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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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4,766

17-02-08 20:27

본문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무념(無念)과 무주와 무상은 일체가 한 법이어서 오직 이 하나의 법인 불이법(不二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불이법(不二法)인 이 한 법만 있다면 무념이니 무주니 무상이니 할 것이 없다.

하지만, 육조단경(六祖壇經) 견성(見性) 편에서

“모든 경전의 글과 문자들과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이 모두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으며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로운 사람과 일체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부터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요, 일체의 경전의 글들이 모두 사람의 말로 인하여 있음을 알아라.”

라고 말한 것처럼

일체가 한 법인 불이법이어서 이 우주 삼라만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 한 법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 한 법에서 세상만물이 나오고 그 속에 사람이 있어서 사람들이 근본을 찾아다니니,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경(經)을 만들고 법(法)에 대한 설명도 만들어 근본을 찾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한다.

그런 연유(緣由)로 법(法)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래서 단경(壇經)에서

“만법이 본래부터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요, 일체의 경전의 글들이 모두 사람의 말로 인하여 있음을 알아라.”

라고 한 것처럼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만법이니 무념이니 무주니 무상이니 하는 말이 생긴 것이다.

 

만약 법에 대해서 왈가왈부(曰可曰否)하는 자가 없다면 법이니 법이 아니니 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말은 참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법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전하기 위해서 말을 하지만,

선(禪)에서 말하듯,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의미는 법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 한 법은 인간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하고 또 본래부터 존재하여 난 적이 없으므로 멸하지 않는, 온통 이것밖에 없는 것이어서 인간의 문자로 아무리 따지고 논한다고 해도, 그 문자 속에 법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옳게 말해도 맞고 틀리게 해도 맞으며, 반대로 옳게 말해도 틀리고 틀리게 말해도 틀리는 것이 이 법이다.

 

‘옳게 말해도 맞고 틀리게 말해도 맞다.’는 말은

일체가 한 법이니 말하는 것도 이 법이 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에 상관없이 모두가 법이다. 그래서 맞게 말해도 법이 하고 틀리게 말해도 법이 하는 것이어서 둘 다 맞는 것이다.

그리고 ‘옳게 말해도 틀리고 틀리게 말해도 틀리다.’는 말은,

이 법은 마치 사과라는 말 속에 사과가 없듯이 말의 내용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이라 해도 틀리고 법이 아니라 해도 역시 틀리는 것이다.

 

그래서 ‘옳게 말해도 맞고 틀리게 말해도 맞다.’고 하고 또 반대로 ‘옳게 말해도 틀리고 틀리게 말해도 틀리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법은 인간의 말에 구속(拘束)되지 않으므로 문자(文字) 속에 법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불립문자면 어찌 문자를 들어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망상에 속아 번뇌 속에 끙끙거리니 그들을 망상에서 해방시켜 번뇌를 덜어주려면 어쨌든 일체가 한 법인 이 사실을 전해줘야 한다. 그런데 문자로 또는 말로는 가르쳐서 전할 수 없으니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그러면 교외별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체가 한 법이니 사람의 마음 역시 이 한 법이다. 그래서 마음을 바로 가리켜 법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요,

이 마음이 법임을 깨달으면 그것이 성품을 보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즉 자신이 부처임을 아니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지금도 불립문자라고 하면서도 이렇게 문자를 빌려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문자를 빌어서 법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법은 문자를 빌어 말하거나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법이지 사람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에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이나 몸짓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쨌든 말이나 몸짓의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이용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하는 것을 일러 격외구(格外句)라고 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다.

즉 문자를 세웠지만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또한 격외구(格外句)라고 한다.

 

우리가 무주(無住)니 무상(無相)이니 무념(無念)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록 무념을 말하고, 무상을 말하고 무주를 말하는 것은 이것을 알아서 공부를 하여 시험을 치고 정확한 뜻을 알면 깨닫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바로 망상을 그치면 그것이 바로 무념이라는 말이니, 무념이라는 말을 외울 필요 없이 그 즉시 망상을 그면 그만인 것이다.

즉, 우리는 인간이기 전에 이미 법이므로 따로 시비분별을 여읠 필요가 없이, 그냥 망상을 그치면 그것이 시비분별을 여읜 것이고 이미 무념이니 다시 무념(無念)을 알거나 되기 위해 배우고 익힐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즉 무념을 알기 위해 따로 문자를 빌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조당집에 보면,

육조혜능(六祖惠能)조사의 제자(弟子)며 인도 사람인 굴다삼장(堀多三藏)은

신수(神秀) 대사의 제자(弟子)가 초막(草幕)을 지어 홀로 앉아서 마음을 관(關)하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하는가?”

하고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고요함을 지켜봅니다.”

하니

“지켜보는 이는 누구이며 고요함이란 무엇인가?”

하니 스님이 깜짝 놀라 그 말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삼장(三藏)은

“왜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하지 않는가?”

스님이 대답을 못하고 삼장의 스승을 묻고는 삼장의 충고를 받아 바로 조계(曹溪)로 가서 육조스님을 뵙고 굴다삼장과의 인연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육조스님은

“굴다의 말이 옳다.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해 지려고 하지 않고, 누구더러 그대를 고요하게 하라 하는가?”

하니 그 스님이 이 말씀에 크게 깨달았다.

는 글이 있다.

 

이와 같이, 고요하려면 스스로 그냥 고요해지면 되지, 자신이 고요한지 하지 않은지 살펴보고는 다시 고요해지려 하면, 스스로 고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단계가 있고 고요하거나 하지 않는 나(너)와 그것을 살펴보는 내(나)가 있어서 그렇게 분리된 생각으로는 늘 너와 내가 겉돌아 일체가 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뿐 일체가 한 법인 이 사실과 자신이 법임을 절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알면 그냥 하면 되지, 안다고 하면서도 하지 못하니 그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모양만 짓고 있을 뿐 실제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되려는 방법을 찾으니, 그것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누구에게 시키고 있는 짓이다. 그래서 누구에게 되려고 시키느냐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담배를 끊고 싶은데 마음이 굳지 못하여 잘 끊지 못하니 내게 어떻게 하면 담배를 끊을 수 있느냐고 물어올 때가 가끔 있다. 그러면 난, 한마디로

“담배를 끊는 방법은 그냥 안 피우면 돼.”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괜히 물었다는 식으로 섭섭해 하고, 또 괄괄한 성격을 가진 이는

“누가 그것을 몰라서 물었느냐?”

고 되려 화를 낸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담배를 끊는 방법은 담배를 안 피우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내게 방법을 말해보라.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담배를 끊겠는가?

담배를 끊으려는 자신이 직접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끊는 것이지, 도대체 누구에게 담배를 끊게 하려고 자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가 말이다.

굴다삼장(堀多三藏)과 육조(六祖)스님의 말이 이런 뜻이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 단경, 견성(見性) 편에서

“만법이 본래부터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요, 일체의 경전의 글들이 모두 사람의 말로 인하여 있음을 알아라.”

라고 하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법이 사람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말로서 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불이법(不二法)인 이 한 법은 사람이 저들끼리 전하려 하므로 문자가 섰을 뿐 본래부터 사람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

 

첫째, 이 사람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말로서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견성(見性) 편 중간에

“미혹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묻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법을 설해주어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하라.”

고 하시는 말로 밝혀주시고,

 

둘째, 불이법(不二法)인 이 한 법에서 문자는 사람이 저들끼리 뜻을 전하기 위해 방편으로 세웠을 뿐 본래부터 이 법은 사람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그 뒤에

“일체의 만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에 있음을 알아라. 어찌 자신의 마음을 쫓아서 단박에 진여본성을 드러내지 못하는가?”

하시며 이 법은 문자 속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밝혀 보이신다.

 

즉, 비록 불립문자이지만, 그래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방법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불립문자라고 하면서도 이렇게 불립문자라는 문자를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문자를 쓰지만, 일체 만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가운데 있으니 문자에 담긴 뜻을 단박에 드러내면 될 뿐, 생각으로 헤아리고 뜻을 세워 그 뜻에 놀아나지 말라는 말이다.

즉, 고요하라고 하면 그 즉시 고요하면 되지 어떻게 해야 고요해지는가 하고 묻지 말라는 말이다.

도대체 누가 있어 자신의 마음을 알아 고요하게 하겠는가? 고요해지는 것은 자신이지 어느 누구도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이 바로 고요해지는 것이 단박에 진여본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여본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연에 즉하여 행하는 것이 바로 진여의 본성이다.

그래서 담배를 끊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끊고, 그것이 안 되면, 되지도 않는 담배 끊는다는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이 즉심, 즉 진여본성의 삶을 사는 것이요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립문자요, 견성성불이다.

 

육조스님이 법화경 일불승에서 법달에게

“부처 행은 부처다.”

라고 했다.

이 말은 행하는 것이 부처이지 생각으로 헤아리고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行)하는 것이 바로 즉심(卽心)이다. 즉, 인연(因緣)에 즉(卽)하는 모든 행(行)이 바로 즉심(卽心)이다.

이처럼 행이 심이니 부처행이 바로 부처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에 나오는 모든 문자와 개념을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무념(無念)의 뜻을 알아야 제대로 무념(無念)이 될 수 있지만, 만약 무념의 뜻만 아는 것으로 그것을 연구하는 것으로 무념이 되고 법을 깨닫는 것으로 알면 법은 문자 속에 있게 되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속에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자에는 다 의미가 담겨 있어서 생각은 그저 문자를 따라다니는, 즉 이름을 따라 다니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알음알이를 따라다니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방법은 말과 문자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글과 말로 뜻을 주고받지만, 그것에 따로 숨은 뜻이 있는가 하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 행하는 것이 법을 깨닫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조사가 말하기를

“명마(名馬)는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린다.”

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선사가 누가 법을 묻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다.”

라고 대답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일체가 한 법이므로 뜰 앞의 잣나무가 그대로 법이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아! 저기 있는 저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법이구나, 그러면 이 돌도, 이 꽃도, 저 하늘도 바로 법 그자체구나.”

하면 그것이 바로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그렇게 그 즉시 뜰 앞의 잣나무가 법임을 알고 더 이상 의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거기엔 오직 법만 있을 뿐, 문자도 잣나무도 없다. 그래서 불립문자다.

그리고 그 법이 바로 우리의 본래 마음이니,

직지인심인 것이다.

 

천황도오(天皇道悟)스님의 제자인 용담숭신(龍潭崇信)은 도오스님에게 숭신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하여 모시기를 3년이 넘었을 때,

도오스님이 찾아 오는 신도들에게는 이런저런 법을 설하면서도 정작 제자인

용담에게는 한마디 가르침도 없었다.

용담은 참다못해 하루는 물었다.

“제가 스님을 모신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어째서 불법에 대하여 한마디 가르침도 없습니까?”

“네가 차를 끓여 오면 차를 받아 마셨고, 네가 밥을 지어오면 역시 밥을 먹었고 네가 절을 하면 내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제 와서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고?"

숭신은 이 말에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는데, 도오스님이 고함을 쳤다.

“이놈아! 보려면 당장 볼 것이지 망설이면 어긋나!”

이 말에 용담은 크게 깨달았다.

 

이것이 불립문자요 교외별전이요 직지인심이요 견성성불이다.

 

그런데 본다고 하면서, 또 법이 어떤 것이고 도가 어떤 것인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냥 이렇게 보는 것인가? 하고 헤아리면 이미 어긋난 것이다.

왜냐하면 보라고 하면 그냥 보면 된다.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면 보고, 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냥 법이다.

그렇게 일체가 법임을 알면 그뿐인데, 법이라는 모양을 지어 생각으로 헤아리니 용담은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투정을 부리고, 그 투정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밥 먹고 차 마시고 절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든 것이 법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도오선사가 따로 법이 없으니 당장에 보고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법이니 그냥 보면 되지, 보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망설이느냐고 호통을 친 것이다.

 

일체가 법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대로 법이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문자를 빌려 쓰는 것이지만, 그 말에 생각으로 헤아리지 않고 그대로 알아들으면 그것이 바로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직지인심(直指人心)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따로 법이 없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인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제자를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할 수 있고,

그렇게 제자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것이 또한 따로 법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따로 찾지 마라. 만약 그대가 따로 찾는다면 그렇게 따로 찾는 그 모습이 바로 법이요, 부처요, 불성이지, 찾으려는 대상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법이란 모양을 지은 망상일 뿐이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간절한 뜻에 한 생각 내려놓으면 그것이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다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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