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모든 것에는 이유가 없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940

20-03-19 19:36

본문

사람들은 자성이 언제 생겼느냐? 무엇 때문에 생겼느냐?

무명이 언제 생겼느냐? 무엇 때문에 생겼느냐?

분별은 언제 생겼느냐? 무엇 때문에 생겼느냐?

라는 물음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게 이유를 묻는다.

 

그것은 세간 법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니 세간의 법도 원래 이유가 있는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유가 있다고 여기고 또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이유가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단호하게 말하건대, 진여나 자성에는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 역시 이유가 없다.

그리고 세간의 일은 모두 이 한 법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이 한 법이 없으면 세간이라는 것 자체가 생겨날 수 없다. 그래서 세간의 일도 사실은 이유가 없다.

 

이 우주 삼라만상에서 이유가 있다면 오직 이 한 법의 인연이 있을 뿐, 우리가 따져 고칠 수 있는 그런 유동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세간에서 궁금한 모든 것의 답이 다 이 진여자성(眞如自性), 즉 이 한 법에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법에는 세간 사람들이 궁금해 할 요인도 가지고 있고 궁금함에 대한 모든 답도 가지고 있고, 또 그것 사이에서 갈등할 수 있는 요인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이는 이 세상이 이 한 법과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생겨나고 그 법칙과 작용으로 흘러가기 때문으로 모든 답이 이 한 법에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탄생 이유는 부모님이다.

그러면 부모님은 어떻게 만났을까?

내가 태어날 당시에는 연애는 인간 말종(末種)이나 하는 짓이라 여기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중매를 통해 부모의 결정으로 결혼한다.

 

그러면 그 중매한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으면 하필이면 왜 그때 우리 부모가 있는 줄을 알게 되었을까?

그 당시에도 직업적인 중매인이 있지만, 그 시대에는 보통 지인(知人)들이 중매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 우리 부모의 부모, 즉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그 지인들과 인연이 되었으며, 하필이면 우리의 부모가 결혼할 당시가 아닌, 그 이전에 인연이 되어 부모의 결혼에 영향을 주었을까?

만약 부모가 결혼하고 난 뒤에 그 사람들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사람들을 알았다면 과연 부모가 결혼을 했으며 내가 과연 세상에 태어나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는 인과론(因果論)과 연기론(緣起論)의 문제다.

 

사람들은 연기론에 대해서는 대부분 관심이 없다.

아니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인과론은 대부분 안다. 그래서 대부분 인과론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인과론은 연기론의 한 부분을 잘라놓은 것이다.

즉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착한 인을 지으면 선한 과(果)를 받고, 악한 인을 지으면 악한 과를 받는다.’

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세상일이 그렇기만 하던가?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인과론을 따지는 한계도 그 일을 당한 그 사람의 생각으로 역추적할 수 있는 부분까지일 뿐이다.

즉 사람들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그것도 감정이 들어가면 들어가기 싫은 것은 ‘모르겠다.’하고 퉁 치고, 좀 파고 싶으면 좀 더 깊이 들어가는 제 맘대로의 한계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으로 세상의 일을 아는 것처럼 여기고는, 삶 속에서 자기가 생각하거나 원하는 부분의 몇 가지만 고치면 개인의 인생과 세상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런 몇 가지로 우리의 삶을 고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만약 밤에 소주 한잔 하고 싶어서 25시편의점을 다녀왔는데, 편의점을 가기 전에 티브이를 보다가 그것을 켜둔 상태로 다녀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티브이에서는

편의점을 가기 전의 프로그램은 끝나고 다른 내용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가기 전에 재미있게 보던 내용이라 편의점을 다녀오면서도 그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거나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도 가지고 있었는데,

돌아오니 그 사이에 그 프로는 끝나고 다른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전의 것에 대한 궁금증에 대한 여운이 있겠지만, 길고 짧음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편의점을 다녀오면서 그 생각들이 희석되어 버린다.

물론 그 중에 그것이 너무 궁금한 사람은 나중에 유튜브나 방송다시 보기를 통해 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역시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하지만 결국 편의점을 가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상황을, 소주 한잔 먹고 싶다는 그 한 생각 때문에 가십 같은 일이지만 뭔가 삶이 바뀌었다.

물론 우리는 바뀐 삶을 절대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들에 있어 큰 일이 없는 이상 별로 문제를 삼지 않고 삶이 변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당시 내가 빚을 지고 도망 다니고 있었는데, 하필 그날따라 빚쟁이가 그 근처를 지나다가 담배를 사러 오던 중 멀리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무슨 문제가 생겼을 것이고,

나는 그 결과를 안다면 그날의 내 행위를 후회했을 것이고 문제를 삼았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다.

우리는 대부분의 삶이 매일 그날 같으니 ‘평상시’라는 단어를 쓰지만, 그 평상시와 같은 날도 어느 날 인연에 따라 그것을 깨뜨리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그 사람에게 빚을 진 것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하필이면 그날따라 내사 소주가 먹고 싶었고, 또 하필이면 그날따라 그 사람이 그곳을 지나는 것은 인과론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인과론의 한계를 이성적으로 따질 수 있다면 그는 세상사를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도 넘어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이 법, 즉 세상의 근원까지 가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은 인드라망으로 엮여 있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세상과의 인연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그러냐고 묻거나 코웃음 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그러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는 그냥 가만히 있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 생각의 변화는 과거에 지은 여러 가지 생각의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인연의 삶을 생각 속에 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로 나오려면 분명히 그 생각을 건드리는 인연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기도 하고 때론 목덜미가 가려워 긁기도 하고, 갑자기 배가 고프거나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고, 화장실을 가고 싶을 수도 있으며,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뜬금없이 소주한잔을 먹고 싶은 생각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과연 그냥 일어날까?

이러한 모든 일들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몸을 가지고 있으니 몸속의 기관들의 움직임에 따라 가려울 수도 있고 발이 저릴 수도 있고, 숨이 답답할 수도 있으며, 배가 고플 수도 있고 입이 궁금해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분명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조차도 할 수 없으므로 이는 분명 몸과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처럼 우리는 오늘 하루의 기분이 그날의 기후에 따라, 또는 옆집 개가 너무 시끄럽게 짖어 성질이 사나워져 변할 수 있고, 또 그 때문에 잊었던 일이 생각나 더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와 상관없는,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의 일이 뉴스에 나와 그 때문에 내 생각이나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러함이 우리의 인연이요 삶이다.

 

왜 이런 것이 일어날까? 무엇 때문에?

이 물음은 결국,

자성이 언제 생겼느냐? 무엇 때문에 생겼느냐?

무명이 언제 생겼느냐? 무엇 때문에 생겼느냐?

분별은 언제 생겼느냐? 무엇 때문에 생겼느냐?

라는 물음과 같다.

 

왜 일어날까?

소주가 먹고 싶은 날의 일로 예를 들면

첫 번째는 내가 소주 사러 가기 전부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는 것.(그 이전의 인연, 즉 왜 티브이를 봤느냐하는 것까지는 머리가 아프니 여기서부터 )

두 번째, 편의점을 갈 때에 티브이를 끄지 않았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지금도 티브이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티브이가 고장이 나지 않았고, 방송국도 24시간 방송을 하고 있고, 또 한전 역시 별 탈 없이 전기를 계속 공급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방송국의 인연을 보면

첫째, 사람들이 세상일을 궁금해 한다는 것

둘째, 그것을 채워주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셋째, 그 욕심을 채워줄 장비와 통신이 생겨났다는 것과 그러한 방송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준 곳이 있다는 것 등등이다.

 

간단하게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했지만 세상은 이런 식으로 인연되어 흘러간다.

 

다른 말로 하면 수요와 공급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불교적인 용어로 인연, 즉 이 세상은 연기적으로 엮여 있다는 것이다.

즉 주와 객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비유는 비록 지구 속의 이야기지만, 이런 식으로 인연을 엮어 나갈 때에 우주 삼라만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앞뒤만 살피는 인과론적인 사고로

‘세상이 왜 이럴까?’

아니면,

‘왜 그렇게 이십사 시간 방송을 할 까?’

라는 물음을 가진다고 그 모든 인연의 일을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좁은 의식으로 그것을 다 설명할 수가 있으며 혹 설명한다고 해서 알 수가 있을까?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금 이전의 몇 단계는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설명이 될까?

만약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서로 옳다 그르다 하며, 또 세상사가 시끄러울까?

 

부처님께서도 그것을 알기 위해 6년의 고행을 하였고, 그런 식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음을 깨닫고, 니란자라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수자타가 주는 우유죽을 받아 마시고, 그리고는 보리수 아래 앉아 고생했던 모든 것을 쉬고 있을 때,

새벽에 늘 뜨는 그 샛별이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을 보여준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누가 원하지도 않았고, 누가 조작하지도 않은데, 그때만 되면 늘 거기서 비추는 샛별, 그처럼 이 우주는 뭔가가 그렇게 움직이는 하나의 법칙이 있음을 부처님께서는 그 샛별을 보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말하는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는 연기법(緣起法)이다.

 

이세상은 절대로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모두가 서로 인연이 되어 흘러가는 것뿐이고, 그 이유 역시 드러난 개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한 법이 본래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처럼 이 세상은 어떤 것이든 서로 인연이 되어 함께 흘러갈 수밖에 없는 내재적 요인을 가지고 생겨나고 그렇게 흘러간다.

 

즉, 모든 것이 물고물리며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인연의 선후(先後)는 있을지언정, 선후를 운명 짓는 어떤 것도 없으며, 또 그러한 요인에 우열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히 법칙이 있고 너무나 한 치도 벗어남이 없이 딱 맞아 돌아가고 있으면서도,

약산이

“그냥 앉아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

라는 대우선사의 물음에

“천성인 와도 모릅니다.”

라고 하였듯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것으로 세상만법이 그렇게 연결되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알 수 없을까?

이 세상이 이 한 법으로 생겨난 태생적 한계로 이 한 법 이전의 상태는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아기가 생기고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고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알지만, 내가 왜 그때에 그런 인연으로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생이 어떠니 하는 사람들은 이 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전생이라는 것 자체가 없지만, 또 있다 하더라도 이 한 법만 있을 때는 개체적인 존재가 없으므로 그 이전의 전생은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말을 듣고, 어떤 이는 내 말을 지적해서 모든 것이 이 한 법에서 나왔다면 나도 이 한 법인데 이 한 법으로 전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일체가 한 법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니 개체적인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하고 또 전생이 어떠니 하고 따지는 모순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개체적인 존재이나 이 세상은 인연 법칙이요, 이 한 법, 즉 진여자성(眞如自性) 그 자체이므로, 약산이 말한 것처럼 개체적인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한 법이, 세상만법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이미 자리를 다 펼쳐놓은 것이 바로 이 우주 삼라만상이요, 우주 삼라만상에 있는 모든 것이고, 매 순간의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온통 이 한 법밖에 없고, 또 오직 이 한 법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는 이 한 법이 하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 법계라는 경기장에 법칙과 규율을 이 한 법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무엇도 그것을 비켜갈 수가 없고, 그것이 바로 인연의 일이다.

 

그 인연으로 지금 내가 이글을 쓰고, 여러분들이 읽고 있고, 또 이러한 인연으로 나와 여러분의 삶에 조금은 변화가 생기고 그렇게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세상의 일이요, 여러분의 일이요 나의 일이요, 모두의 일이다.

 

이처럼 한 개체가 개입될 수 없는 일이 이 한 법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또 그러한 일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그래서 내가 ‘모든 것에 이유가 없다.’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이 한 법의 다른 이름이 자성(自性)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또 이렇게 묻는다.

“자성이 왜 그러합니까?”

또는

“자성이 왜 생겼습니까?”

 

묻는 말에 이미 답이 있지 않는가?

 

자성이 무엇인가? 바로 스스로의 성품이다.

스스로의 성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성품이라는 말이다.

그 성품이 이 세상을 만들고, 그 만든 것이 그 성품 자신인데, 그리고 오직 그것밖에 없는데, 누가 누구에게 물어서 왜 만들었느냐고 한다면 그 물음이 정당하겠는가?

즉 묻는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묻는 말에 답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법에 딱 하나의 법칙이 있는데, 모든 것은 그 인연의 무게만큼 서로 영향을 주어 다음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밝히신 연기법(緣起法)이다.

 

이처럼 모든 일이 딱 그것을 내는 인과 연의 무게만큼으로 엮여서 생겨나 사람들과 세상의 일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 연기법이 사람들이 굳이 이 한 법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이유이고 답이라면 답이다.

 

그것을 말한 것이, 술 마시고 싶어 편의점에 간 일, 부모님이 그렇게 만난 일 등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자성(自性)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을 지은 것이고, 이 우주 삼라만상은 이 한 법인 자성, 즉 스스로의 성품으로 생겼고 또 스스로의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하니 스스로의 성품이 왜 생겼으며 왜 그러냐는 말이 성립이 되겠는가?

스스로 그러한데...

 

그런데 이 한 법의 자성이 원만하다면,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자성으로 생겨나듯이 자성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난 시비분별은 왜 사람들을 원만하게 하지 않을까?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스스로의 성품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 우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 스스로의 성품을 넘을 수가 없다. 그리고 스스로의 성품은 분별을 하든, 하지 않던, 이쪽으로 치우치든 저쪽으로 치우치든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뿐더러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이처럼 일체가 스스로의 성품이기에 어떤 것이든 불가능할 것이 없으므로 그 개체의 인연에 따라 스스로 분별도 한다.

 

하지만 분별은 스스로의 성품이 자리를 펴놓은 곳에서 놀고 있는 것이고, 그 자체가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 이외에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생의 이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분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제까짓 것이 아무리 뛰고 굴려봐야 이름이 분별이듯이 한 쪽만 받아들이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스스로의 성품인 자신이 태어난 곳, 즉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이놈은 자신의 근본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또 다시 시비분별에 빠질 뿐, 절대로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시비분별이 있는 한 시력이 앞을 보지 못하는 단계인 0과 같기 때문에 1.5의 시력을 가져야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이 시비분별을 멈추라고 하는 것이다.

시비분별을 멈출 때 비로소 눈을 가리고 있던 그 막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시비분별 하더라도 그 존재의 실체는 이 한 법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궁금증은 시비분별에서 일어난다.

이 세상은 본래부터 오직 하나의 법으로 원만 구족한 세계여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 개체에 갇힌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다보니, 우리라는 존재를 세상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개체적인 활동과 환경과 다르면 틀렸다 하거나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문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이 법을 깨달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분명 다른 사람들인데

왜 그들은 인연 따라 살아가라고 할까?

 

그리고 왕자의 신분으로 그 당시에는 누구보다도 좋은 선생에게서 좋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고, 출가에서 깨달음까지 얻은 부처님께서도

왜 세상은 연기로 이루어져 있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셨을까?

 

그리고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날 밤 겟세마니 동산에 올라 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내일 죽을 것을 예감하고는 피땀을 흘리며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제게서 멀리 하옵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라고 아버지의 선택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을까?

 

예수님이 말하는 아버지는 인격화시킨 것으로 이 한 법을 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깨닫고 나면 시비분별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하고 따지고 분석해도 결국은 이 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체적인 존재를 중히 여기면 설사 세상이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이해되기를 고집하고, 개체적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을 다 겪을 수 없으니 궁금하면 할수록 문제는 오히려 더 꼬여갈 뿐이다.

즉 궁금할수록 궁금증만 늘어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결국 그 궁금증이 분별하기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세상의 일로 간단하게 설명하면,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서 때론 다른 사람은 궁금해 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관심도 없다.

그 이유는 그 물음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개인적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의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문은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에 일어날 뿐, 아무리 그래도 이 한 법은 우리의 의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한 법이 흔들리지 않아 우리의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한 의문을 던져서 그러한 것이 풀리지 않으면 마치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이 여겼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무 일없이 세상은 돌아간다는 것은, 이 한 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직 의심하기에 의심이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성품은 어떤 짓이든 허용하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건 그가 분별하면 분별하도록, 분별 안하면 분별하지 않도록, 그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만약 오직 한 법의 세상에서 이 한 법이 사람들이 시비분별 하는 것을 못하게 했다면 우리의 뇌는 아예 시비분별 하는 기능을 싣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 또한 분별하는 놈이 분별하는 증거다.

 

즉 이 한 법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 다 받아주고 시비하지 않는데, 한 개체에 갇힌 좁은 소견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분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한다.

자성이 분별하는 것을 허용을 하지 않으면 분별하지 않을 것 아니냐?

 

보통 못난 자식이 나중에 철이 들면 부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잘 한다.

“왜 그때 나를 말리지 않았어요?"

참...! 부모의 가슴에 얼마나 큰 못이 박히며 또 억장이 얼마나 무너지겠는가?

 

누가 그러라고 했는가?

부모는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해 주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하지 말라는 길은 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그 길을 선택해 놓고는 부모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부모는 그러지 마라고 수없이 말렸다. 그러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한 법도 역시 우리가 분별하기에 못 봐서 그렇지,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가 인연을 짓는 대로 세상일이 일어나도록 해주며 얼마나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분별하지마라고 우리의 내면에서 계속 호소하며, 분별하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아픔보다 얻는 것에 대한 욕심이 더 커서 이 한 법의 자비를 알지 못하고 대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한 법은 부모가 해 주실 수 있는 것보다는 상상할 수조차도 없을 만큼 우리에게 해 주었고,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이미 그렇게 마련해 놓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하듯 애를 썼지만, 사람들은 끝내 자신의 문제에 갇혀서 결국 이 한 법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그렇게 의심에 빠지고 고통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세간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 많이 일어나는 충돌이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없는데도 사람이 의문을 가지고 그 하나하나에 이유를 달고 따지며 좋고 나쁨을 가리면 결국 그것으로 받는 고통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이다.

오직 이 한 법으로 태어나 부족한 것이 없는 우리에게는 분별이란 것이 붙을 곳이 없다. 다만 한 생각이 개체의 한계를 벗지 못하고 세상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 분별하기에 분별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분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분별에게 조차도 자리를 내어준 이 한 법이 어찌 분별이 있겠는가? 스스로 분별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분별이 붙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이 분별하지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이 스스로의 성품은 너무나 자비로워서, 괴로워하면 괴로워하는 놈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괴로워하도록 내버려둔다. 오로지 인연과 선택을 그에게 맞기는 것이다.

 

그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의 법칙을 분별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공평하게 적용하여 분별하면 분별도 인정하고 그것으로 고통 받으면 또 그대로 둔다.

이것이 또한 이 한 법에 시비분별이 없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처럼 자성은 모든 것을 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사람은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분별하여 분별을 일으키고, 그러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고통이니 고통 역시 스스로 고통을 느끼기에 고통스러울 뿐이다.

 

이처럼 이 한 법의 세계에는 의문이 일어나는 그 모든 것에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의문이 바로 답이기 때문이다.

 

즉 의심하기에 의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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