고 이름 하겠습니다.”
라고 하여 주인은 머무는 것이라고 하니,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첫머리에 인용한 금강경(金剛經)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에 있는 글,
“수보리야! 여래란 온 적도 없고, 간 적도 없으므로 이름을 여래라 하느니라.”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수능엄경(首楞儼經)에서 교진여(憍陳如)가 주인은 왜 갈 곳이 없는 것과 같고 머물지 않는 것이 나그네라고 하였는지 알 수가 있다.
부대사(傅大士)는 이런 선시(禪詩)를 지은 적이 있다.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야야포불면 夜夜包佛眠)
아침이면 부처와 함께 일어나네 (조조환공기 朝朝環共起)
만약 부처가 간 곳을 알려고 한다면 (약지불거처 若知佛去處)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에 머물러라 (어묵동정지 語黙動靜止)”
이 선시에서 부처가 간 곳을 알려고 한다면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 하라고 한다.
‘어묵동정(語黙動靜 :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만, ‘그칠 지(止)’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수능엄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이 ‘그칠 지(止)’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있다.
위의 해석이 바른 해석이지만,
그냥 위의 해석과 같이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는 세간 사람들이 생각하듯 고정된 모양의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을 그치라는 말이 아니고, 매순간에 어묵동정에 머무르라는 말이다. 즉, 마조스님이 말한 즉심(卽心)을 내라는 말과 같다.
어묵동정에 머무르라고 하면 또 한 번 어(語)하고, 한번 묵(黙)하면, 그 한 번의 어와 묵에 머무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이미 벗어난 말이다.
말이라는 것이 사실 우리의 생각을 몇 프로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다만 대부분 함께 쓰는 용어이기 때문에 앞뒤의 말의 흐름을 조합하여 늘 쓰는대로 해석하면 대부분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모두 말로 옮길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생활용어는 대부분 그냥 말하면 알아듣는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용어는 반드시 말하는 사람의 본 뜻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알아듣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도 사실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요인이 있어 많이 오해를 한다.
하지만 정확한 뜻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즉 말할 땐 말하는 그 순간에 것에 그리고 그 다음에 만약 침묵하면 침묵에, 그러다가 행하면 행함에 머무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여 우리는 한 번 말하거나 한 번 침묵하고 그대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고, 세상 역시 어떤 상황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평생을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돌린다든지, 다른 일이 있다든지, 아니면 말하는 것이 힘들어 쉬기도 한다.
그러면 이미 말하는 것은 과거가 되고 그 다음이 현재가 되는 것이다.
그처럼 매 순간 현재를 살아가라는 뜻이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다.
우리는 ‘이 자리’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자리’는 이 법의 자리다.
법은 늘 변함이 없고 다만 연기법에 의해 삼라만상을 내어 끊임없이 변하게 한다.
이것을 비유하면 마치 내가 줄에 공을 매어서 돌리는 것과 같다.
내가 법이고 공이 삼라만상이라면,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공을 돌리는 작용만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공을 돌리는 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가 비유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내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다.
어쨌든 이 법은 법의 작용인 연기법칙과 작용에 의해 이 세상을 돌리고 있다. 그러면서 저들끼리 인연이 되어 돌아가게 하지만,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은 어떤 개체적인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과 작용으로 세상만물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법칙과 작용은 변함이 없지만 드러난 만법은 이 법칙과 작용에 의해 변해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만법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해가기 때문에, 모양을 지은 것 같으면 이미 변하기 때문에 머무는 만법이라고 할 것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삶도 만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똑같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늘 끊임없이 흐른다.
그래서 금방 말하는가 하면,
말할 거리가 떨어져서 침묵하고,
움직일 일이 있어서 돌아다녔냐 하면,
그 일이 그쳐서 또 가만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의 반복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만약 가만히 있다 하더라도 겉모습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마음속은 늘 상 변화무쌍하고, 또 몸속의 세포와 각 기관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이처럼 우리와 우리의 삶뿐만이 아니라, 이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모습도 그렇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해간다. 그래서 무상(無常)하다고 하고 무주(無住)라고 하는 것이다.
부대사의 시의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는 진정한 부처, 즉 진리를 알려면,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닥치는 인연의 삶을 떠나지 말고 매 순간 그 삶과 함께 하라는 말이다.
삶은 변하며 흐르지만 매 순간 변하며 다가오는 삶에서 도망가지 않고 함께 하니 늘 변하는 그 삶에 머무는 것이다.
수능엄경(首楞儼經)에서 교진여가 말하는
“마치 길 가는 사람이 여정에 들어 잠을 자거나 밥을 먹다가 밥 먹고 잠자는 일을 마치고는 행장을 꾸려서 머물 여가가 없이 길을 떠나지만”
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더 나은 것을 찾아다니며 분주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진여의 말 중에
“만약 참다운 주인이라면 갈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고, 또
“머무는 것은 주인이니”
라고 하는 것은 곧, 매순간 자신에게 다가온 그 삶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대사가 말한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 즉 말할 때는 말함에 머물고, 침묵할 때는 침묵함에 머무는 것을 두고 주인이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나그네’라고 이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말하면서도 말 이후나 말 이전의 것을 생각하고, 침묵하면서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죽 끓듯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매 순간 삶에 천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나그네와 같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이 한 법의 연기법으로 들으면 교진여와 부대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 세상은 이 한 법의 연기작용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 한 법의 연기에 의해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래서 흘러가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매 순간에 머무는 것이지, 만약 찰나라도 지난 것을 잡고 있으면 그는 이 한 법의 인연에서 벗어나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 가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 어디이겠는가?
‘바로 집착하는 곳, 좋다 나쁘다 분별하는 생각 속인 것이다.’
참다운 주인은 이 한 법과 함께 하는 자다.
물론 일체가 모두 법이어서 이 한 법과 함께 하지 않는 만물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번뇌가 생기는 것은 우리의 몸과 삶은 이 한 법과 함께 하지만, 이 한 생각은 늘 자신을 고집하며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늘 현실과 맞지 않아 불편을 느끼고 번뇌를 느끼고 고통에 빠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삶과 이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實相)은 이 한 법의 연기 작용(緣起作用)에 의해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하며 흘러간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늘 보기 좋은 어떤 모양을 지어 그러한 상태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잡아 보기 좋은 모양과 비교하여 시비를 하며 좋고 나쁨을 따지고는
좋으면 그것이 계속 이어지길 원하고,
나쁘면 그것이 어서 없어지길 바란다.
그런데 사실 생각으로 지은 모양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고 오직 욕심 많고 집착이 심한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허망한 망상이다.
하지만 이 진실을 알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지은 이러한 허망한 망상에 속아 늘 떠돌아다니니
매순간 실재(實在)와 함께 하는 그 자리에 있질 못하고
실재하는 현상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더 나은 것, 그 순간에는 자신의 인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바라면서고 늘 ‘이 자리’를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그네의 삶이다.
일체 만법이 이 한 법의 연기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가니, 우리의 삶은 늘 변하여 흐르는 것이 당연한 진리다.
그래서 늘 변하는 삶과 함께 흘러야 늘 진리 속에 머무는 것인데, 생각은 실상을 모르고, 나라는 개체인 존재가 살아오면서 습득한 생각으로 진리라는 모양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잣대로 삼아 자기의 마음에 드는, 있지도 않은 ‘변하지 않는 모양’을 찾아 헤매고 다니니
진리의 삶인 변하는 삶의 편에서 보면, 그 ‘변하지 않는 모양’에 서 있으려는 그 생각이 늘 변하는 진리의 삶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라고 하고 망상(妄想)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참다운 주인은 늘 변하는 삶과 함께 흘러가며 삶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늘 삶과 함께 머물러 여여(如如)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요,
나그네는 변하는 삶을 거부하고 생각이 만든 망상의 가치에 부합되는 삶을 추구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삶을 향해 끊임없이 떠나가고 있으니, 참다운 실재 삶을 늘 떠나고 있는 것이다.
교진여(憍陳如)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교진여는 부처님의 물음에 자신은 ‘객진(客塵)’이라는 두 글자를 깨달았다고 했다.
객진이 무엇인가? ‘떠돌아다니는 먼지’라는 말로 나그네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나그네의 삶이 무엇인가?
단 한 번도 자신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생각이 지은 더 나은 어떤 곳을 향해 떠나가는 삶이 아니던가?
그래서 교진여(憍陳如)가 깨닫고 보니,
우리가 좀 더 나은 삶, 가치 있는 삶, 거룩한 삶, 아름다운 삶, 선한 삶... 등등의 바람직한 삶을 이루려고 노력했던 그 모든 행위들이 참다운 법의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행위가 아니라,
제법(諸法)중의 아주 작은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만든 허망한 모양이요 망상일 뿐이었고, 나아가 매순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늘 그곳에서 도망쳐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을 향해 떠나는 허망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서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應無所住而生其心)”
고 한 말처럼 늘 상 변화하는 그 삶 속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 그것이 진실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요, 또 진리를 따라 사니 늘 진리에 머물러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순간의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삶을 떠나지 않고 인연을 따라 흐르는 삶과 함께 사는 주인의 삶이다.
그래서 주인은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첫머리에 인용한 금강경(金剛經)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에서 부처님께서
“여래(如來)라는 것은 오는 곳도 없고 또한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부르는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참다운 우리의 성품은,
세상의 모든 법을 내고들이지만, 내고 들이는 만법에 매이지도 않고, 또 법의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오는 곳도 가는 바도 없어 나고 죽음도 없는 참다운 주인이니, 늘 여여(如如)한 것이 주인이다.
주인이 이렇게 늘 여여(如如)한데 갈 곳이 따로 어디에 있겠는가?
누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나는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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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반야지님의 댓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감로법문 감사합니다. 꾸벅.^^^
없음님의 댓글
일체가 생방송인데 녹화편집 하는 생각은 딜레마인지 조화인지
엉뚱한 생각이 슬그머니 듭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지금 님께서 올리신 글이 떠오르는 대로 쓰신 것입니까? 아니면 나름 뜻을 전달하시기 위해 다듬습니까?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글이나 행동을 그냥 막 하시지는 않겠지요?.
그 또한 인연의 생방송입니다.
즉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생방송이 다 인연의 생방송입니다.
인연이란 상호 조건이고 필요도 조건 속에 조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는 없을 것은 없는 것이요. 있을 것은 다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죠.
다만 어떻게 드러나든 모두가 그럴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인연의 수많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생방송은 내보내는 쪽이 아니고 드러나는 것을시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생방송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모든 불조사들과 선지식들이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시비와 분별을 그치라고 하는 것이죠.
녹화 편집 역시 드러나 있는 것이니 인연의 생방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