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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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곳에 있다.
나란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인가?
일반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육체, 그리고 그것들로 이루어놓은 자신의 환경, 정서, 감정, 성격, 사회적 지위까지를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런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실체이다.
우리의 몸은 이런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우리는 이 도구를 이용하여 갖은 정보를 얻어 스스로를 찾아간다. 물론 이런 훌륭한 도구를 단지 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데 다 써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하지만 그들을 마냥 나무랄 수 없는 것이, 그들이 그러는 것은 자신이 존재 자체임을 알지 못하고 육체와 생각이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저급한 형태부터 고급스러운 형태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지금 세상의 모습이다.
즉, 각각의 인연으로 시쳇말로 하류인생으로부터 상류층까지의 다양한 모습들, 돈, 명예, 권력, 건강, 또 그것으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남과 차별하며 갑질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마치 대단한 것인 양 뽐내는 허세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는 것까지...
이런 것들은 사실 알고 보면 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즉, 동물의 세계에서 대장자리를 두고 싸울 때, 처음 자신의 몸을 부풀린다든지, 자신의 힘센 부분을 강조하는 모습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동물들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뇌와 같은 슈퍼컴퓨터를 가지지 못해 단순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지만, 인간은 아주 다양한 행동으로 남과 차별을 이루며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인류가 생기고 나서 생존과 직결된다고 착각하고 보존하며 지금까지 유전되어온 모습들이다.
하지만, 진정한 우리는 이러한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이 이제야 자신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는 뇌를 가지고 났다는 것과 이렇게 슈퍼컴퓨터를 가질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것도 아닌 것들(육체와 물질 모두가 다 인연으로 얻은 것이지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것이 없다.)을 쥐고는 뽐이나 내고 남과 차별을 이루는 저급한 행동을 하기위해서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 도구를 가장 잘 쓴 사람들이 부처님, 예수님, 노자와 종교를 불문하고 자신의 본질을 깨달은 수많은 선지식과 성인들이다.
각설하고 다시 돌아가
우리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과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다. 특히 정신과 감정은 더욱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육체의 기능이 만법과 인연으로 만들어낸 그림일 뿐이다. 육체는 그런대로 찰나라도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뇌가 만들어 뇌 속에 저장되어 있는 그림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선각자들은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혔기 때문에 아주 유용한 도구로 잘 이용하고 말려들지만 않으면 굳이 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깨닫지 않고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약산선사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자신들에게는 책을 읽지 말라고 해놓고 어찌 큰스님은 책을 읽느냐 하니, 약산은 그냥 펼쳐놓고 있다고 대답했는데, 제자들이 그럼 자신들도 펼쳐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약산이
“그래 펼쳐놓으면 되지, 하지만 글자가 너희들을 가만히 두겠느냐?”
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이 한 법을 깨닫지 못하면, 생각은 늘 헤아림 속에 있어서 무엇을 보기만 하면 생각을 굴려 의미를 찾아 헤아리고 따지고 시비하고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신적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려면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다만 생각에 의지하지 않고 알려고 애태우는 것은 좋은 도구 이용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뇌의 작용이다.
색을 보는 것도 실제는 파장의 길이를 우리의 뇌는 색으로 본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 맛, 소리, 냄새, 빛, 촉감 등은 그냥 신호일 뿐이다. 그것을 뇌에서 그림을 그려서 다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으로 우리가 느끼는 모양, 소리, 맛, 냄새, 감촉들을 우리는 마치 눈과 귀, 코, 입, 피부에서 느끼는 것처럼 알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다 뇌에서 느낀다. 즉, 눈은 모양을 못보고,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그런 신호를 뇌로 보낼 뿐이고 뇌는 그것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감각기관에서 들어오는 모든 신호를 뇌에서 다시 다른 신호로 바꾸어 모양을 짓는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를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좋고 나쁨을 가려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너무나 발달된 것이어서 단지 좋고 나쁨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복잡한 감정까지 만들어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온 신호를 뇌에서 조작하여 갖가지 그림을 그리고 또 그것을 스스로 보고는 온갖 의미를 붙이고 모양을 만든다.
그리고는 이 모양을 진짜로 알고 모양에 따라 울고 웃으며 뒹구는 것이다.
이것이 번뇌다.
하지만, 인류 중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이 거짓된 상황을 발견하고 모든 것이 다 하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부처님, 예수님, 노자와 같은 분들이다.
물론 기록이 없어 모르겠지만, 그전에도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것은 이 분들이다.
이분들로부터 인류에게 인간의 아주 유용한 도구를 동물의 힘겨루기를 좀 더 다양하게 쓰는 미련한 짓을 그만두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이루어낸 것이 바로 이름하여 깨달음이다.
우리는 모든 곳에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며, 어떤 것도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내 것이면서도 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에 있는 모든 세포와 원자 분자의 모든 곳에 있다.
그뿐 아니라 공기 중에도 있고 허공 중에도 있다. 나아가 이 우주 어디에도 우리가 없는 곳이 없다. 우리가 바로 법이요 우주는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바로 법 그 자체라는 말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일체가 한 법이다.’이다.
그래서 육체 역시 우리가 만든 도구일 뿐이다. 그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바로 법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육체를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 역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특히 생각과 감정들은 우리가 만든 육체가 역시 우리가 만든 만법과의 인연으로 생성해낸 스펙트럼일 뿐이어서 존재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다.
관념, 의미, 의지, 사상, 윤리, 도덕 등등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집단에서 살려면 비록 허깨비 같은 것이지만 필요한 것은 지키는 것이 삶에 편리하고, 또 모두가 법이니 결국 우리를 위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허깨비를 진짜로 알고 동요되면 시쳇말로 중생이요, 그것을 알고 그냥 도구로 쓸 뿐이면 부처다.
일체 만법이 모두 법이나, 법은 일체 만법 그대로이면서도 또한 그대로가 아니다. 즉 그것들과 우리가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법임을 알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모양에 집착하지 마라. 그것들은 모두 허깨비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몸과 정신적인 것에도 집착하지마라. 그것 역시 선지식이 말했듯 기관목인, 즉 로봇일 뿐이다.
하늘에 해가 뜨면 허공은 밝아지고, 하늘에 해가지면 허공이 어두워지며, 수증기가 모이면 허공에 구름이 생기고, 수증기가 사라지면 허공에 구름이 사라지지만 허공은 조금도 변함없이 여전히 허공일 뿐이듯,
우리의 마음도 허공과 같아서 우리의 뇌가 감각기관의 정보를 그림을 그려 슬프게 그리면 마음도 슬픈 그림이 되고, 기쁜 그림을 그리면 기쁜 그림이 되고, 행복한 그림을 그리면 행복한 그림을 그릴 뿐, 마음은 여전히 마음일 뿐, 어떤 감정에도 물들지 않는다.
스스로 그 마음을 보면 깨닫는 것이고, 그것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따라다니면 번뇌에서 뒹구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보아 깨닫든 모양을 따라 번뇌에서 뒹구든 우리의 마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마치 바다와 파도와 같으니
바다에 파도가 인다고 바다는 그냥 바다일 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파도야 바다가 있어 일어나니 당연히 바다와 상관이 있지만.....
파도 속에서 헤매지 말고 바다가 되고, 일어나고 사라짐에 상관없는 허공이 되라.
우리는 법이요, 바다요 허공이다. 눈에 보이는 구름과 파도가 아니다.
구름과 파도가 비록 우리(법)로부터 나왔지만 찰나에 일고 사라지는 모양에 허공과 바다가 무슨 애를 태울 일이 있겠는가?
우리는 모든 것들의 근본이요, 어디에나 있는 존재다.
모양의 흔들림에 속지마라. 우리는 모든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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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조나단님의 댓글
새벽에 또 이렇게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정심님의 댓글
요즘 그러한 것들을 느끼는데 (이것이 꿈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꿈속이지만 꿈도 어쨌든 관리를 해야 하니까
융통성있게 처신해야 할 것이 아닌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당...^^
윤기붕님의 댓글
비록 꿈이지만 좋은 꿈은 잠을 편하게 자게 하지요.^^
그래서 세간의 일도 웬만하면 세간의 법을 따라서 살아가면 편하게 살아갑니다.
다만 얽매이거나 집착하지만 않으면요.
삐카님의 댓글
세상의 모든 소란을 잠재우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생각을 내고 타자를 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