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산 자와 죽은 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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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금 산 자와 죽은 자라라고 하는 것은,
숨을 멈추어서 시체가 된 자는 죽은 자이고 숨을 쉬고 있는 자가 살은 자라는 말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숨을 쉬며 살아있지만, 그 속에 살아 있는 자가 있고 죽은 자가 있기에 한마디 해보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산 자는 자신의 현재를 살고 있는 자이고, 죽은 자는 자신의 현재가 아닌 자신의 관념이나 바램에 사는 자이다.
내가 예전에 택시기사로 밥벌이를 할 때의 경우를 들면,
어떤 날, 한창 바쁘고 장사가 잘 되는 날, 기본요금 가는 거리를 그것도 골목골목으로 가자고 하는 손님이 탈 때가 있다.
그렇게 그 손님이 가자고 하는 길을 가면, 그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놓치게 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심통이 일어난다.
“빌어먹을, 이 한창 바쁜 때에 이런 손님이 타 가지고 안 그래도 한참동안 장사가 안 되다가 좀 되려고 하는데, 참 재수 없게 시리...”
하는 심통이 나는 것이다.
여기서 산 자와 죽은 자의 모습이 나온다.
물론 이럴 때 나의 바람과 같이 골목을 안 들어갈 수 있다면 그 당시 상황에서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의 현실은 골목을 들어가는 것이고, 또 거부하면 승차거부로 벌금을 물어야 하고, 손님과 다투어야 하니 오히려 더 손해가 난다.
그래서 아무리 심통을 부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그때의 현실이다.
이럴 때, 잠시 심통이 났다 하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심통을 거두는 것,
이것이 바로 산 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골목을 들어가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계속
“빌어먹을...”
하면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면,
자신의 분풀이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삶은 있지도 않는 죽은 삶을 사는 자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산다면 그는 끊임없이 양변에 매여 있는 갈등 속에 살아갈 뿐, 그의 삶에는 평화가 없다.
도(道)도 마찬가지다.
도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도가 삶을 떠나고 삶이 도를 떠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도를 떠난 삶이 없고 삶을 떠난 도가 없다.
사람들은 마치 삶은 여기에 있고 도는 저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에 드러난 것, 그것도 매순간의 현실이 바로 도가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도라는 것은 매순간 살아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꿈속이나 생각 속이나 희망 속의 어떤 특별하고 대단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도를 구하는 마음은 자유를 구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의 삶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도는 지금의 삶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삶은 도가 없으면 생겨날 수가 없다.
다만 그 삶은 우리의 생각 속의 삶이 아니라 인연으로 흘러가는 매 순간의 현실을 말한다.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비유를 들 때에 말했듯이 현실을 사는 자와 생각의 삶을 사는 자로 비유를 든 것이다.
도는 요술이나 마술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마음으로 도를 구하고, 그렇게 깨달은 삶은 자신의 이익과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달라 이익과 손해가 서로 다른데 그것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어찌 나만 행복하고 자유롭게 될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라.
그리고 지금의 자신의 형편에서도 끊임없이 시비하고 분별하며 자유롭지 못한 자가 나중에 도라는 것을 깨우쳐서 산다고 해서 그 바람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깨달은 도가 지금의 자신에게 무슨 도움을 주며 자유를 줄 것인가?
도를 깨치지 않더라도 그 손님이 골목을 들어가자고 할 때 골목을 시원하게 들어가는 것이 자유롭겠는가?
아니면,
골목을 어차피 들어가면서 계속,
“안 들어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하고 그림만 그리고 있다면 그 모습이 과연 더 자유롭겠는가?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있지도 않은 세상에 매여서 현재에 투덜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실이든 현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자유요 주인 된 삶이다.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자유라는 그림은, 아무리 화려한 생각으로 그려봐야 그것은 환상일 뿐 현재에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어리석은 바람일 뿐이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현재를 살지 못하니 죽은 자의 삶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생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물이 흐르듯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르는 생각들 중에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 그러한 것들과 관계없이 좋고 나쁨이 없는 무기(無記)의 것들,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일어날 때에 일어나자 하는 생각,
밥을 먹을 때에 밥을 먹자고 하는 생각
어디를 가자고 할 때에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생각,
즉, 자신의 습관대로 그냥 행하는 것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 생각에 이어 그것이 내 맘에 드는 것인지 안 드는 것인지 시비하는 생각,
그리고 결론을 내기도 하고 던지기도 하고, 결론 낸 것도 다시 들고 이런 저런 하는 생각 들..
우리의 생각이 하는 짓이 이렇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무엇에든 인연이 되면 일어나는 우리의 현재의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또 인정을 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무심코 떠올린 생각이 기존 생각의 가치나 잣대에 맞지 않으면 금방 태클이 들어온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아... 난 아직도 멀었어.”
등등 자신을 탓하고 쥐어뜯는 생각들이다.
기존의 생각들이 방금 일어난 그런 생각에 즉각 징벌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라.
떠오르는 그 생각이 현재인가?
아니면,
떠오르는 그 생각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그 기준이 현재인가?
떠오르는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인연이 되면 일어나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 순간의 현재인연으로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시비하는 생각은 현재의 생각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으로 마든 잣대의 생각이다.
물론 판단하는 그 시점은 현재이지만 그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내용이 과거의 것이란 말이다.
우리의 생각은 어떤 큰일을 겪거나 교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는 계속 반복되는 생각들은 중요하다고 여기고 저장을 한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잣대를 삼아 매 순간 일어나는 생각에 스핑크스처럼 잣대에 맞지 않으면 자르거나 더 복잡하게 키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인연으로 만든 것으로 이미 지나간 것이어서 지금의 것과 맞지 않는 죽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새로운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변하며 흘러가기 살아있는 삶이기 때문에, 과거의 것을 아무리 닦고 기름칠해서 갈무리를 해놓는다고 해도 그와 같은 상황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맞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언젠가 쓰일 것이라고 여기면서 머릿속에 소중하게 저장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인연의 변수가 너무 복잡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상황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의 장롱만 비좁아질 뿐, 그것으로 인하여 자유가 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나를 끊임없이 시비하고 판단하고 질책할 뿐이다.
그래서 장롱이 비좁은 사람은 참 고민이 많다.
그리고 마음에 드느니 안 드느니 하고 가리는 것도 왜 그리 많은지...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결코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는 것이 많아서 자신을 옳아 매는 장애가 더 많아질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눈을 의식하여 스스로는 조그마한 자유도 없으면서도, 자신이 마치 무언가 알고 있다는 생각과 또 공부를 오래 많이 한 공덕이 아깝고, 또 그것이 자랑스러워 그 앎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앎이 별로 없지만 천진하고 자유롭게 사는 이를 무식하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정작 자신은 자신이 아는 것대로의 백분의 일도 살아가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분별하는 생각은 늘 그 잣대를 버리지 않고 마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들고는 아무데나 휘두르면서 지금의 생생한 삶을 부정하고 질책한다. 그러면서도 이놈은 자신이 마치 영원히 써 먹을 수 있는 가치기준이라고 착각하고는 그 짓을 그만 둘 생각이 없다.
이처럼 이 시비분별하는 생각은 경험이 많고 아는 것이 많다는 그 하나만으로, 또 그렇게 배운 과거의 죽은 연장을 깨끗하게 닦고 갈무리했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 자신이 현재에도 늘 써먹을 수 있을 만큼 날이 성성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자신이 철모르는 지금의 생각을 고쳐서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줄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그렇게 소중하고 대단한 앎을 가진 자가 왜 진작에 자유와 평화를 얻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유와 평화를 얻으려고 그 앎에 다시 앎을 더하고, 또 그런 앎을 가진 자신을 그렇게 잣대로 두드려 패고 있는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진정한 살아 있는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과연 그러한 일이 일어날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호사가(好事家)들은 옳다구나 하고 덤벼든다.
“그럼 병이 들어도 고치지도 말고,
배가 고파도 먹지도 말고 굶어죽어야 겠네...”
등등으로 비판하기 좋아하는 말로 말이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병이 들었으면 당연히 고쳐야 하고, 배가 고프면 당연히 밥을 구해야한다. 그리고 삶 속에서 고통과 힘 드는 것은 되도록 제거하여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은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볼 때에, 도저히 이러한 상태로서는 견디기 힘들고, 또 직장에 나가기가 싫고, 또 부부로서 살 수도 없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도 분명히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것처럼 자신의 현재의 상태로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에도 그곳에서 억지로 견디라는 말이 아니다.
도저히 생각해서 아니라고 여겨질 때와, 또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여길 때에는 그만 두는 것이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싸우고 고쳐서 살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을 때에는 그곳에서 그만두든 도망치든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현재를 사는 것이다.
과거의 가치나 남의 눈치를 겁내어 억지로 사는 것은 오히려 과거에 살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죽겠다 하면서도 사는 사람은 말만 그렇지 그래도 살 구석이 있기 때문에 산다.
정말로 죽을 것 같으면 절대로 그곳에서 살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은 절대로 안 된다고 여기면 반드시 실행에 옮긴다. 우리 생각은 그만큼 강한 놈이 아니다.
그래서 말로만 생각으로만 죽겠다 하면서 거기에 계속 머무는 것은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이든 견딜만하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다. 다만 비교하여 힘이 드니까 죽겠다고 할 뿐인 것이다.
이 생각 역시 비교하는 생각으로 죽은 자의 생각이다.
다시 우리의 내면의 생각으로 돌아가서 보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서 인연으로 일어나는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드는 것으로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어쩔 수 없고 자신도 모르게 올라온 그 생각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게 올라온다고 잣대를 대고 비판하고 쥐어뜯는다고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으며 이미 일어난 생각이 사라지겠는가?
세상에서 다른 이가 내 맘에 안 든다고 잣대를 대고 비판하고 싸운다고 그가 사라지던가?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생각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말은 세상은 이 한 법의 인연으로 되어 있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생각으로 그 인연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생각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도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것도 뜬금없이 손님처럼 일어나 나를 괴롭힌다면?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과 싸우는 것이 현명하겠는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고 하던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하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뜬금없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면 기억 속에 집어넣는 것이 우리의 뇌다.
우리의 뇌는 일어나는 생각을 두 번 세 번 건드리면 우리가 그 생각을 우리에게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아뢰야식에 저장한다.
그리고는 그와 유사한 일을 만나면 금방 튀어나와 주인노릇을 한다.
우리가 없애려는 그 생각을 시비하고 건드리고 싸움으로써 오히려 다음 싸움에서 주인노릇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번뇌라고 하고 또 힘들어하는 이유는 인연으로 뜬금없이 일어난 생각 때문이 아니다. 그 생각을 없애려고 시비하는 잣대인 한 생각 때문에 힘이 든 것이다.
즉 지금 일어나는 생각은 현재인데, 그 생각을 없애려는 그 한 생각은 지금 현재에 일어나는 생각과 다른 세상, 즉 자신이 원하는 세상에 살기를 바라고 있는 생각이다. 그것도 과거에 만들어진..
그래서 현재의 생각과 자신이 바라는 생각은 맞지 않으면 반드시 기존의 생각이 현재의 생각을 어떻게 하려고 건드려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 때문에 힘든 것이, 일어나는 생각 때문에 힘이든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없애려는 그 한 생각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즉, 우리를 괴롭게 하는 생각은 우리가 떠올리는 순간순간의 현재의 생각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을 자신과 다르다고 여기는 그 놈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절대 괴로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일체만법을 내고들이며 모두를 품고 있는 마음으로 이 한 법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인연만 되면 그 생각이 놀 터전을 제공해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마치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 한 생각은 우리에게 기생하며 존재하면서도 마치 우리를 자기가 주인인 영역이라고 여기고, 또 우리는 순진하게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주인이라고 여기며 말을 잘 들으면서, 그것이 즐거워하면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면 괴로워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은 이놈의 춤사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 오고가는 생각 때문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의 본마음이 아니라 분별하는 그 놈이 괴로워하는 것이다.
나도 이 법을 깨닫고도 한동안 이 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인연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없애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어떨 때는
“깨달았는데도 이렇게 생각이 나를 괴롭히면 깨달음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또 그 때문에
“이미 깨달아 생사도 없음을 알았고, 이제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깨달아도 이런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한 동안 생각과의 싸움을 이어가다가, 어느 날 새벽에 잠이 깨면서 문득,
“아! 저놈도 냅둬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즉, 인연이 되어 일어난 생각을 시비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시비하려는 생각조차도 그냥 시비하지 않고 놔둬야 생각에서 자유로워짐을 깨달은 것이다.
그 이후 내 생각에서 두 생각이 부딪히는 전쟁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생각이든 그것에 걸려들지 않는다. 그리고 걸려들었다 하더라도 그냥 그럴 뿐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과 뇌는 인연에 완전히 열려 있다.
그 이유는 이 우주가 이 한 법의 인연으로 되어 있기 때문으로, 그것으로 나온 우리 역시 모두 인연에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다만 한 생각이 내가 있다는 착각으로 인연을 좋다 나쁘다 하고 시비하고 있고 그것을 모르는 우리가 바보처럼 고통에 빠져 있지만, 그렇다고 그 한 생각이 이 한 법의 인연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이 우주가 인연으로 되어 있고 나 역시 인연으로 되어 있고, 또 실제로 시비하는 생각 역시 이 한 법의 연기작용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생각, 어떤 인연이 오고가더라도, 그것을 시비하지 않고 필요한 것은 쓰고, 필요하지 않는 것은 그냥 인연에 맡겨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생각 역시 내가 인연을 짓지 않으니 저 스스로도 인연의 손을 내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일과 자신의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앞에서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생각으로 이루어져있다.’라고 하였듯이 세상 사람들 역시 자신의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의 생각에 시비하지 않으면 서로의 인연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금의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 시중을 든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챘을 때 그냥 무심하게 내버려두면 된다.
우리의 생각은 그냥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인연에 의해 흘러간다. 그래서 내가 건드리지 않으면 그냥 그 나름대로의 인연으로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런데 그것에 내가 시비하면 그 생각의 인연이 내게로 향해지면서 그 생각은 나의 생각을 인연으로 잡고 계속 남아 시비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설사 시비하는 생각에 끌려갔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챘을 때에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모든 인연을 살면서도 인연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 한 법의 인연으로 흘러가는 것이지 어떤 개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무기력한 것 같지만,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주위의 소중한 손길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걱정 없이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아상에 물들어 나를 내세우지만 않는다면 이 한 법은 우리를 이 아기처럼 이끌어 줄 것이고, 우리는 어떤 인연이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존재다.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이 한 법의 인연이 모두 다 하고 있다.
다만 살아오면서 단맛쓴맛을 아는 바람에 쓴 것을 버리고 단 것만 찾으니 자신도 모르게 시비에 들어가고, 그것 때문에 시비하는 생각의 종이 되어버렸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인연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고 또 인연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된 사람은 이미 시비가 사라진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모두 이 한 법의 일로 알뿐,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온 일을 온전히 인연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늘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에는 늘 선택이라는 선택지가 놓여 있고, 우리는 그것을 선택을 하므로, 무조건 따르는 것만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했건, 그 역시 나를 움직이는 이 한 법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아무런 일이 없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가 있다.
그 첫걸음이 어떤 생각이 올라오더라도 시비하지 말고,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건드리지 말고 그 생각의 인연에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공력이 약해서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서 시비할 수도 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어찌 갓 태어난 애가 바로 일어서서 달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에게 능력은 습을 거치면서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넘어지더라도 계속 일어나 다시 하면 된다.
그래서 그 생각에 넘어가 시비했더라도 그것을 아는 순간에 뚝! 하고는 그것에서 생각을 거두라.
물론 그렇다고 그 생각이
“아~! 내 잘 알았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물러가지는 않는다.
놔뒀다 싶으면 언제 왔는지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건드려 시비 속에 빠뜨린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끝까지 그것을 알았을 때 내버려두면 점점 힘도 길러지고, 또 이 생각 역시 습관에 길이 들어 점점 준동(蠢動)을 멈출 것이다.
이것이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가 바로 산 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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