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인연(因緣)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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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인연(因緣)이란 말은 불교적으로
因(인할 인) : 결과를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
緣(인연 연) : 원인을 도와 결과를 이루는 작용.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인연이라고 하면 사람을 만나는 것을 많이 떠올린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사람과의 인연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일로 다가오니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인연이란 그런 큰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카스토리...
몇 년 전 스마트 폰이라는 것을 처음 가졌을 때 카스토리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주위에서 스마트폰을 구입하라고 권했고, 그때까지는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그들의 말에 구입을 했다.
내 폰을 본 지인이 카스토리 계정을 만들어 줬다.
그리고 카친들을 사귀고 서로 글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2~3년을 소통하다가 별 의미가 없어 그만두었다.
여기까지의 인연.
왜 내가 스마트 폰이 필요했을까?
남들이 가지고 있고 흐름이 그러니까?
아직 옛날 폰도 쓸 만한데도...
이런저런 수많은 생각과 이유가 바꾸는 결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개설하면서 찾아간 곳.
광고에 널리고 널렸는데 하필이면 그곳에 갔을까? 무엇 때문에? 거리로는 우리 집에서 상당히 먼 곳인데?
그리고 하필 그날 그 시간에 갔을까?
갑자기 필요성이 크게 느껴져서?
그날따라 시간이 생겨서?
아니면...?
모두 인연의 작용이다.
폰을 개통하면서도 그쪽은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나 역시 어떡하면 좋은 조건으로 개통을 할까,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두 사람이 굴리는 생각이 그때 그냥 없는 것에서 불쑥 나타났을까?
그쯤하고 그렇게 폰을 개통하니 지인이 보고 카 스토리를 개설해 줬다.
그 지인은 어떻게 만났을까? 어머니 뱃속부터?
어찌어찌하다가 만났다. 하지만 어찌어찌한다는 것이 그냥 어찌어찌하다 어찌어찌한 것일까? 아니면 그간의 두 사람의 수많은 인연의 길목에서 그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의 엮임에 의해 서로 맞아떨어진 것일까?
또 나는 카스토리를 접었지만, 지금도 카스토리에서 얼굴도 모르고 카스가 아니면 만날 수도 없는 사람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소위 카친이라는 것이 되어 서로의 글을 읽고 있다.
그리고
내가 카스토리를 알 때, 내게 스마트폰이 없었으면 생각도 못 할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도 한 사람 한 사람 친구하고 수락하는 것이 그냥 했을까?
분명 어떤 생각이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때 방금 생긴 것일까? 나의 인생 경험에서 배운 모든 재료가 개입한 것일까?
그리고 나만 좋다고 친구가 되는가?
다른 이들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인연이다.
그냥 어떤 사람을 만나고 일을 만나는 과정 등과 같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인연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나의 삶의 편린(片鱗)들, 그리고 모든 생각의 편린들이 서로 모여 엮이고 정리되면서 눈에 보이는 인연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에서 경험한 것들이 다른 인연의 거름이 되고, 그렇게 인연이 끝없이 이어져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옷깃만 스쳐도 3천년의 인연이 있다고 말하고.
인연이라는 것은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만이 인연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지 못해도 그것이 연연의 인연을 타고 내게 영향을 준다.
이처럼 우주자체가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느 누구도 이 우주에 존재하는 한 인연 없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공기가 없어도 몇 분은 산다.
하지만 인연이 없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우리는 사라져 버린다. 아니 애초에 생겨날 수도 없다.
왜? 우리가 생겨나는 것도 인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인연이고 이 인연을 벗어나 홀로 잘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잘난 것도 역시 인연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연을 알면 겸손해지고
인연에 대해 통달하면 공(空)을 알게 되고 깨달음을 얻는다.
나아가 욕심과 목표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여유롭고 편해지고 겸손해지며 사랑이 나온다.
그래서 행복해진다.
인연에 대해 통달하는 것은 별 것 아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자신의 삶에 대입해보면 된다.
지금 이 글도 인연이 없으면 읽을 수가 없다.
이 글이 여러분들과 만나기까지 몇 개의 인연을 거칠까? 하고 생각해 보라. 아니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얼마의 인연이 있었는지 생각하는 것부터 해보라.
인연에 대한 올바른 앎을 실제로 시작하는 것이다.
글로 읽어서 얻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마치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길을 가는 것과 같아 직접적인 궁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곧 잊어버린다.
물론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언젠가는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 쓸데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다른 삶에 묻혀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물론 그러한 것도 인연의 작용이다.
그것을 알고 다시 인연에 대해 알고 싶으면 새로 시작하면 된다.
그냥 슬며시 생각이 없어질 수도 있고...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공정한 마음으로 직접 돌아보기 전에는 이 인연이 얼마나 엄격하고 평등하며, 또 그러하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내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인드라 망(網)이라고 한다.
이 우주의 인연이 그러하다.
노자는 도덕경 73장 말미(末尾)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도 커 성긴 듯 하나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다.”
(천망회회 소이불실 天網恢恢 疏而不失)
이 말은 하늘, 즉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은 갖가지 모양, 즉 헤아릴 수 없는 인연들이 서로 섞여 일어나고 사라지게 하므로 그 그물의 코가 엄청나게 넓고 커서 성긴 듯하지만, 한 톨이라도 그 법칙과 작용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그 법칙과 작용은 엄격하고 평등하여 어느 한쪽도 기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인연(因緣), 즉 연기법(緣起法)을 알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고 겸손해지고 마음이 비어진다. 그리고 점점 나라는 것이 사라져간다.
그리고는
어느 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약산(藥山)에게
스승 석두(石頭)화상이
“그대는 하지 않는다 하는데,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때
“천명의 성인(千聖人)이 와도 알지 못합니다.”
(師曰 你道不爲 不爲個什摩 對曰 千聖亦不識)
라고 대답한 약산의 말과,
달마조사(達磨祖師)가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양무제(梁武帝)에게
“나도 모릅니다.”(不識)
라고 한 그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고오타마 싯다르타 왕자는 이것을 깨닫고 우리가 존경하는 부처님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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