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마음이 흔들린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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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육조(六祖) 혜능조사(惠能祖師)께서 오조(五祖) 홍인조사(弘忍祖師)의 법을 전수받고 남쪽으로 내려와
16년간을 사냥꾼 속에서 살던 중,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열린 인종법사(印宗法師)의 열반경(涅槃經) 설법 법회에 참석하러 갔다가
무리 중 두 수좌가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깃발이 흔들린다.”
“아니다. 바람이 부는 것이다.”
하며 시비를 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닌 바로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고 하여 인종법사의 주목을 받아,
16년 만에 비로소 조사의 신분을 드러내어 세상에 나와 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이라는 공안(公案)이다.
바람이 부는 건가? 깃발이 흔들리는 건가?
사실 바람이 없으면 깃발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바람이 불기 때문에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다.
물론 깃발을 흔들면 잠시나마 주위에 바람이 일기는 하지만,
하지만 서있는 깃발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진실은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육조께서 마음이 흔들린다고 했을까?
만약
“깃발이 흔들린다.”
고 했을 때, 두 수좌와 사람들이 늘 그렇게 보듯이 본래 그러한 것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이런 공안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바람이 부는 것이다.”
했을 때도 그냥 그렇게 보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두 수좌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시비를 붙은 것이다.
바람이 불건 깃발이 흔들리건 그냥 자연현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고 그들의 삶과 본질(本質)에 무슨 변화가 있는가?
오히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는 분별만 하나 더 키운 것일 뿐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이런 분별로 인해 연구를 하고 세상의 과학적 진실을 규명하기도 한다. 즉 남들이 가지지 않는 의문으로 사물과 세상일과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절 마당에서 두 수좌가 하는 것처럼 단순한 추측으로 시비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생각이 지은 것으로 추론하여 시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과학적 법칙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하고,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집에 돌아가서 과학적 기초에 의해 연구를 하고 그 근원을 규명한다.
하지만,
절마당의 두 수좌는 자신이 바람이 어떻게 생기는지, 바람이 불면 어떤 원인으로 깃발이 흔들리는지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조금도 없고, 자신이 바라보는 대로, 즉 자신의 생각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을 일러 시비분별이라 한다.
과학자들은 웬만하면 생각나는 대로 추측하여 시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의견이 다르면 먼저 그것의 과학적 근거를 연구하고 그 결과로 이야기하고, 그것은 서로에게 다음의 연구로 나아가는 중요한 자료로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를 한다.
그리고 상대의 말에 자신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돌아가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자신이 간과(看過)한 것이 있는지, 아니면 상대가 잘못된 표집(標集)으로 자료를 모아 실험했는지를 규명한다.
이러한 것은 시비가 아니라 진리를 규명하는 아주 좋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비분별을 놓아라.’고 하는 것은 과학자들처럼 이러한 연구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두 수좌처럼 과학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마치 이 우주의 진리처럼 우기는 그런 우매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을 일러 ‘시비분별을 놓아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흔들린다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깃발이 흔들리면 어떻고 바람이 흔들리면 어떤가?
그것이 그들의 삶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들은 오히려 내가 옳다는 아상(我相)을 드높이려 하다가 상대의 의견으로 인해 불어오는 바람에 서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의 시비로 인해 바람과 깃발처럼 흔들고 흔들리고 있는 줄 알지 못한다.
이 또한 시비분별을 하지 말라는 이유이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흔들리는 것은 세상의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과 우주가 돌아가는 모든 현상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모든 것이 서로 어떤 인연이 있기에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바람이 불기에 깃발이 흔들리고,
또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깃발이 없으면 깃발은 흔들리지 않고,
바람과 깃발이 서로 인연이 되었기에 흔들리고 있을 뿐
그것에 무슨 옳다 그르다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두 수좌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고 시비를 하며 서로를 흔들고 있으니 혜능조사께서는
"그대들 마음이 흔들립니다."
고 말한 것이다.
무념(無念)은 망상심이 없는 것이다.
망상심이 없는 것이란,
분별하고 시비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분별하고 시비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옳다고 내세우고 싶은 아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아상이 바로 한 생각 시비에서 일어난 망상심이니,
그 시비의 망상심이 없는 것을 일러 무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람은 대기의 온도 차이와 기압의 차이로 부는 데, 기압 차이에서는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불고, 온도 차이에서는 온도가 높으면 공기가 상승하므로 그 빈자리를 낮은 온도의 대기가 채우면서 분다.
그래서 기압은 높은 기압에서 낮은 기압으로, 온도는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옮겨가면서 바람이 일어난다.
그러면 높은 기압과 온도, 또 낮은 기압과 온도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기오염? 햇빛? 대기가 있는 장소의 높낮이? 시간? 나무가 많은 지형? 물이 많은 지형?
그리고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여러 가지 원인들...?
그러한 원인이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셀 수도 없는 원인을 우리가 다 밝혀 알아내고 그것을 열거하더라도,
그것이 또
하필이면 그 시점에 일어나고 모이고 사라지는 그 하나하나의 이유를 우리는 절대로 알아낼 수가 없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그 원인들 수 없이 많고,
또 그 하나하나의 원인이 생겨나고 사라질 수 있게 하는
그 수많은 원인들 역시 헤아릴 수 없다.
그렇게 따져 들어가면,
우리는 단순히 바람 자체로만 보면 기압의 차이 온도의 차이라고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압이 왜 그런지, 온도가 왜 그런지, 또 지형에 따라 변할 때 그 지형이 왜 그런지,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하필이면 그날에 그렇게 일어나는지 등등,
그때 거기서 무슨 이유로 바람이 일어나는지는 도저히 밝혀 낼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원인과 동기가 이 우주의 별보다도 더 많아 질 수도 있을지 모를 것이다.
로또는 45개의 숫자로 6개의 숫자를 조합하는 것인데도
그 확률이 무려 800만에 가까운 경우 수가 나오고,
바둑판에서 한 판의 바둑이 생기는데도 그 경우의 수가 이 우주의 원자 수보다 10의 80승이나 많은데 말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일이 일어나는 원인의 수가 이러한데
그 바람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아니 단순히 자신의 느낌만 가지고,
바람이 먼저니 깃발이 먼저니 하고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과연 옳겠으며,
그렇게 해서 이긴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이겠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을 하여 이기려 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고집하는 의견은
그 두 수좌처럼 과학적 자료 없이 단순히 자신의 추측으로 만들어낸 생각일 뿐인데,
그것을 고집하여 누군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답이며 삶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일까?
풍번문답의 공안은 이처럼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하나의 현상을 보고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본 생각이 어떻게 해서 그대의 머리에서 일어났는지를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생각이 그렇게 형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더듬어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가서 나중에는 유전자적인 이유까지 따져야 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이 그렇게 형성된 이유를 과연 밝혀 낼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 하는가?
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내가 가진 생각이라고 하는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물론 반드시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이 우주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과학적으로도 규명이 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는 연기법,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질량보존의 법칙, 운동량 보존의 법칙 등의 상호보존의 법칙이란, 이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엄정한 이 우주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어물쩍하고 넘어가는 것이 없이 너무나 정확한 법칙에 의해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래서 수좌가 시비하는 그 절 마당의 일도 설명하려면
그 깃발이 어떤 인연으로 거기에 세워졌으며, 또 그 바람이 어떤 인연으로 불어왔는지를 설명하려면,
그 앞의 인연, 또 그 앞의 인연...
그렇게 수없이 그 앞의 인연을 규명해나가면 결국은
이 우주가 탄생한 그것부터 설명해야
그런 탄생의 법칙과 작용에 의해 우주가 생기고,
그 우주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의 연기법에 의해 흘러오면서
그 절 마당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인연이 딱 맞아떨어질 때,
두 수좌가 시비를 붙을 수 있는 환경이 생긴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우주에서 티끌 하나 생기고 떨어지는데도 태초부터 그 원인이 있는 것이지 한 인간의 경험과 생각으로 옳다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우주와 이 우주의 법칙인 연기법 없으면 그런 티끌 자체가 생겨나지 않고, 나아가 그렇게 시비하는 두 수좌와, 절 마당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과 육조혜능조사도 생겨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티끌이 생겨난 것은 이 우주가 그런 법칙으로 생겨났기 때문이고, 또 그 인연이 흘러 흘러 그 순간 그때에 그와 같은 티끌이 그와 같은 인연의 장소에서 그와 같은 공기의 흐름과 기압 등이 딱 맞게 생기고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연 없는 중생 없다.”
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인연이라는 말을 마치 어쩌다가 생긴 운수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연이란 어떤 인연이든, 방금 말한 것처럼 티끌 하나도 이 우주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 우주가 그러한 상태로 흘러오지 않았다면 그 순간에 그곳에 티끌이 생길 수도 떨어질 수도 없는 그러한 인연,
즉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오직 그 인연을 말하는 것이다.
왜 부처님께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라 하셨겠는가?
세상에서 나밖에 없다고?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는 이러한 우주가 생기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 생겨나지도 못하는 존재로,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이 우주의 모든 경우의 수가 합쳐서 생긴 아주 귀중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또 그러한 인연을 가진 존재는 이 우주에 딱 하나 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신 것이다.
이 우주는 그와 같이 딱 하나밖에 없는 존재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는 한 순간 한 순간의 손가락 모습과 그 순간에 흘러가는 내 생각과 내 모습은 오직 나만의 인연이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모두 규명하려면 태초부터 일어난 모든 인연을 다 설명하고, 그러한 인연에서 나라는 존재가 갈라져 나온 과정의 인연도 설명해야 가능하다.
즉 내 손가락의 움직임을 설명하려면 그 앞의 인연을 설명해야 하고, 또 그 앞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또 그 앞의 인연을 설명해야 되고, 그렇게 규명해나가면 결국 이 우주가 생기기 이전까지 들어다 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연 없는 중생은 없다.”
라는 말의 진짜 뜻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
의 바른 뜻이다.
다만 위에서도 말했지만, 우리의 생각으로, 또 우리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복잡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모두가 다 이 한 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퉁쳐서 그냥 ‘인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인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방금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은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니까.
그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법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절대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의존관계의 절대적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 의존관계로 만들어진 것은 어떤 모양을 하고, 무슨 색을 가지고, 어떤 무엇으로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바탕의 법칙은 상대적 의존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법칙이라고 하며
그 법칙을 연기라고 하고
그 법칙으로 생성되는 관계를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어느 것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또 그렇게 인연되어 일어나는 그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러면서도 다른 면으로는 모두가 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되면 하든 시비할 것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그냥”
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은 이처럼 본래 이 한 법의 일이고,
이 한 법의 일이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일어나는데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 그렇게”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이 없다.”
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인연될 이유가 있기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 모든 인연될 이유는 다 이 한 법의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럴 뿐, 아무 일이 없다.”
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면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시쳇말로 ‘맥 놓고 살아야한다.’는 말인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맥 놓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면 맥 놓고 살아가는 그것도 무엇인가를 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맥 놓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인연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맥 놓은 상태로 세상을 사는 인연’
을 말이다.
우리는 인연에 응해서 살아도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야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서 살아도 역시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야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해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에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해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세상은 절대로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추측을 하고 살 뿐이고, 삶속에서 큰 일이 없으면 대부분 그 추측대로 일어나고 살아가니, 자신의 추측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아상을 지어 두 수좌처럼 시비로 번질 뿐,
실제로는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다고 살아 펄펄 뛰는 이 몸과 생각을 가지고 그냥 맥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인연 따라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즉 내가 할 것이 없으니 인연을 따르고, 그렇다고 살아 있어 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인연을 살아가라고 하니, 이 둘을 합쳐
“인연을 따라 살아가라.”
고 하는 것이고,
이 말은 마지못해 인연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이든 자신의 인연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삶은
이렇게 해도 인연을 짓고, 저렇게 해도 인연을 짓는 것이어서
자신이 한 일의 결과가 어떤 인연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도 그 인연이 있기 때문이니,
그것 역시 그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지금의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벗어나려고 애를 쓰든, 받아들이든, 둘 다 또 하나의 인연을 짓는 것으로 다음 삶이 다가온다.
그것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운명이고,
또 그러하기 때문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이 한 법이다.
그래서 그냥 살라고 하는 것이다.
시비도 분별도 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다가오는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또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고 싶은 일도 열심히 하면서...
그냥 그렇게 순간순간을 그냥 열심히 살아가라는 것이다.
열심히 산다는 말에 또 오해를 하지 말라.
세속에서 말하는 열심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인연 따라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마음이 흔들린다.’이다.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그냥 그러한 인연이 모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세상사에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저 좁은 개체의 삶속에서 얻은 티끌 같은 경험을
마치 세상의 진리인양 여기고 내세우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 만 원하고, 내 생각에 맞는 것만 옳다고 하면서 분별하고 시비를 하니
그 마음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흔들리면서 수고로울 뿐 아니라
바깥으로도 다툼과 미움과 원망이 쉴 줄 모르기 때문에
제목을 ‘마음이 흔들린다.’고 지은 것이다.
이제 그 마음을 그만 흔들고
그냥 세상일을 보라.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라.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날 인연이기에 일어나고
그 일어나는 것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의 차이가 달라서
서로에게 맞고 맞지 않다고 느껴 옳고 그름이 생길 뿐,
실제로는 받아들이면 맞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 자체는 그냥 그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인연일 뿐임을 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몸도 한 때의 인연으로 생겨나
한 시절을 살다 갈 인연이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일어난 이 생각 역시
한 생각 인연이 모여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도 역시 한 때의 인연으로 생겨나고
역시 한 시절을 살다갈 인연이고,
그렇게 글을 보고 느끼는 그 생각 역시
한 시절 살면서 모은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와 같이
바람이 불건 깃발이 흔들리건
그냥 그러한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졌을 뿐이라고 여긴다면
두 수좌처럼 서로가 옳다고 우기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서 웃고 울며 삶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살면서도
그 삶을 하나의 인연으로 그냥 받아들여 시비하지 않고
또 그렇게 세상일을 보고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망상심을 여읜 것이요.
무심의 삶이요.
바람에도 깃발에도 오염되지 않아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마음이다.
사족:
이 글을 읽으면 어쩌면 깊은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만 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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