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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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실체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055

20-02-29 18:19

본문

깨달음의 실체

 

깨달음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 우주는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고, 연기법에 의해 움직인다.

에너지는 연기법의 법칙에 의해 물질을 만들어내고, 그 물질 역시 연기법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이합집산하면서 다른 물질을 만들어내면서 변화해왔다. 이런 변화가 인류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진화라고 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좀 복잡하지만, 과학적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의 우주탄생설의 가장 유력한 이론이 빅뱅이론이다.

우주는 태초에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0인 상태로 에너지만 가득했다.

어느 시점에 원시우주는 폭발을 하고 짧은 시간동안 급속히 팽창하면서 온도와 밀도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각종 소립자가 태어나는데 그것이 최초물질인 물질과 반물질이라고 한다.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가까이 존재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물질과 반물질은 가까이 있으면 서로 결합하려하고, 결합하면 사라져 에너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우주에서는 물질과 반물질의 대부분이 서로 결합하여 에너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만약 물질과 반물질이 만약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었다면 이 우주는 에너지만 가득한 재미없는 우주가 되었을 것이고 우리 역시 지금처럼 이렇게 인연을 짓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질과 반물질이 10억분의 1의 차이로 물질들이 살아남으면서 지금의 우주가 되는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즉 물질과 반물질의 균형은 10억 개의 반물질에 대해 10억 1개의 물질의 차이로 되어 있어서 10억개의 물질과 반물질이 결합하여 에너지로 돌아갈 때마다 한 개의 물질이 남았고, 그렇게 10억 개마다 남은 1개의 물질들이 모여서 지금처럼 거대한 우주가 생성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은 물질들이 전자(-)와, 쿼크가 생겨나고, 업(up)쿼크2개와 다운(down)쿼크 1개가 모여 양성자(H 수소 원자핵)를 이루고 업 쿼크 1개와 다운 쿼크2개가 모여 중성자를 이루었다. 그리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원자핵을 이루었다.

 

그리고 빅뱅 후 약 30만년의 시간이 지나자 우주의 온도가 3000℃로 떨어지면서 그동안 높은 온도 때문에 원자 내에 전자를 잡아 둘 수가 없어서 원자를 만들 수가 없었는데 온도가 3000℃가 되면서 비로소 전자를 원자 내에 붙잡아 둘 수 있어서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돌면서 원자가 생겨난다.

 

이때까지 우주는 높은 온도로 인한 플라즈마 상태에서 광자가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물질과 빛이 분리되지 않은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그러나 3000℃가 되면서 광자가 빛의 형태로 빠져나오면서 우주에 빛이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이때 나온 빛이 온도 3000℃의 우주 배경복사 에너지이다.

이후 지금까지 빛의 온도는 계속 식어 현재는 절대온도 3도(3K, -270℃)정도의 복사에너지로 되어 있다.

이 에너지는 브라운관 티비가 있을 때 우리가 늘 볼 수 있었는데, 티비에서 하루의 방송이 다하고 애국가가 끝난 뒤, 모든 영상이 사라지고는 지지직 하면서 하얀 바탕에 무수한 점이 오고가면서 나오는 소리와 반짝이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태초에 생겨난 원자가 수소원자인데 수소원자에는 중성자가 없고 양성자와 전자 1개가 결합된 상태이다. 그리고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가 결합하여 헬륨(He)핵을 만들어 지고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이후 별의 탄생과 별의 초신성 폭발 때에 만들어졌다.

 

우주는 이러한 과정(에너지와 연기법)을 통해서 점점 더 복잡한 물질들이 만들어지고, 별이 생기고, 은하계가 만들어지고, 지구가 있는 태양계가 만들어지고, 지구가 생겨나고, 어느 날, 외계에서 왔던지, 무기물질이 빛과 열의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졌든지, 기초단백질인 아미노산이 만들어지면서 생명이 탄생하게 되고, 점점 변화 진화하면서 지금의 인류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거꾸로 되돌려보면 결국 남는 것은 에너지와 연기법이요 지금 우주의 근본인 것이다.

 

이 에너지와 연기법은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벌레, 나와 식물, 나와 사자, 나와 토끼, 나와 먼지, 나와 썩은 것들, 나와 건물, 나와 공기, 나와 하늘, 나와 별, 나와 은하, 나와 우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똑같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근본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비록 그 생긴 모양은 다를지라도,

 

그리고 에너지와 연기법은 모양도 형체도 없다. 텅 비어 있다.

하지만, 그 텅 빈 것에서 모든 우주가 나왔다. 텅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이 그 속에 존재함이 가능하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 : 색이 바로 공이요, 공이 바로 색이며,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색과 다르지 않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성과 물질이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나와 본성이 둘이 아니며, 내 속의 어떤 곳에 본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삶의 일거수일투족, 세포 하나하나가 본성 그 자체이다.

그리고 또한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이 본성을 여의지 않아 나와 대상이 비록 모양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하나이다.

나와 타인이 하나이고, 나와 벌레가 하나이고, 나와 식물이 하나이도, 나와 동물이 하나이고, 나와 미생물이 하나이고, 나와 물질이 하나이고, 별 은하 우주가 모두 나와 하나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어떤 기록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깨달아 있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다.

본래 있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얻은 것이 없다’(無所得)란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첫째 깨달음이다.

 

에너지와 연기법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에너지가 물질이 되려면 연기법이 작용해야하고, 연기법이 작용하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가 있기에 연기가 작용하는 것이요, 또한 연기가 있기에 에너지가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아니다. 하지만, 에너지는 에너지요, 연기법은 또한 연기법이다. 그래서 또한 하나도 아니다.

 

에너지와 연기법은 이 우주 어느 곳에도 있다.

티끌 속에도 작용을 하고, 거대한 별에도 꼭 같이 작용을 한다. 마치 우주 배경복사처럼. 그리고 어떤 것이든 서로 인연이 되어 새로운 것이 되려하면 그대로 되어 지게 해준다.

이처럼 우주의 모든 모양과 움직임이, 그 모습 그대로, 그 움직임 그대로, 바로 에너지와 연기 그 자체이다.

 

그래서 옳고 그름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선도 악도 없고, 존귀한 것도 비천한 것도 없이 모두 평등하다. 그래서 어떤 것을 취하려고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들에도 자신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내가 없고 분별이 없다.

 

그리고 형체와 모양이 없고 에너지와 연기법 자체는 조금도 변화가 없기 때문에,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바로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그래서 늙음과 젊음도 없고, 생도 없고 사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부처를 바라지도 않고, 불경을 외우지도 않으며, 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담지 않는다.

 

이 에너지와 연기가 바로 우주 만물의 본성이요, 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은 우리의 본마음과 같아, 이 마음은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으며 우리의 육체는 나이를 먹으나 이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 병들지도 않는다. 그 마음은 좋고 나쁨이 없어 마음위에 일어나는 생각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든 간섭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생각이라고 따라가지도 않고 나쁜 생각이라고 배척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의 분별하는 생각이 그렇게 좋다 나쁘다 할 뿐이다. 하지만, 그러는 것조차 마음은 분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아름다운 생각이나 흉측한 생각이나 아무런 걸림 없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분별하는 그 한 생각이 그것을 옳다 그르다 할 뿐이다.

그래서 마음은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으며 존귀한 것도 없고 비천한 것도 가리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대한다.

 

그런 고로 깨달음은 내가 비록 눈병이 나서 허공에 헛꽃을 보고 생각은 분별에 떨어진 것일 뿐, 내 마음은 한 번도 본성을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본성을 벗어나 적이 없는 것은 본성이 나란 개체에 들어와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달이 연못에 비칠 때에 비록 작은 연못이지만, 달의 모습을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게 그대로 비치듯이, 본성 또한 나란 작은 개체 속에 들어왔지만, 그 속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본성이 변하여 내 몸을 이루고 작용적으로 본성의 움직임에 내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잘못해도 본성이 하는 것이요. 내가 잘해도 본성이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이 내가 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본성이 하는 것일 뿐 다른 일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본성인 에너지와 연기에 의한 것이고, 연기는 바로 인연을 이루는 법칙이니 바로 인연을 말한다.

그래서 욕심꾸러기가 욕심을 낼 때 그런 유전자를 받은 것도 인연 때문이고, 또 그런 성격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 살아온 것도 역시 인연이요, 지금 내가 무엇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쓰도, 그것 역시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인연으로 쌓여진 것들에 의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어머니 태속에 씨알과 같았을 때에 지금처럼 이렇게 애를 쓰고 노력할 수 있겠는가?

그때에 없었던 내 개성이 지금에 생겼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왔을 것인가? 모든 것이 인연이 하는 것이다. 내 몸도 인연으로 만들어졌고, 내 생각도 인연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도모하여 일이 되는 것도 역시 나를 둘러싸고 나의 일이 되게 해주는 인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 팔려고 해도 물건의 재료를 생산하는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하지 못할 것이며, 또 그것을 사려는 사람이 없으면 팔지를 못할 것이다. 더 돌아가, 내가 노력하고 생각을 내는 것 역시, 내가 어릴 때에 없었던 지식이라면 반드시 어디선가 얻어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연에서 벗어날 것인가?

 

그리고 그 모든 인연이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에너지이다.

이 본성인 큰 ‘나’가 이 작은 나를 움직이고 있고 이 우주를 움직이며 그 움직임은 인연의 틀에 한 치도 벗어남이 없도록 흘러가게 한다. 그러니 ‘나’라고 할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알면 겸손해지지 말라고 해도 겸손할 수밖에 없다.

 

그대가 만약 이 글을 보고 개체적인 자신이 없고 그 개체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처음에는 허탈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 역시 그대가 그 동안 인연에 의해 배워온 지식으로 추론한 생각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진실로 그대가 이 사실을 알 수만 있다면 허탈하고 허망한 생각은 한 순간뿐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인생이 원래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며 평화로운 것인지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즉, 태어나서 애를 써서 노력할 필요 없이 인연 따라 한 세상 즐겁게 놀다가 가면 되는 것이다.

 

놀다가 간다고 해서 또 한 생각을 내지마라. 논다는 말은 분별하는 생각에 따라 자신의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고, 또 그것이 되고 안되고에 따라 일희일비하거나 번뇌나 고통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과 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인연이 되지 않는데도 내 맘대로 놀아간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놀다가 간다는 뜻은,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것도 내가 그런 유전자를 받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탓에 생긴 적성이나 취미나 특기 때문이니 그것은 인연에 의해 얻은 것이요, 그것을 했을 때 오는 결과 역시 인연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니, 내게 인연되어 오는 삶을 받아 그에 필요한 일을 하거나 때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한다.

 

그냥 주어진 게임을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못 이뤄서 고통과 번뇌에 빠져 애를 쓸 것인가? 그대가 바로 본성이요, 본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면 결과에 그렇게 목을 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절로 욕심이 사라지고, 교만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한도, 원망도, 미움도, 고통도 모두 사라진다. 그에게 무슨 번뇌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야 죽는다. 절대로 인연이 다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반대로 살아 있을 때까지 살아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병은 마음에 욕심이 없고 번뇌가 없고 자유로운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그리고 내 마음이 바로 본성이요, 내 몸이 바로 본성인데 나의 개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내가 사라질 것인가? 누가 말했다. ‘건물이 무너진다고 허공까지 무너지겠는가?’라고 말이다. 그것을 아는 자에게 생사(生死)란 무슨 의미이겠는가?

 

이것을 알고 텅 빈 마음으로 때에 따라 일하고 쉬고 먹고 자면서 살아가는 것이 완전한 깨달음이다. 그런 자에겐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번뇌가 없다.

 

이 완전한 깨달음은 본성을 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그 본성이 바로 에너지와 연기법이요, 텅 빔이요, 내가 그것임을 아는 것이다.

 

본성을 본다는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쓴 글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대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이 글을 통해서도 본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표현되는 말들은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본성을 보는 것은 오직 그만이 알 수 있고, 그만의 세계이다.

즉 내가 나인 것을 아는 것은 이해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아는 것을 본성을 본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로 살아가듯이 그렇게 본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깨달은 자의 삶이다.

 

본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우주 만물의 삶이 바로 본성이요,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본성이니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삶을 분별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깨달은 자의 삶이요 무사인(無事人)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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