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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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네오의 죽음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880

20-03-14 16:19

본문

매트릭스 1편은 우리의 생각에 대해 참 많은 시사를 하는 재미있는 영화이다.

 

거의 마지막 부분,

네오가 요원들에게 붙잡혀간 모피어스를 구해내고 탈출하다가

요원(자신의 반쪽인)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함선에서 그를 기다리던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그리고 탱크가 경악을 하고 트리니티는 이미 숨이 끊어진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난 이제 두렵지 않아. 오라클은 내가 사랑에 빠지는 ‘그’라고 말했었어.

그러니까 당신은 죽을 수 없어.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들려? 사랑해 이제 일어나.”

 

그 고백과 키스에 네오는 깨어난다.

사랑은 하나라는 근본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시비분별이 없는 것이다.

트리니티는 기계와의 대결에서 인간을 구하는 전사(戰士)다.

 

오라클이 그녀에게 네오를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 것은,

3편에서 네오와 함께 기계의 세상에 가서 자신의 일을 마치고, 온전히 네오에게 모든 것을 넘기는 숭고한 사랑으로, 네오가 깨어남의 길을 가게하는 네오의 반쪽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리니티의 사랑고백은 네오에게 시비분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생명의 말과 같은 것이다.

 

그 말에 네오는 깨어나고,

그때부터 자신이 처한 현실은 여전하지만 자신이 보는 매트릭스는 디지털화 된 암호로 보이기 시작한다.

 

네오의 죽음은 바로 우리 ‘생각의 죽음’에 대한 상징적인 모습이다.

그 죽음에서 우리는 알음알이와 시비를 버리고 사랑을 배우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트리니티의 사랑에 의해 네오가 깨어나듯이....

 

그리고는 네오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의 본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깨달음은 네오의 죽음에서 살아남과 같이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이다.

드러난 모양을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조사들이 화두를 잡고 참선하는 수좌들에게 늘 나무라는 말이,

"활구(活句)를 잡아야지 사구(死句)를 잡아서는 못쓴다."

는 말을 한다.

 

사구라는 것은 바로 생각이다.

즉 모든 것을 한 개체의 경험으로 얻은 것 밖에 안 되는 좁고 좁은 식견과 잣대로 세상을 재해석하여 그것으로 옳고 그름의 잣대로 따지는 것을 말한다.

 

이 공부를 하는 세계에서는 그것을 알음알이라고 한다.

 

네오는 죽음에서 깨어남으로 인해 비로소 알음알이가 사라진 눈으로 매트릭스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드러난 것들은 그들의 인연에 의해 그렇게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논리와 관념은 다 환이요 꿈의 소산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눈이 뜨일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인다.

그때부터 그동안 보아왔던 모든 것들이 다 생각이 지은 환이요 거짓임을 안다.

 

네오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 세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자신을 상대하고 있는 것들이 다 허구임을 알고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날아오는 총알을 손을 들어 멈춰버리고, 그것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미스가 허구임을 알고 그 속에 들어가 파괴시켜버린다.

 

물론 깨달음처럼 처음 깨닫고 나서도 보임이 되지 않으면 과거의 습이 올라오듯이, 스미스와 매트릭스가 계속 남아 있어 2편과 3편으로 시리즈가 이어진다.

 

하지만 매트릭스 3편의 마지막에서 네오는 싸움을 멈춘다.

비로소 시비분별이 완전히 떨어진 것이다.

 

그동안 적이라고 여겼던 기계와 스미스는 비록 어두운 면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분별하기 때문에 적이 된 것일 뿐 자신의 반쪽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기계와 타협을 하고, 자신의 반쪽인 스미스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파괴되면서 매트릭스는 사라지고 갈등이 종식된다.

 

시비분별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 말한 활구(活句)다.

 

있는 그대로....

 

결국 자신이 버리고자 했던 그것까지 받아들여 1편의 생각의 죽음에서 안 그 앎조차 내던져버린 세상에,

3편 마지막에 지하철에서 만난 아이, 사티가 만든 태양과 아름다운 하늘이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본래부터 아무 일이 없는 그대로...

 

깨달음은 이와 비슷하다.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옳고 그름이 사라지고,

선도 악도 사라지고,

모든 대결구도의 모양이 사라지고 시비도 사라져

그냥 일체만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본래 아무 일이 없음을 알고 모든 갈등이 종식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결국 생각하나가 모든 것을 왜곡시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 모든 것은 본래 그대로여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이

“한 물건도 없다.”

또는

“한 물건도 얻은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무엇이라도 도리를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하나라도 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는 아직 버릴 생각의 티끌이 남아 있는 자이다.

 

이런 사람들은 물론 시간이 그들의 조각들을 버려 줄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게 혹시라도 그것이 남아 있지 않는지를 늘 살피라.

 

깨달음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일체가 모두 이 한 법의 세상으로 본래 아무 일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쓸데없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의 찌꺼기를 비우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놓아진다.

 

그래서 ‘놓아라.’ 하고는 ‘놓으려고 하는 그 놈도 놓아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은 습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만든 양변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놓아라.’ 하면 자신이 대하고 있는 일들이 본래 그러한 일이 일어나 아무 일도 없으니, 그냥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하고,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그것들의 인연에 맞기면 되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각에 의지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놈의 명령을 따라 놓으려는 행위를 한다.

즉 ‘함이 있다’는 것이다.

함이 있다는 것은 아직 생각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들이 놓아라 하는 것은 그냥 건드리지 말고 인연에 맞기라는 말이다.

이는 그런 생각이나 행을 스스로 행위를 하여 지우라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놓아라.’ 하고는 ‘놓으려고 하는 그 놈도 놓아라.’고 하는 것이다

하는 그 놈은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놓으려면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즉 놓으려는 의지도 놓아야 한다.

어떤 것은 놓고 어떤 것을 가지려 하는 것은 놓는 것이 아디다.

 

그래서 그냥 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냥 놓음은 시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놓음에 대한 아주 좋은 예가 예전에 전주에 있는 어떤 님께서 옛날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말했던 것으로,

아이가 울고 있을 때에 엄마가

"뚝!"

하면,

아이는 아무리 속으로는 할 말도 많고 억울한 것도 있고, 알아달라고 어리광부리고 싶지만, 엄마의 그 말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어 비록 속으로는 다 녹지 않아서 울먹거리지만, 울음을 그치는 것처럼, 그렇게 놓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일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모두가 이 한 법의 인연으로 흘러갈 뿐,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흐름은 내가 그것에 아무리 애를 써도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엄마의 말에 속으로는 온갖 마음이 섞여 아직 녹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그냥 ‘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은 실재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려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우리의 삶은 많은 인연 속에 많은 이유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래서 옳고 그름도 많고, 좋고 나쁨도 있고 그 외 참 많은 살림살이와 시빗거리들이 있다.

 

하지만, 이 한 법에서 볼 때에는 모두가 용광로의 한 쇳물로, 다만 제련과정에서 인연에 의해 갖가지의 모양으로 생겨나는 차이만 있을 뿐, 어느 것도 근본이 다르거나 또 따로 소중하거나, 따로 버릴 것이 없다.

그냥 오직, 온통 하나일 뿐이다.

 

그것을 알면 삶에서 어떤 즐거움도 그냥 그런 일이고, 어떤 억울한 일도 그냥 그런 일일 뿐이다.

 

그래서 삶에서 복잡한 생각이 난무하고 생각이 나를 알아달라고 떼를 쓸 때,

‘뚝!’을 잊지 않고 그만둘 수 있다면, 그는 어느 순간에 죽었다가 깨어난 네오처럼 세상을 다시 볼 것이고,

끝내는 자신과 세상이 둘이 아님을 알고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일에 시비 없이 받아들이며 늘 삶에서 여여(如如)할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삶과 법과 깨달음이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삶과 법과 깨달음은 모두 한 가지로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일체가 한 법이요 우리가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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