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깨어 있음이란?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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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어느 날 설암(雪巖)화상이 고봉을 불러 물었다.
“생시에 주재(主宰)가 되느냐?”
“됩니다.”
“잠을 잘 때 꿈속에서도 주재가 되느냐?”
“네, 됩니다.”
그러자 설암화상은
“그럼,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는 때에도 주재가 되느냐?”
하고 물었다. 이 말에 고봉이 콱 막히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니 설암화상이
“너는 이제부터는 부처(佛)도 법(法)도 배울 것이 없으며 고금(古今)도 공부할 것이 없으니 그저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을 자되, 잠이 깨거든 정신을 가다듬고 오직 ‘나의 이 주인공이 필경 어느 곳에 안심입명(安心立命) 하는 것일까?’를 참구하라.”
하였다.
그때 고봉은 주재자라는 말이 화두가 되어 의단(疑團 :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내 차라리 평생을 버려 바보가 될지언정 맹세코 이 도리를 명백히 하고야 말리라.”
하고는 설암화상을 떠나 만행을 하며 5년 가까이 지나던 어느 날,
한 밤에 잠에서 깨어 여전히 이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옆에서 자던 도반(道伴)이 잠결에 목침을 침대 아래로 떨어뜨리는 소리에
홀연 저 의단(疑團)을 타파되고 마음이 확 밝아지면서 게송을 읊었다.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을 친견한 듯하고 如泗州見大聖
떠난 객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遠客還故鄕
원래 다만 옛 사람일 뿐 元來只是舊時人
옛 행리처를 바꾼 적이 없도다 不改舊時行履處
게송에서 말하듯,
깨달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 같고 옛날의 행하던 것을 바꾼 적이 없는 것과 같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이 본래 깨달아 있고,
설암화상이 물은 ‘주재하는 자’, 즉 깨어 있는 자 또한 개체적인 자신 아니라
이 한 법 불성(佛性)이 주재하고 있어서,
자신과 일체만법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래 깨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마치 그물에 걸렸다가 풀려 나온 듯 하고, 불조(佛祖)의 깊고 깊은 공안(公案)과 고금의 차별인연에 밝지 않음이 없게 되어,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천하가 태평하여 한 생각도 함이 없이 시방(十方)을 좌단(坐斷 : 앉아서 끊음)하였다.”
여기서
“한 생각도 함이 없이 시방을 좌단(坐斷 앉아서 끊음)하였다.”
라는 것도,
고봉선사가 설암화상의 주재(主宰)라는 말에 모든 것을 자신이 하려고 하다가,
도반의 목침 소리에 주재는 고봉 자신의 개체적인 존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 법이 늘 그렇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처럼,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앉아서 끊음(坐斷)’이라 하니
자리에 틀어 앉아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모든 생각을 끊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한 법이 본래 그러함을 알아,
좌단으로 실제로 끊을 것이 있어서 자신이 노력하여 좌단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좌단을 ‘한 생각도 함이 없이’하였다고 하였다.
‘깨어 있음’이란 이런 것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치 잠도 안 자고 꿈도 안 꾸고 또 허튼 생각도 하지 않으며,
초롱초롱하게 늘 깨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과 아무런 상관없고,
우리의 삶의 형태와 생각의 형태와 아무런 상관없이 이 법이 늘 깨어 있으므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생각을 하고, 심지어 허튼 망상까지 할 수 있음을 알고,
법이니, 깨달음이니, 깨어있음,이니 하는 생각조차 없이,
아무런 시비없이 그냥 인연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깨어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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