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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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변(兩邊)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270

20-04-08 19:59

본문

양변(兩邊)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의 제자 중에 하택신회(荷澤神會)가 있었다. 그가 처음 혜능조사를 찾아와서 물었다.

“스님, 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습니까??”

그러자 혜능조사는 신회를 세 번 치고는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신회는 대답하기를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자 혜능조사가 말했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물었다.

“큰 스님께서는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그러자 혜능조사는 대답하였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그런데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나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하기를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자 혜능조사는 말하기를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하였다.

 

- 육조단경 생멸(生滅)과 양변(兩邊) 편 -

 

혜능조사는 자신이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은 양변이요, 신회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 것은 생멸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혜능조사는 자신의 허물을 보기에 ‘보기도 한다.’고 하였고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기에 ‘보지 않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면 깨달은 혜능조사도 허물을 아직도 여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큰 착각이다.

혜능조사가 허물을 여의지 못한 사람으로 보면 양변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혜능조사 자신의 허물을 본다고 하는 것보다 먼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다.’는 말을 풀이하면

이 세상은 모두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생기고 변하고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일’ 역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인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한 개체인 자신이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본다고 한 것은 이 법이 이러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한 행위, 즉 이렇다 저렇다 하며 시비분별 하는 허물이 있는가를 살핀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사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미 그런 허물을 짓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스스로의 허물을 본다는 말은 신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말이지, 실제로 조사가 시비분별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혜능조사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다.’라고 한 말 중에, 하늘과 땅은 사람들처럼 시비분별 하는 스스로의 의지가 없어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잘 따르지만, 사람은 생각이 시비분별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조사께서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시비분별이 있는 것은 태초부터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있어서 삼라만상이 일어나고 그 근본무명이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있으면서 인연에 반연(攀緣)하여(자기 생각이나 바깥의 경계 등에 반연)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리하는 이유는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서로 인연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개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일으키고, 그 생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집인 이 몸이 존재해야 하므로 자연히 자신과 개체인 몸이 유리한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생각과 감정을 일으켜 개체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시비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다 근본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비가 일어날 그 시점에는 그냥 우리의 생각과 기관이 인연에 응하여 일으킬 뿐 자체에는 분별이 없고 또 그 일어남의 근본이 자성에 의해서 일어나기에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비록 시비를 일으키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사람의 생각 자체가 이 한 법에서 직접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인 몸이 먼저 생기고 그것의 기관에 의해 생겨난 것이어서, 이 몸 이전의 존재, 즉 우리가 이 한 법 그 자체임을 몰라서 일으키는 것일 뿐임을 안다.

그리고 또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이 한 법의 인연으로 된 법 자체인 몸과 자신이 개체의 존재라고 여기는 생각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한계 때문일 뿐, 실제로 사람들이 개체적이고 자주적인 실체가 있어서 그런 시비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다시 옳다 그르다 하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뿐만 아니라 사람의 허물도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 혜능조사처럼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치에 맞지 않는 행을 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면 시비하지 않고, 또 큰 문제가 있더라도, 그 행위에 대해서만 시비할 뿐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떤 시비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조사께서 자신의 허물을 본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세상을 이렇게 본다는 말을 역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자신이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을 보고 있지 않은가를 살핀다는 뜻으로, 실제로 자신이 그런 허물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말한 것이다.

혜능조사는 자신의 이러한 행위가 양변(兩邊)이라고 하였는데, 왜 이것이 양변이 되는 것이냐 하면 양변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계는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정등각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분별해 연설하고 드러내어 보이시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라고 하셨듯이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법은 바로 양변, 즉 인(因)과 연(緣)이 만나 과(果)를 이루고, 그 과가 다시 인이나 연이 되어 만나 또 다른 과를 내는 흐름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으로,

끊임없이 이것과 저것인 양변이 서로 인연이 되어 흘러가며 세상을 드러내게 하는 법이기 때문에, 양변은 세상의 근본 실상이 드러난 모습이다.

 

그래서 조사의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 양변이라고 하신 것은, 곧 그 양변을 본다는 것으로 이 한 법의 진실을 본다는 뜻이고 또 이 한 법의 인연을 따라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 양변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이므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만나 과를 내므로 이 법에는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불구부정(不垢不淨)이고,

그리고 양변이 서로 인연이 되어 끊임없이 변해갈 뿐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도 늘지도 줄지도 않으니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그대로이다.

 

그런데 신회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는 것을 생멸(生滅)이라고 하신 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으로 붙여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를 하나 만들어낸 것이다.

 

즉 조사께서는 일어난 일을 볼 뿐 그것에 다시 좋고 나쁨이라는 의견을 내지 않는데, 신회가 그것에 다시 아프다 아프지 않다는 좋고 나쁨이라는 의견을 내어 실재하는 것에 다시 사람의 시비하는 생각을 붙여,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낸 것이므로 생멸(生滅)이라 하는 것이다.

 

생멸이라는 것은 실제로 생멸이 있어서 생멸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으로, 특히 사람의 생각 변화에 따라 좋을 때는 생(生)했다가 싫으면 멸(滅)하는 허깨비 같은 것이고, 또 사람들의 번뇌와 고통이 이런 허깨비에 속아서 일어나기 때문에 생하고 멸하는 생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그냥 이 한 법의 연기법만 있고, 그리고 만약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져 연기법을 적용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 한 법은 여여하게 있기 때문에, 이 법은 생멸의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인과 연의 법칙인 양변이 과를 만들고, 그 과가 다시 인과 연의 양변이 되어 과를 만드는 끝없는 순환구조만 있을 뿐 개체의 것이 없으니,

하나의 과가 변하지 않고 존재하거나, 그 과가 사라지면 우주의 무게가 변하는 등 이 한 법과 이 한 법의 법계가 한계가 있는 법이 아니므로, 나고 죽음이라는 생멸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조사 문하에서 법을 배우러 온 자가 존재하지도 않은 생멸의 의견을 내니 조사는 꾸짖은 것이다.

 

유마경에 이런 말이 있다.

“바깥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의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라.”

 

이 말은 곧 모든 법의 모양이 이 한 법의 인연으로 변해가지만 첫째의 뜻, 즉 이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에 따른 것이고 또 일체가 모두 이 한 법일 뿐 다른 일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프니 아프지 않으니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혜능조사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이 다음 편 대법(對法) 편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雙)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가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究竟)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는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여기서 사람들이 법을 물을 때 쌍으로 대법을 취하여 말하는 것은 곧 양변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하여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이 없는 세상을 신회처럼 아프다 아프지 않다고 규정하고 그것에 끌려 시비분별을 내는 마음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세상은 오직 이 한 법만 있을 뿐이고, 그 한 법이 세상 만법을 드러내고 드러난 세상 만법이 인연에 의해 양변(兩邊)이 로 쌍(雙)으로 만나 다른 과를 내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법계다.

그러므로 양변은 그것을 나누어 시비를 따지는 생멸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연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진실한 모습이므로,

이쪽과 저쪽을 다 살펴서 옳고 그름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치우침이 없는 양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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