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부처님, 나찰(羅刹)에게 도를 구하다.(법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읽어보세요.)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4,211

16-04-09 12:27

본문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에 도덕교과서에 나왔던 이야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생(過去生)에 설산동자(雪山童子)로 설산(雪山)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에 산길을 가며 수행을 하는데 어디선가 게송이 들려왔다.
     
제행무상 (諸行無常)   일체 만법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시생멸법 (是生滅法)   이것이 나고 죽는 법이다
생멸멸이 (生滅滅已)   나고 죽는 법을 멸하여 버리면
적멸위락 (寂滅爲樂)   곧 적멸의 낙이다.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사구게(四句偈)이다.
     
법에 목마른 동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찾아 들어가는데 노래가 그쳤다. 정신없이 찾아가니 입에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나찰이 무서운 형상으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동자는 도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나찰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앞에 엎드려 물었다.
“방금 그 노래는 당신이 부른 것입니까?”

그러자 나찰이
“그렇다.”
하니 동자는 기뻐하며 
“다시 한 번 들려주실 수 없습니까?”
라고 부탁을 하자 나찰은
“나는 지금 배가 고파서 더 이상 부를 수가 없다”
고 했다. 그러자 동자는 
“제가 지금 음식을 가진 것이 없으니 노래를 들려주시면 제 몸을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나찰은 다시 게송을 노래하였다.
설산동자는 게송을 듣고는 뛰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을 하고는
높은 곳에 올라가 나찰을 향하여 몸을 던졌다. 
그러자 나찰은 제석천의 모습으로 변하여 천녀(天女)들과 함께 설산동자의 몸을 받아 땅에 모셔두고는 절을 하며 말했다.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다음 생에 성불하시면 부디 우리들을 위하여 제도해 주십시오.” 
하며 예배하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부처님께서 설산동자 시절의 설화(說話)이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 과거생이니 미래생이니 하는 것에 끌려다니지 말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본래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과거생이라고 하니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등, 수행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엉뚱한 것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유마경(維摩經) 제자품(弟子品) 첫머리에
     
그 때에 장자 유마힐(維摩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내가 이렇게 병이 들어 누웠는데 부처님께서는 크신 자비로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가?’
라고 하자, 부처님이 그 뜻을 아시고 사리불(舍利弗)에게 이르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나아가 병을 위문하여라.”
라고 하셨다.
     
라는 구절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보고는 
‘유마힐이 혼자 속으로 생각만 했는데 부처님께서 아시다니 참으로 신통력이 대단하다.’
라고 생각하고는 신통력 등에만 관심이 있고 유마경 제자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냥 부처님을 존경하여 높이기 위해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설사 부처님께서 신통력이 있다 한들,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디 최상승(最上乘)의 불이법(不二法)을 깨닫고자 하면서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일찌감치 뜻을 접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티끌만큼만 있어도 보통과 신통이라는 차별(差別)과 단계(段階)에 걸려 일체가 한 법이요, 평등한 이 법을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이 설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설화 속의 부처님을 통해서 법을 배우는 사람의 자세를 이야기 하고 싶어서이다.
     
몇 년 전에 어떤 이가 찾아와서 현재 자신이 모시고 있는 스승이 있는데, 자신의 공부가 나아갈수록 스승이 말과 행동이 다른 점을 발견하고는 스승을 볼 때마다 의심이 일어나서 견디지 못하겠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어 왔다.
     
그때에 내가 이 설화를 들려주면서, 
“법을 배우는 자가  책이 더럽다고 어찌 책 속의 법까지 더럽다고 하느냐?”
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순간에 알아듣고는 그 동안 앓아왔던 가슴앓이가 걷혔다고 기뻐하며 돌아간 적이 있었다.
     
법을 배우는 자가 법만 보아야지 만약에 그것을 둘러싼 것에 눈을 돌리면 그때부터 분별심이 일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덧붙여 예전부터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동영상을 올리면,
제목 따라 조회 수가 다른 것을 늘 느낀다. 때론 심할 정도로 차이가 날 때도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 법을 배우는 자가 그 글에 무슨 내용이 있을지 모르면서 자신의 생각에 갇혀 제목만 보고는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나누고 따지고 있으니 책이 더럽다고 내용까지 의심하는 일과 다를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공부는 법을 깨달아 아상을 없애는 공부인데, 글 하나를 읽는데도 제목이 관심이 없다고 읽는 시간을 아까워하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며 아상을 없앨 수 있겠는가?
이런 자는 내가 볼 때에 오히려 자신이 깨달은 자와 같다. 왜냐하면 제목만 보고 이미 그 속에 법이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있으니 법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자가 아닌가? 
     
진정으로 목이 마른 자는, 입에 축축한 기미만 있어도 입으로 빨아먹는다. 그것이 더러운 물이든, 아니면 똥물이나 피일지라도....
목이 말라 곧 죽을 지경인 사람이 어찌 맑은 물 더러운 물을 가리겠는가?
 
이 법을 깨닫고자 하는 자는 목이 마르지 않으면 절대 깨달을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절대 생사의 강을 건널 수 없다.


선가(禪家)에서도 ‘은산 철벽을 밀 듯이 하라.’고 하고 ‘모기가 무쇠소 등을 쪼듯이 하라.’고 하였다. 
은산철벽이 어찌 민다고 밀리며 모기가 무쉬소를 쫀다고 구멍이 나겠는가? 하지만 죽을만큼 목이 마른 자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심지어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 백척의 높은 막대기에서 허공으로 한 걸음을 더 내 딛으라고 까지 하지 않는가? 
즉, 목숨을 던지라는 말이다. 
     
스스로 목이 마르고 간절하다고 하면서 책의 더러움을 따지고, 스승의 말보다 그의 행을 보고 의심하고, 제목이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하며 분별하니 누가 그를 보고 목이 마른자라고 하겠으며 그와 같은 자들이 어찌 백척간두에서 목숨을 던지겠으며 생사(生死)가 없는 이 자리를 깨닫겠는가?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고 그냥 자신을 던져라. 
생각으로 헤아리는 자는 아상이 성성한 자이고, 
자신을 던지는 자만이 아상이 소멸되고 생사의 강을 건널 것이다.
법을 깨닫고자 하는 이는 부디 이를 명심하고 마음에서 시비와 분별을 없애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반야지7님의 댓글


명심합니다. 꾸벅()()()

윤기붕님의 댓글


벚꽃은 원없이 보셨어요?^^

dlesky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잘 있제?

idlesky 님의 댓글


윤기붕 제가 만성기침이 있는데 올 두달은 약먹어도 내내 그래요.
고등학생때부터 그랬는데 올해 유독 오래가요.
늘 마른기침이 있어왔는데
담배를 끊지 못해요. ^^

헤헤

초당님의 댓글


태산 같은 믿음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윤기붕님의 댓글


그렇습니다.
호시우보(虎視牛步)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걷는다."
라는 말인데, 호랑이는 절대 곁는질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려고 하는 대상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려 정면으로 본다고 하여 법을 대할 때에 이곳저곳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이고, 또 소는 한 번 걷기 시작하면 주인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고, 또 빨리 걷지도 뛰지도 않고 일정한 걸음으로 꾸준히 걷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호시우보는 곁눈질 하지말고 꾸준하게 놓지 않고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태산 같은 믿음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이 바로 호시우보입니다.^^

無事人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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