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번뇌의 근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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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번뇌라는 것은 세속(世俗)에서만 쓰는 말이다.
본래 자리인 이 법에는 원래부터 번뇌라는 것이 없다.
그럼 번뇌의 근원은 무엇인가?
번뇌의 근원은 바로 미망(迷妄)이다.
즉,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이 미혹되어서 일체의 법(세상사와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은 자성(自性)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자성이 없다는 뜻은 일체 만법은 이 한 법의 성품(自性)을 빌어서 인연으로 생겨나므로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여서 모든 법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성에 의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성품이란 것은 본래 공적(空寂)하여 알음알이가 없다..
그래서 성품을 빌어 일어나는 일체의 법도 역시 알음알이가 없어서 물들여 더럽혀질 것이 없으니 번뇌가 없다. 그래서 자성이 청정하듯, 모든 법 역시 청정하다.
사람들은 청정하다고 하면 더러움을 없애고 깨끗함만 있는 것을 청정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생각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번뇌의 굴로 들어가는 원인이 된다.
법은 불이법이다. 오직 한 법밖에 없는데 더러움이 어디에 있고 깨끗함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이 한 법에서의 청정은 깨끗함에도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을 씻어 깨끗함에만 머물려고 한다면 깨끗함에 오염된 것이고, 이미 오염되었으니 더러움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 법은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다. 그래서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는 것이 청정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생각이 전도되어 있다고 하였으니 세간의 눈으로 보아 더러운 것과 깨끗한 모든 것을 모두 청정이라고 보면 된다.
농담이 아니라, 일체가 법이어서 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법 아님이 없다.
그래서 세간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모든 것이 다 법이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이 한 법으로 나왔고 이 한 법의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청정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이 그 모양을 보고 공연히 생각을 지으니 더럽다 깨끗하다는 모양이 생겼을 뿐, 모두가 인연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인식과 인지기능이 한정되어 있어서 세상에 드러난 것들의 인연을 세세하게 알지 못하니, 자신의 개체적인 경험으로 얻은 지식으로 분석하고는 그것의 옳고 그름으로 자신과 대상을 한정시킨다. 그래서 생기고 사라지는 것들에 있지도 않은 모양과 성격이 생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드러난 만법은 그냥 이 한 법의 연기법에 의해 매 순간 그 찰나의 인연으로 생기고 변할 뿐 고정된 모양과 성격이 없다. 그래서 더러움도 깨끗함 등 사람들이 갖다 붙이는 어떤 의미도 없다.
청정이란 이런 의미다.
즉 세간에서 더러우니 깨끗하니 하는 모든 것은 사람의 생각이 지어낸 것일 뿐, 실제는 모두 이 한 법이 스스로를 자신의 법칙과 작용으로 드러낸 법 그 자체로 늘 청정한 것이다.
이처럼 일체만법이 모두 청정하니 따로 청정이라 할 것이 없다.
따로 청정이라 할 것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청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법이 한 법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또 모든 일생을 다 이 한 법의 성품에 의지하여 변해갈 뿐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
그래서 앞에서 세상 만법이 ‘이 한 법의 연기법에 의해 매 순간 그 찰나의 인연으로 생기고 변할 뿐 고정된 모양과 성격이 없다.’고 말했듯이, 만법의 모양과 성질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드러날 때의 그 순간에만 존재할 뿐 곧 인연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그러하기 때문에 또한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늘 변하니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고정된 모양과 성격이 없다.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그리고 이러하기 때문에 세상에 똑 같은 것이 없다.
과학적으로도 이 우주가 생긴 이래로 똑같은 눈송이가 없다고 하듯이 우주가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같은 것이 없었고, 또 이 우주가 멸망하더라도 그때까지 한 번도 같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아주 느슨한 말이다.
오직 찰나의 그때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한 본래 의미도 이런 뜻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모양과 일들이 같은 것이 있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얻으려 하며 집착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싫어하고 내치려 한다.
또 자신이 지은 모양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원하거나 노력하거나 재물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도덕경 5장 천지불인(天地不仁)에서는
“천지는 인(仁)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과 같이 여기고, 성인도 인이 없어 백성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라고 하였다.
추구(芻狗)는 짚으로 만든 개의 형상으로 춘추전국시대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신령한 것의 상징으로 제단 가운데 놓은 것이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면 그것의 효용(效用)이 끝났다고 여기고는 사람들은 그것을 바깥에 그냥 내다버려 버린다.
천지와 성인이 만물과 백성을 추구같이 여긴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으로, 실제로 성인이 백성을 추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 한 법의 인연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해버린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사람의 욕심이나 바람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어떤 인연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일 뿐 다시는 같은 인연이 오지 않는 것을 일러, 제사를 지낼 때는 소중하게 여기다가 그것이 끝나면 아무 미련없이 버리는 추구에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법의 연기작용에 의해 단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그래서 어떤 고정된 모양도 없어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머물게 하고 싶고 잡고 싶고 자신이 바라는 모양이 있기를 바라니,
실제의 세상과 사람의 욕심이 충돌하는 상황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불인(天地不仁)과 같은 이 한 법은 인간의 생각이 그렇든 말든 이 우주를 끝없이 흘려보내니, 멀어져가는 님을 보듯 눈물을 흘리고 고통에 빠지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고, 그 가운데 사람이 정을 많이 쏟고 욕심과 집착이 많은 일일수록 되돌아오는 번뇌와 고통은 큰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일체가 한 법이어서 드러난 모든 것들은 실재하는 그 순간에는 진실한 것이지만, 만법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이 한 법의 연기법에 의해 생기고 변하는 영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잡으려는 순간 사라져버려 진실한 것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진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리가 없다면 어찌 이 우주가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사람들이 진리를 찾듯이 어디에 따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즉 이 우주는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하여 늘 순간만 존재하기 때문에 잡을 수는 없지만, 매 순간 만법이 성성하게 드러나고, 드러난 만법은 모두 이 한 법의 발현으로, 아무리 끊임없이 변한다 하더라도 그 변한 모습은 오직 이 한 법으로 되어 있는 늘 여여한 우주이고, 또 이 우주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이 이 한 법 자체이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난 만법은 그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순간 실재하는 것은 모두 진리요, 모두가 진리이니, 따로 진리라고도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 인연에 우주는 매 순간만 존재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도 다 이해될 수가 있고 또 상을 가지지 말라고 하는 것도, 잣대를 버리라고 하는 말도 역시 무슨 말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칙은 영원하니까 생사가 없다는 말도 이해될 수가 있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 역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일체의 법에 대해서 한번 ‘있다’는 견해에 떨어지게 되면, 너와 내가 그 속에서 분리되어 서로서로 살아있는 모양으로 일어나게 되고, 나아가 내게 다가오는 모든 법에 대해서 취사순역(取捨順逆 : 취하고 버리고 따르고 거스르는 것)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자기 생각에 맞으면 사랑하고, 어긋나면 미워하게 되며, 또한 사랑하면 취하여 받아들이고, 미워하면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있다’ 즉 영원하다는 착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분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심해지면, 자기에게 좋으면 집착하여 탐(貪)하게 되고, 반대로 미워하는 것에 대해선 분노하는 마음과 원한이 생긴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살아온 세월동안 습(習)에 의해서 의식(意識)에 속속들이 잠복하여서 인연과 때만 만나면 제 마음대로 일어나서 우리를 마치 그 의식의 종처럼 부리려하고 번뇌와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얽매이게 되고, 생각은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날 뛰어 우리가 가만히 있고 싶어도 가만히 두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 청정(淸淨)하고 진실한 우리의 본래 성품은 분별이 없고 모든 것을 다 감싸 안기 때문에 늘거나 줄지도 않고 깨끗하거나 더럽지도 않고, 또 옳다 그르다, 진실하다 그렇지 않다고 분별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얻으려거나 버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모두가 이 본래 청정하고 진실한 본성인 이 한 법(法)의 발현이라 단 한 번도 이 법과 떨어진 적이 없고, 또 청정하지 않음이 없고, 진실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드러난 만법은 앞에서 말했듯이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 매 순간 드러날 때는 진실하게 존재하지만, 잠시도 머물지 않아 잡으려 하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또 같은 모양도 없고 또 같은 것이 다시 생겨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인연이 다하지 않는 이상 버릴 수도 없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걸핏하면 자신의 본래 성품에 귀의하지 않고, 따로 청정(淸淨)함을 세우고, 따로 진실함을 세워서 바깥 경계만 쫓는다.
이것이 바로 번뇌의 근원이다.
그러니, 자신의 진실한 성품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면 모두가 번뇌가 된다.
그리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만법이 머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하다는 착각을 하는 것에서 생긴다는 말이다. 우주의 어느 것도 머무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즉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것 역시 인연에 의할 뿐,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과 의지조차도 다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인연에 충실하게 되면 청정한 자성과 하나 된 삶을 살게 되고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으나, 그러한 인연을 내 생각대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의지하려 한다면 영원하지 않는 생각으로 영원한 법칙을 움직이려는 것과 같은 허망한 짓이 되는 것이다.
내 맘대로 하려는 생각이 무엇인가?
바로 분별하는 생각이요. 그 분별하는 생각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경험에 바탕으로 된 잣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만 펼쳐지니, 보통 세밀한 이해관계가 없으면 그냥 지나치지만,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생기면 생각과 현실이 어긋나고 마찰을 일으킨다.
그런데 설명하였듯이 집착과 현실이 맞지 않는 것이 다반사(茶飯事)이니 자연히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의지하게 되면 성인이니 범부니 가릴 것도 없이 모두에 번뇌에 오염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성에 의지하여 드러나는 세상사(世上事)와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까지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이 한 법인 자성의 성품을 따르는 고로 비록 매 순간만 존재하고 변해가지만, 그 자체로서는 온전히 법이어서 본래부터 잡스러움이 없고 번뇌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잡으려는 생각이 개입되는 순간 잡으려는 사람의 옳고 그름이 덧씌워져 옳고 그르다는 견해가 갖추게 되고, 스스로의 생각에 속은 우리는 다시 그것이 스스로의 성품이 있어서 영원히 머무는 진실한 것 인양 착각을 하고는, 세상사가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의 근원인줄로 잘못 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고치려 하지 않고, 세상을 고치려하고, 자신에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내면의 세상사 - 오욕칠정)을 고치려한다.
만약 세상사에서 번뇌가 나왔다고 한다면, 즉 성욕이니 식욕이니 수면욕이니 하면서 먹고, 자고, 생식을 위한 행위를 가지고 성스러우니 잡스러우니 하듯이,
자신의 순간순간 일어나는 행동이나 생각들을(이것도 세상사이다.) 번뇌의 근원이라고 하여서, 그것을 고치려 한다면,
배가 고파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며,
추워도 옷을 입지 말아야 할 것이며,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하고,
길을 가도 남이 닦아 놓은 길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하면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이다.
수행하는 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러한 모든 행위를 번뇌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조그마한 일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언짢게 하거나 번거롭게 한다면, '도력(道力)을 소멸(消滅)시킨다'고 말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렇게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그 마음이 시비하는 망상임을 모르고, 거꾸로 세상사(世上事)와 인간의 자연스런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번뇌의 근원이라고 생각을 하니, 참으로 헛되고 헛된 꿈속에 빠져 망상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원각경(圓覺經) 문수보살장(文殊菩薩章)에서
“무엇이 무명(無明)인가?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갖가지로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을 장소를 바꾼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망령되이 오인하여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으로 인연된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으로 삼느니라. 비유하면 병든 눈이 허공 속에서 헛꽃이나 두 번째 달을 보는 것과 같다.”
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전도(顚倒)된 생각으로 도를 구하며 수행하는 이들은, 그들의 몸이 본래는 없었다가 부모가 성욕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또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기특한 짓을 하거나 간에, 그렇게 분별할 수 있도록 큰 것은 부모가 어루만지고 안아준 수고로움으로 자랐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입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로움에서 나왔고, 그 만든 이들의 성격이 모두 제 각각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또 그 입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이루고 있는 그 어느 것 하나하나 조차도, 비, 바람, 해, 달, 그리고 생명 있는 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이,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모두가 모여서 형성되어진 것 인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예부터, 도가 광대하고, 덕이 구비된 부처님께서도, 부모님의 성욕에서 생겼고, 부모님의 어루만짐에서 자랐고, 또 밥 먹고, 옷 입고, 가옥에서 거주하며, 땅을 밟고 걸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요,
그 불조(佛祖)의 걸음걸이 밑에 보이지 않게 많은 중생(衆生)들이(벌레들) 깔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부잣집 가난한집, 착한이든 악한이든, 온전하든 불구든, 바보든, 지혜로운 자이든 가리지 아니하고, 한 집 한집 차례로 탁발하여서, 구별 없이 드신 것을 모르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병든 자나 가난 한 자나 구별 없이 사랑하시고 심지어 자신을 못 박고 창으로 찌른 자까지도 용서하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도, 만년(晩年)에 설법(說法)을 하시다가 등이 아프셔서 누워서 하신 적이 있고, 생노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하신 부처님 역시 육신(肉身)의 죽음(生死)을 피하지 못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세상사가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라고 하며 따로 번뇌 없음을 찾는다면, 앞에서 말했듯이 먹지도 자지도 입지도 말고, 또 덥거나 추워도 피하지 말아야 하며, 남에게 수고로움을 끼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로는 가지도 말아야 할 것이니, 아마 그는 머지않아 죽어버릴 것이다.
아니 그러기 전에 이미 태어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모든 깨달은 부처와 조사와 선지식들이 확연히 깨달은 바는, 원만(圓滿) 청정(淸淨)한 자심(自心 : 自性)이 법계(法界)에 가득 차, 다른 것(번뇌니 수행이니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아니함을 알았고, 그래서 자성(自性)이 가득 찬 법계에는 알음알이가 없어서(오직 법칙과 작용뿐) 번뇌의 근원이 되지 못함을 알았으며, 그리하여 진정한 번뇌는 일어나고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 사라지는 모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번뇌(煩惱)라고 생각하는 알음알이와 분별하는 마음, 즉 미망(迷妄)임을 밝혔을 뿐이다.
그리고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벗어난 것이 생노병사와 오욕칠정을 없애어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분별된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생노병사와 오욕칠정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조 혜능대사님께서 게송(偈頌)으로 설하신,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나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세상사에는 진실이니 진실이 아니니 하는 것이 없다. 다만 진실이 있다면, 진실이니 거짓이니 하고 분별하는 그 마음을 떠나는 것이 바로 진실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시비와 분별이 난무하여 진실이 없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진실을 따로 찾고 있으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그러니 다만 그 분별하여서 진실한 것이 따로 있다고 찾는 그 망령된 한 생각만 내려놓는다면, 세상사는 모두 진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하여 번뇌는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고, 번뇌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번뇌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에서 내가 싫어하는 세상사와 나의 모습에 허물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와 나의 모습을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그것을 따라가고 내치는 한 생각 분별하는 마음에서 일어났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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