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깨달음과 행복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79

19-12-12 11:23

본문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波羅提尊者)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존자가 답했다.

“성품을 보는 것[見性]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렇다면 스님은 성품을 보셨습니까?”

“예,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성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불성)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입니까?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작용하고 있는데 왕께서 보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러한 작용이 있습니까?”

“왕께서 만약 작용한다면 그것 아닌 것이 없을 것이나, 왕께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본체조차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이 작용할 때에는 몇 가지로 나타납니까?”

“그것이 작용하여 나타날 때에는 여덟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덟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태(胎)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머물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하고, 코에 있으면 향기를 구별하고, 혀에 있으면 대화를 나누고, 손에 있으면 사물을 집거나 붙잡고, 발에 있으면 돌아다니거나 달립니다. 널리 드러내면 항하사와 같은 세계에 두루 차지만, 거두어들이면 티끌 하나 속에 들어갑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것이 불성인 줄 알지만 모르는 이는 이것을 정혼(精魂)이라고 합니다.”

이견왕은 게송을 듣고 마음이 곧 열려 깨달음을 얻었다.
(출처 : 경덕전등록 제 3권 보리달마조)


육체에 대한 집착

생각에 대한 집착

행복에 대한 집착

깨달음에 대한 집착...

우리는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 자신의 수중에서 떨어져 나갈 때 많은 절망과 자괴감을 느끼고 심하면 그 작은 잃음을 비관하여 전체를 던져버린다.(자살)

이 우주는 한 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와 너를 나누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인식하여 나와 다름으로 여기고 그것을 절대적 믿음으로 신봉하며 우주가 한 몸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개인적이고 고정된 내가 있다는 착각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하고 그 정체성과 근접한 무엇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집착을 더 불러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우리는 나 아닌 존재가 없으면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가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숨 쉬는 공기가 그러하고, 먹는 음식이 그러하고, 마시는 물이 그러하고, 사용하는 모든 도구가 그러하고, 돈을 벌게 해주는 직장이 그러하고, 나의 사업을 도와주는 종업원이나 회사나 간부 직원도 그러하고, 내 고객들도 그러하며,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딛을 수 있게 하는 지구라는 별도 역시 그러하고, 지구가 사계절을 만들기 위해 도는 태양도 그러하고, 더욱이 태양이라는 빛과 볕이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읽는 책들이 그러하고, 교육시설들이 그러하고, 세미나 등 연구 모임이 그러하고, 주위의 조언이 그러하고, 피로를 풀어주는 갖가지 취미와 여가 활동과 문화생활의 대상, 그리고 종교들도 그러하다.

 

게다가 우리 자신도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라 몸과 생각 마음 모두 주위에서 인연으로 얻어온 것일 뿐이다.

 

“어떤 것이 무명인가.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갖가지로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을 장소를 바꾼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망령되이 오인하여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으로 인연된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으로 삼느니라.” (원각경 문수보살장)

이 모든 것을 볼 때,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주위의 존재들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어서, 우리는 절대로 홀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며 홀로 떨어져서도 안 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다.

사람 인(人) 사이(관계) 간(間), 절대로 홀로 존재 할 수 없고 사람끼리 관계를 이루는 존재요, 나아가 모든 생물 무생물과 관계를 이루어야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온통 하나 속에 있는 나누어진 존재.

그러니 이런 인연의 인드라망에서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들 그것이 어디로 가겠는가? 일체가 하나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인데 내 몸이 죽은 들 또 어디로 가겠는가? 모두가 하나요, 생멸이 없는데...

생사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얻어 인연으로 흘러갈 뿐 다른 것들을 취하여 한 인생을 잘 살았으면 때가 되어 다시 돌려준다고 무슨 억울함이 있겠는가? 또 떠나가 봐야 그 자리인데...

전체성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이 이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두고 인생이, 세상이, 삶이 거지같고 엿 같은 선택지를 준다고 억울해하고,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하지만, 선택지는 여전히 우리의 거부의 몸부림에는 눈곱만큼도 눈길을 주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 이래로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했고, 또 그것을 벗어난 적이 과연 몇 번이었던가?

인간들은 행복을 바라고 있다.

어떻게 해야 과연 인간들이 바라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깨달음으로?

깨달음을 바라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과대망상을 가지고는

'깨달음은 이럴 것이다.’

라는 아전인수 격인 모양을 만들고 또 갖은 방법으로 공부라는 형태를 지어내고는 자신의 생각에 꼭 맞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과연 그러한 것이 깨달음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분명히 알라!

진정한 깨달음은 우리들의 이런 바람과 희망을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희망이 얼마나 먼지같이 부질없는 욕심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알게 해 줄 뿐이다.

부처님 스스로도 말씀하셨다 ‘나만큼 행복을 바란 사람은 없었다.’고...

하지만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을 하며 노력하고, 또 그것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고 여기고는 목숨처럼 붙들고 있던 고행을 던지고는, 새벽별을 보면서 얻은 깨달음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그 거지같고 엿 같은 선택지에 쓰인 모든 것들이,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비로소 자유로워졌고 행복해졌다고 눈 먼 제자 '아누룻다'에게 자상하게 고백했다.

 

“아누룻다여, 나 또한 너희와 같이 행복을 바라 집을 나와 수행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가 되었느니라. 실로 나보다 더 참되게, 나보다 더 힘차게 위없는 행복을 바라 그것을 추구해마지않는 사람은 없느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탐욕의 소멸, 분노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는 방식으로 사랑하라.”

 

부처님은 애초부터 결코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아니 모든 존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이유보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하여 그것을 찾아 그 당시에 유행하던 수행이라는 것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수행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수행을 멈추고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을 보고 늘 새벽 그 시간이면 그 자리에서 빛나듯, 세상의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하나의 법칙으로 흘러감을 아셨다.

 

그리고는 사람의 고통은, 본래부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 삶에서 한 생각 일으켜 더 나은 삶이라는 모양을 만들고는, 생각의 모양과 지금의 삶을 비교하고 시비하며 현재의 삶에서 도망쳐 있지도 않은 생각의 모양 속으로 숨으려는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본래 공하고 오직 한 법밖에 없으며 나아가 우리의 몸과 마음인 사대(四大) 오온(五蘊)의 실체 역시 공(空)하여 이 한 법에 의해 흘러감을 말씀하시고 일체가 진리 아님이 없음을 설파하셨다.

깨달음은,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 피할 수 없는 선택지 속의 시궁창 같은 삶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고, 더불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깨달음은 우리가 지어낸 고차원적인 어떤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거룩하고 고차원적인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모든 것이 하나라는, 우리가 기대하고 그려내는 온갖 바람과 욕심과 집착을 다 깨 부셔 버리는 그런 거룩함이다.

그리하여 너무나도 진부하고 당연한 어떻게 보면 지글지글하게 징그러운 이 일상의 생활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행복하고 거룩한 삶이요, 인간의 관념으로 지어낸 고차원적인 의식으로는 감히 접근할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는 고차원적인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부처. 예수. 노자)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들의 지금 이 순간 그 모습 그대로가 바로 온전하다. 그것이 못났던, 잘났든, 맘에 들든, 죽고 싶도록 싫든 그대로 온전하다는 말이다. 한 생각만 돌이키면 말이다.

그렇다고 이 말을 잘못 듣고 그 선택지에 쓰인 삶을 사는 것만 자유요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일부러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조작이요. 망상이다.

물리치고 싶은 선택지나, 갖고 싶은 선택지나, 하등의 우열이 없는 자연의 법칙으로 우리가 우리의 인위적인 생각만 버리면 우리 또한 자연의 법칙의 소산이기 때문에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일부러 그 길로 가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 우주는 연기로 이루어져 절대로 혼자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삶을 우리 맘대로 지을 수가 없다.

내 맘대로 착하고 싶어도 인연이 되지 않으면 착할 수가 없고, 악하고 싶어도 인연이 되지 않으면 악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내 몸과 생각도 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인연으로 얻어 짜 맞춘 것일 뿐이니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악이든 선이든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죄라는 것도 없다. 나라는 것도 없고 내가 한 것도 없고 일체가 연기법에 의한 자성의 나툼인데 어디에 죄가 있고 악이 있고 선이 있겠는가?

모든 것이 인연의 소치일 뿐이니, 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조금만 더 겸손해지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인다면 삶은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고 살아갈 놀이터요, 그 속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들은, 함께 소풍 나온 한 가족이요, 절대로 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잊어버리지도 잃어버리지도 빼앗기지도 않는 행복을 얻을 것이다.

머리로만 이해하려하지 마라. 겸손해지고 더 이상 바라지 마라.

그것만이 그동안 잊어버려서 몰랐지만 이미 행복한 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길이다.

선(禪)이란 이러한 사실 자체요.

이러한 사실이 우주의 진리임을 아는 것이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조사들이나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선이다.

그래서 선은 우주의 법칙이요, 그 법칙으로 드러나 보여주는 일상적인 삶이요. 그것은 매순간 체험되어지며, 누구나 그렇게 이 하나의 법속에 살아가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울 수 없어)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 외에 따로 전하니)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견성성불(見性成佛 성품을 보게 하고 부처를 이룬다.)

이라 한다.

그래서 선은, 말로 전할 수 없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며 본래마음을 바로 가리켜 본래마음을 보게 하여 부처를 이룬다.

깨달음은 이러한 사실을 사무치게 아는 것이요. 앎은 행으로 드러나니, 깨달음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禪)이다.

댓글목록

윤기붕님의 댓글

옛날 홈페이지 적천단상에 올렸던 글입니다.
다른 분들이 캡쳐하여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글 중 하나로
제 컴퓨터에 잠자던 글인데,
오늘 법문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있어
지금의 홈페이지에 찾아보니 보이지 않아
법회 참석하시는 분이나 동영상을 보시는 분께 도움이 될까 하여
새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