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율법의 완성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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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 이야기도 제가 18~19년 전에 쓴 글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입니다.
제가 하드를 날려버리는 바람이 과거에 쓴 글들이 대부분 날아가버렸는데,
그 당시엔 제 홈페이지가 없어 공부모임의 홈페이지에 쓴 것으로,
그 홈페이지는 이미 사라졌지만 다행히 몇몇 분들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옮겨 주신 덕분에 가끔 이렇게 발견이 되네요.
내일 법회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 제 글을 남의 홈페이지에서 퍼와 붙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예수님에 대한 글이기 때문에
어떤 이는 불교를 이야하는 곳에서 기독교이야기를 한다고 모양을 짓는 분들이 있는데
께달음은 종교를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는 저들의 방식으로 믿는 것이고,
제가 본 예수는 분명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분의 일을 공부에 도움이 되라고 쓴 글입니다.
율법의 완성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행적과 그 이후의 일들을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한 일이었으나,
그것을 성령의 눈으로 읽으면,
깨달음으로 이르는 하나의 거대한 수행과정이며, 스토리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으로 선악과를 따먹었다.
지혜를 가지려고 하는 그 마음이 벌써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행위는 그냥 비유일 뿐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추함을 분별하는 눈을 얻었지만,
그들은 그 지혜로 하느님의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낙원에서 쫓김을 당하였다.
아니 쫓김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면서부터,
분별의식이 생겨나 늘 세상과 자신과 남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속에서 스스로 낙원을 잃어버렸다.
즉,
원죄를 잉태한 것이다.
원죄는, 분별하는 그 마음인 것이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리고 자신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런데도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유를 얻지 못하고 낙원을 그리워한다.
지혜를 얻었는데 왜 낙원을 그리워하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의 시작이 바로 선악과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잃어버리고,
분별지(分別智)에 시달리는 신세로 전락을 하였다.
그리곤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서 고통의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늘 그리워하였다.
수많은 심판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로까지 생활을 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청한 결과,
모세를 통하여서 십계(율법)를 얻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므로써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이 이 땅에 와서 예수가 올 때까지,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느님의 율법이 엉터리어서인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악과의 결과로 얻은 분별의 지혜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음을
통감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으로(선악과를 따먹은 마음으로) 그것을 지키려고 하니,
분별된 마음에서 어찌 하느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있을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은 언제나 미움과 분열을 낳는다.
선은 악을,
아름다움은 추함을,
깨끗함은 더러움을,
옳은 것은 그른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래서 분별하는 마음을 지닌 인간은
하느님께서 말하신 율법을 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어기지 않는 자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 이전에는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가 아무도 없었다.
하느님의 율법을 인간에게 전해준 모세조차도
모세가 이짚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내고나서,
시나이 산에 올라가 율법을 하느님께 얻어 내려왔을 때에,
모세를 기다림에 지쳐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들을 보고는,
그 분을 참지 못하고,
하느님의 율법이 새겨진 돌판을 그들의 머리위에 던져서,
그들을 땅이 갈라지는 속으로 집어넣는 심판을 함으로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가나안땅이 보이는 요르단강 기슭에서 죽었다.
이는,
율법이 모든 것이라는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심판한 결과인 것이다.
분별하는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버린 결과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사악한 독사 같은 자라고 꾸짖으신다.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인데도,
예수는 그들을 사악한 독사라고 했다.
그 이유가 바로,
인간의 분별된 마음으론 도저히 지킬 수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저들 역시 마음속에 예수를 죽일 만큼의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지키라고 하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 역시 율법에 의지한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무겁고 힘든 짐을 진자들을 자신에게로 오라고 했다.
이것은 삶의 힘듦도 있지만,
거짓 예언자들의(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속아서,
지킬 수도 없는 율법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에게 말을 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신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아니다.
바로 분별의 마음을 지닌 인간의 죽음을 대신 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자들을 보고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를 한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나이다."
라고......
인간의 죽음.....
이것은 예수라는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죽음이다.
즉, 선악과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분별하는 모든 마음의 죽음인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받기 전날,
젯세마니 동산에 올라가 이렇게 기도를 했다.
"주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물리소서...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자신의 욕심이나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래서 온전히 자신을 죽여서 하느님께 맡긴 것이다.
자신이(생각이나, 분별하는 마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자신이(생각이나 분별하는 마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어떤 지혜도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생각이나 분별하는 마음) 아무리 노력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
(생각이나 분별하는 마음으로 지어낸 어떤 상도 천국이 아니며,
어떤 방법도 하느님의 나라에는 한발자국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을 우리에게 뼈저리게 알게 하기 위해,
모든 분별의 마음이나 생각의 죽음으로 들어간 것이
바로 십자가의 비밀이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마지막 무렵에 인간적인 모습으로,
하느님께 이렇게 말한다.
"엘리오, 엘리오! 라마 사박타니?(주여,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그는
숨이 마지막으로 끝이 날 때에 이렇게 말했다.
"다 이루었다!"(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명한 것이다.)
라고....
아...... 얼마나 극적인가?
아... 얼마나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진정한 연극을 펼치고 있는가?
'나를 버리시는가?' 하는 물음으로,
우리 속에 있는 욕심된 마음을 드러내고,
'다 이루었다' 하면서,
순명하고 내맡김으로서, 우리의 분별된 마음(욕심)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으로 박혀 돌아가신 것이다.
그 분은 그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위대한 분이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인간이 아닌,
거듭난 자로 부활을 한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 있고 난 후에 하늘에서 불덩이 모양으로 성령이 내린다.
즉,
인간의 모든 분별의 마음과 생각이 사라지고 난 뒤에,
깨달음의 세계가 열렸다는 말이다.
깨달음..... 성령.....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었다.
다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한번도 낙원을 떠난 적이 없었다.
다만, 분별하는 마음이나 생각이 낙원을 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가지라고 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가진다는 것은 욕심을 없애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의 생각이나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천국에 갈 수가 없으니,
마음을 통째로 비우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지식을 쌓고, 고행을 하는..
산더미 같이 아는 것이 많은 그 마음을 부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 가난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난,
즉,
분별하는 생각과 마음,
그리고 그것으로 지어놓은 노력과 방법(율법을 지키면 천국에 간다는 것)
의 죽음을 말한다.
율법은 지키는 것이아니라.
율법은 지켜지는 것이다.
즉,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몇 억겁을 다해도 율법의 한 획도 지킬 수가 없다.
그러나,
분별하는 마음이 죽어버리면,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 버리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 따위로는 오히려 분열만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알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자신(분별하는 마음과 생각)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한 획도 없애지 아니하고 지켜지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생각의 죽음이다.
인간이 생각으로 그려놓은 천국의 죽음이다.
인간이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천국을 가려는 방법의 죽음이다.
인간이 어떤 것을 지키므로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생각의 죽음이다.
인간이 천국을 가기 위해 쌓아놓은 모든 테두리의 허물어짐이다.
이것은 옳은 것, 저것은 버려야 할 것,
이렇게 해야 부처님의 뜻에 맞고 저렇게 하면 마구니다 하는 것의 죽음,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저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분명 노하실거야 하는 것의 죽음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그 속에선
자신의 삶은 오직 잘못된 것으로만 점철되게끔 했던 그 성스러움의 죽음,
누군가에게서 얻은 것으로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옳다고 곱게곱게 쌓아놓은 모든 성스러움의 죽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리고 선악과(성스러움과 잡스러움을 구별하는 생각)를 통하여 얻은 지식과 지혜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진정한 무지에 자신을 던져 넣음으로서,
그를 통하여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마음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미 우리는 늘 낙원 속에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 천년 전에 모든 인간의 원죄를 다 사해 주셨다.
원죄라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생긴 것이다.
즉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원죄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원죄의 사함,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겐 애초에 죄라는 것이 없었음을 알아야 한다.
분별하는 그 마음만 사라지면,
우리는 이미 낙원에 있음을 알게 된다.
신심명에 이런 말이 있다.
"참됨을 구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너무나 같은 말이 아닌가?
참됨을 구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이미,
참됨과 참되지 않음을 구별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자의 생각이 아닌가?
그것의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인 것이다.
그 죽음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길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죽음의 길을 통해서 비로소 천국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하다고 하셨다.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가시는 본다."
라는 말처럼
자신의 분별하는 마음은 살피지 아니하고 남의 분별하는 마음만 살피는 것이 바로,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가시를 본다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분별하는 마음이나 생각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낙원이 따로 있고, 깨달음의 상이 따로 있고,
어떤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짓 예언자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용하며, 거짓된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는 사악한 예언자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남의 가시보다 먼저 자신의 들보를 빼낼 수가 있다.
그래야,
계명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면 된다고 가르치고 꼬드겨서,
계명을 송두리째 어기게 만드는, 가장 대접을 작게 받는 자가 되지 않는다.
분별하는 마음에 속지 마라,
그것은 본래마음도 아니요,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도 아니다.
있지도 아니한 지나간 과거의 습이 모인 썩은 시체일 뿐이며,
시시때때로 우리를 썩은 잣대로 저울질하여서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원흉인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그 분별하는 생각이나 마음의 죽음이다.
율법의 완성은,
분별하는 생각이나 마음과 그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게 하는,
그 성스럽게 여겨지는 테두리가 죽어 나자빠진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삶을 떠난 도가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죽어버린 잣대가 지금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죽어버린 잣대를 가지고 율법이라고 한들, 어찌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여기의 삶을 떠난 어떤 경지가 깨달음이라고 하면,
과연 어떤 이가 깨달음의 경지에 갈 수가 있을까?
하느님의 율법은 언제나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이외의 것이 죽어야 살아있는 것이 된다.
하느님 이외의 것의 죽음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분별하는 생각이나 마음의 죽음을 말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보잘 것 없는 자라는 것을 하느님 앞에서 고백을 하고,
우리의 모든 앎을 하느님께 던져버려야 한다.
아는 것이 한 톨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분별하는 마음이나 생각에 속는 것이다.
즉, 거짓 예언자의 이리와 같은 이빨과 발톱에 상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음
-> 모세의 율법
-> 예수께서 율법학자를 꾸짖음
-> 예수의 죽음
-> 성령의 내리심.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 인간에 적용하면,
자라면서 분별하는 마음이 생김(선악과를 따먹음)
-> 자신의 앎이나 분별하는 그 마음을 버리지 아니한 채 깨달음을 얻으려는 노력
(모세의 율법)
-> 자신의 앎이나 분별하는 그 마음으로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통감함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을 꾸짖음)
-> 자신의 모든 앎과 생각들의 죽음, 즉, 마음을 내버려둠.
(예수께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심)
->깨달음, 자유, 평화, 행복... (성령의 내리심, 율법의 완성)
인 것이다.
성경의 전체 스토리는,
바로 불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지어내는 모든 분별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낙원으로 가는 길은 분별하여서 얻은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쌓은 지식이나 어떤 것이 천국이라는 상을 가지고는 단 한발자국도 들여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은 좁고 험하다고 했다.
우리는 버리기만 하면 된다.
성령은 우리가 지혜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버림으로서,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는 것이지,
우리가 얻는 것이 아니다.
버림으로서 알아지는 것이지,
그것을 알려는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신심명에서,
"참됨을 구하려 하지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
라고 한 것이다.
혹여,
우리의 앎을 버린다는 것을 또 분별해서 들으면,
있는 지식과 분별된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여 안달을 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버린다는 것은 기존의 앎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구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버리지 못하여 안달하는,
즉,
버린 상태를 구하는 그 마음조차 버리라는 것이다.
버리는 그 마음조차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버림이다.
버리는 마음조차 버려버리면,
무엇이 남는가?
'지금 이순간 있는 그대로!'
가 아닌가?
여태까지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일 뿐이지 않은가?
(화내고, 불안해하고, 힘들어하고, 탓하고, 미워하고 밴댕이 같고,증오하고 하는,
그러면서 사랑하고, 행복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든 모습 말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그냥 그러할 뿐인 그 모습 말이다.)
다만,
그것 아닌 것을 구하지 않기에,
지금의 모습을 탓하지 않고 살뿐...
그래서 자유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심이 바로 보리'
또는,
'중생심이 부처의 씨앗'
'번뇌 즉 보리'
라고 하는 것이다.
그 한생각,
분별하여 구하는 그 한생각,(선악과)
그 겨자씨만한 한생각만 내려 놓으면,(선악과만 토해내어 버리면)
수미산보다도 큰 자유가 이미 우리와함께 있음을 알 것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가 바로 부처임을 알아야 한다.
따로 구할 것도 알아야 할 것도 없다.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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