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 중에서...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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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의 비유에 보면
“나에게도 감성은 있다. 아름다운 꽃은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발바닥에 가시가 찔리면 아픔에 얼굴을 찡그린다. 살아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감성은 있는 법이다.
이것이 나에게 온 첫 번째 화살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두 번째 화살까지 맞는다.
아름다운 꽃은 보면 아름답다 생각한 다음, 꽃을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하고 집착한다. 또 아프다고 생각한 다음, 분노의 감정에 어쩔 줄 모른다.
부처는 무엇을 하나 무엇을 느끼나 그것에 물들지 않는 자이다.
그 속에 내가 없는 자이다.”
라고 하신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지만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곧 사사무애법(事事無碍法)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사무애법(理事無碍法)을 깨닫고 나면 일체가 모두 하나의 법이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이 한 법으로 귀결시킨다. 여기서 오류가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이 법인데 뭐~!’하며 공에 들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사사무애법(事事無碍法)은 일체가 한 법이어서 모두가 다 법이 하고 있지만, 그 속에 각각의 개체적인 존재들이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이 사사의 세계다. 이 사사의 세계에서 각각의 존재들이 서로 부딪히는 인연에 대해 즉각즉각 반응하는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면서도, 그 부딪히는 인연과 또 자신이 일으키는 생각과 감정도 모두 법임을 알고 그것에 끌려 다니거나 휘둘리지 않는 여여함을 가지는 경지가 바로 사사무애법이다.
여기에는 내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이사무애법을 깨달은 것도 이미 불이법(不二法)을 깨달아서 나도 법임을 아는 것이니 내가 없지 않은가?”
하고 반론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사무애법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가만히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만약 ‘일체가 한 법이고 모두가 깨달아 있는데 내가 따로 해야 할 일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일체가 한 법이라고 부르짖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아상(我相)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잣대를 들고 세상에 나와 무엇을 하려는 사람에게 시비를 한다.
그래서 아직도 아는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깨달았지만 아상을 여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사사무애법(事事無碍法)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래도 육체를 가진 개체적인 존재가 있어 부처님의 말씀처럼 첫 번째의 화살을 맞아 생각과 감정은 일으키지만, 거기에 고정된 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의 인과의 연속성이 없어 이어지는 시비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이 아함경에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꽃은 보면 아름답다 생각한 다음, 꽃을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하고 집착한다. 또 아프다고 생각한 다음, 분노의 감정에 어쩔 줄 모른다.”
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저 꽃이 아름다울 뿐 집착하거나, 그냥 아플 뿐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가 한 법임을 알고 다시 내가 부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만법도 자신과 똑같이 부처임을 알고,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모자라고 바보 같고 때론 실수도 하는 그냥 그런 존재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없는 자 돌로 쳐라.”
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바른 법도 있고 시비의 법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이 한 법의 어울림에서 일어나는 일이요, 그 속에 존재하는 우리 역시 그 어울림 속에 있는 것이지, 그곳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시비하고 판단하는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매 순간 즉각즉각 느끼는 것에는 반응하지만, 그것에 시비하는 나라는 물감을 다시 칠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즉심(卽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지만 깨달은 자는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
고 한 말이다.
만약 이사무애(理事無碍)만 알고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일체가 한 법이란 것만 아는 자신에 머물러 있으며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않고, 또 나아가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이 법을 가르쳐 주거나 마음을 교류하지 않는 무정물(無情物)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던 법이라는 단정하고 반듯한 모양에 머물러 일체 만법의 다양한 모습, 즉 때론 단정하고 때론 흐트러지고, 때론 질서 있고 때론 질서가 없어 보이고, 때론 법에 맞는 듯하고 때론 법에 어긋나는 듯한 이 법계의 다양한 모습에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알 때에 비로소 일체가 한 법이면서도, ‘내가 부처다.’라고 하듯이, 이 법계는 모든 존재들이 다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서로 인연으로 엮여져 있어 온갖 일이 일어나는 세상임을 알고, 나아가 그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가 바로 법이요 부처임을 아는 것이다.
즉, 단정한 것도 법이요, 흐트러진 것도 법이요, 또 질서있는 것도 법이요 무질서 한 것도 법이요, 법에 맞아 보이는 것도 법이요, 법에 어긋나 보이는 것도 역시 법임을 아는 것이고, 나아가 법이니 법 아니니 하는 시비와 분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평등하지 못한 느낌도 느끼면서도, 그 평등하지 못한 모든 것이 그저 모양과 시비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아 생각과 감정의 이입이라는 아상을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느낌은 있으나 개체적이고 편파적인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지만,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하신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부처님께서 격언처럼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해 만드신 거룩한 말씀이 아니라, 진실한 말이요 실다운 말로, 진정으로 이 법을 깨닫고 모든 시비분별이 끊어지면 부처님의 말씀이 바로 자신의 일임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보임이 끝난 자리다.
이 자리는 그저 막대를 세워 해와 막대의 각도가 꼭 맞아 그림자가 사라진 초점을 발견한 정도로는 알 수 없는 자리요, 그리고 만약 그림자가 사라진 거기에서 만족한다면 이 부처님께서 두 번째 화살을 말씀하신 뜻을 절대로 알지 못한다.
물론 이것을 알려면 초점이 맞는 상태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그리고 난 뒤에 그것마저 버려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자리다.
무슨 말인가 하면 깨달은 사람들이 법을 가리킬 때, 손가락을 들면서
‘손가락을 흔드는 이것’이라는 것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손가락과 이것이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 흔드는 것이 그대로 법이다.’라는 상태까지 와야 법과 손가락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고, 손가락과 흔드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사사무애의 자리에 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와 사, 그리고 사와 사가 모두 하나가 되어, 손가락과 흔드는 것과 법이라는 자리가 다름이 없으니, 사사무애의 자리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모양이 따로 없으니 모양 없는 자리다.
이 모양 없는 자리에 들어 올 때에, 비로소 세상의 인연에 반응하면서도 늘 마음이 고요하다는 말을 제대로 알 수 있고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즉, 대승경전의 곳곳에서 ‘오욕칠정을 여의지 않고 보리에 든다.’ 또는 ‘생사가 열반이다.’ 또는 ‘번뇌가 보리다.’하는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그냥 쑥 들어와, 그 모든 생각의 모양을 다 없애버리고는 무엇보다도 활발하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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