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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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3월 13일. 중간부분에 푸른 색으로 부분수정함.).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1,862

20-03-13 17:18

본문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들은 모두 맞기 보다는 안 맞는 것, 더 나아가서는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생각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본래 없는 놈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당성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고 우선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자신의 정당성을 건드리는 것은 티끌만한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떻게든 그러한 상황을 모면하려 하고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맞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생각이 두려워하는 ‘맞는다.’는 것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맞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좋지 않는 모습을 남에게 보인다는 말이다.

아니 보인다는 말보다 들키거나 틀렸다고 지적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러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은 대충 이렇다.

 

고통 받고 싶지 않다.

힘들고 싶지 않다.

바보 같지 않고 싶다.

남에게 욕을 얻어먹지 않고 싶다.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등등의 욕심이 들어있다.

 

결국 밖으로부터 완벽한 존재라고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두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가만히 들여다보라.

자신의 삶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경우를 당했을 때에, 단 한 번이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 적이 있는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생각에게 시중을 들면서 또 스스로를 때리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까짓거~!’하면서 대범하게 맞서는 경우도 있고, 또 그렇게 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될 수 있으면 이러한 상황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왜?

우리는 생각을 마치 주인처럼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벗어나고 싶은가?

 

물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딱 하나!

 

그러한 싸움에서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생각을 이긴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에 맞서는 것보다는

생각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더 열중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연의 삶에서 한 치의 앞도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실수도 하지만, 잘 했다는 것이 상황에 의해 오히려 못한 일이 되거나 큰 일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서 그런 식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더더욱 기가차고 괘씸한 것은,

그렇게 잘못하는 놈과 채찍질 하는 놈과 두려워하는 그 놈이 한 놈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 생각이란 놈이 이렇게 세 놈으로 나누어져 시차적으로 모습을 바꾸어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매 순간자신과 즉하는 놈,

즉 잘못하는 놈, 채찍질하는 놈, 두려워하는 놈으로 변신한 생각을 나처럼 여기고는,

잘할 때는 우쭐 거리고, 못할 때는 기가죽고, 때론 화가 날 때는 잘못한 시점의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다람쥐쳇바퀴 속에 살면서 늘 혹여나 두드려 맞을까 신경을 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분명히 이기는 방법이 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긴다는 표현이 어쩌면 분별하는 것 같이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긴다는 표현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표현하면,

흔들리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이기고 싶다면, 흔들리지 않고 싶으면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는 어떤 상태를 극복하듯 이겨서 흔들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를 어떤 상태에 몰아넣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곧 누구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렇게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그러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곧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당연한 삶이다.

 

부처님께서 ‘삶은 고해다.’ 라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삶이 고해(苦海 : 고통의 바다)임을 알면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봐야 우리가 삶을 사는 한 고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삶이 엄연하게 고해라면,

굳이 그러한 힘듦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힘든 고해인데,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 정말 쓸데없는 고통의 짓거리가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이다.

 

이 세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다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 흘러갈 뿐이다.

그래서 나도 인연이고 너도 인연이고, 세상도 인연이고, 삶도 인연이고 고통도 인연이어서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으로 리바이벌 하여 분석하여도 절대로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가 없다.

즉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우리의 생각은

‘그래도 바둑을 복기(復棋)하듯이 삶을 되돌아 짚어보면 다음의 일에서는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느냐?’

고 되묻는다.

그 이유는 이 생각이란 놈은 이 우주가 생겨난 이래로 단 한 번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은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일어나고, 그 작용은 나 하나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일들이 인드라망처럼 엮여서 일어나는 것으로, 하나의 일이 일어나려면 티끌만한 것까지도 다 그것에 영향을 미치므로 티끌하나라도 변수가 생기면 다른 삶이 되어버리는데, 생각은 일어난 일의 모양만 볼 수밖에 없고 또 그일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서도 우리의 물리적인 감각이 닿을 수 있는 한계내에서만 추측하고 알 수밖에 없는 한계로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알 수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뿐만 아니라 이 우주에는 단 한 번도 과거와 같은 현상이 생긴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생각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토대로 세상을 보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비쳐 묶음으로 분류하니 비슷해 보이는 것은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볼 때에는 마치 예전에 경험한 것과 같은 것 같이 보여도, 

실제하는 세상의 일은 이 우주에서는 한번도 있었던 적이 없는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이 생각이 과거에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삶이기 때문에, 생각으로 아무리 복기를 해도 절대로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비슷하게는 대처할 수는 있다.

그것은 삶은 생각으로 볼 때 대부분 늘 주위에 있는 비슷한 것들의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아주 대단한 변수가 없는 이상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자신이 경험한 것 이상의 정보가 없어, 아는 만큼만 볼 뿐 세밀하게 따지지 않기 때문에 대충 비슷하면 해결되었다고 착각하고 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큰 일이 아닌 이상은 대충 그렇게 하면 생각은 피해갔다고 여기기 때문에 비껴 갈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일과 비슷한 일을 만나도 과거의 경험으로 비켜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 아주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착시현상이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결과론으로, 그 인연이 그런 방법이 먹히는 인연이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대처한 것처럼 여긴 것이지,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결과가 나올 인연이라는 것을 미리 정확하게 알고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은 인연이었다면 절대로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삶에 대해 그저 예측을 할 수는 있어도 실제의 삶은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예측한다고 하더라고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을 뿐이지 우리가 그렇게 대처해서 피해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이 비슷한 것들을 보면 우리 생각은 같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세상이 반복된다고 착각하고, 그 때문에 내가 대처한 것이 마치 미리 예방한 것으로 착각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길 뿐이다.

 

그래서 착시현상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도 타인도 세상도 도무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인연의 조건들이 매순간 엮여서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피했을 때는 그 인연이 운 좋게 내가 가지고 있는 앎과 용케 맞아 떨어졌을 뿐, 우리가 알아서 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하고는 그것을 분석하면서

“아! 바보같이 그때 그럴걸!”

하며 자신을 탓하지만,

그때 지금 아는 것을 그때 떠올리지 못한 것이 내 탓인가?

만약 지금 나를 탓하고 있는 생각이 실재한다면 그때 나를 콕 찔러 피하게 하지 왜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고 다 지나간 지금 마치 그것을 아는 놈처럼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즉 그놈도 그때는 몰랐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겁한 놈인가?

 

생각이라는 놈이 이런 놈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는 능력밖에 없지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알 수없다.

아니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이 우주는 절대로 오지 않은 미래가 지금에 드러나는 것은 절대로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다만 연기법, 즉 인연이라는 법칙이 있어 지금의 인연으로 다음의 인연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고, 또 대부분은 현재의 인연으로 다음의 인연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의 변수가 없는 이상 큰 변화가 없고, 또 미래도 작은 변수는 있어도 큰 변화가 없으므로, 미세함을 살피지 못하는 거친 우리의 생각은 마치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의 것을 반추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생각이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과거의 일에 영향을 준 티끌같이 미세한 것을 한 톨도 놓치지 않고 분석하여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에 잡히는 만큼만 가지고 반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인연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거의 90%이상이 되는데, 조금 알고 있는 것으로 반추하고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듯이 우리를 다그치는 그놈이 과연 옳은 놈이겠는가?

한번이라도 자신의 생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거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재모습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아야 한다.

즉 이 우주는 늘 이 한 법의 연기작용으로 흘러가는 세상이고, 우리는 우리 생각만 알 뿐, 남의 머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아는 방법도 없고, 설사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다음의 진행이 어떻게 될지 분명하게 아는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엉성한 생각 하나를 들고 그것에 의지해 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잘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완전히 이해가 되면,

누구나 다 그러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잘함과 못함 등의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이 다 고만고만하게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고,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고,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고,

자랑할 때도 있고 부끄러워할 때도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냥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별 변화 없는 평상시의 일뿐만 아니라, 요즘처럼 코로나19가 나타나 세상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역시 그러한 때가 되어 그렇게 일어나는 것일 뿐임도 알게 된다.

 

즉 이 세상은 누구나가 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마라.

 

고통을 받아도

힘들어도

바보 같아도

남에게 욕을 얻어먹어도

멋진 사람이 되지 못해도

그것이 바로 실재의 삶이라는 것을 알라.

그러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도 그렇게 살고

나보다 더 못한 사람도 또 그렇게 살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결국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없다고 여기는 삶에서도 역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

 

내가 욕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으면 욕을 얻어먹지 뭐.

내가 바보 같으면 바보가 되지 뭐.

내가 힘들면 힘들지 뭐.

내가 멋진 사람이 되지 못하면 그렇게 살지 뭐.

내게 고통이 와서 그것을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면 받지 뭐.

 

이렇게 말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와서 하루 이틀을 살고 가는 것이 아니고

수십 년을 살다 가는데

왜 그렇게 꼭

욕을 얻어먹으면 안 되고,

고통을 받으면 안 되고,

바보가 되면 안 되고,

힘들면 안 되고

멋진 사람이 못되면 안 되는 것처럼

몸부림치며 살아야 하는가?

 

그만큼 자신이 완전하다고 믿는가?

아니, 그렇게 자신이 완전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가?

 

진정으로 그렇다고 믿는다면 늘 그래오던 그 길을 가라.

 

하지만 나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렇게 완전한 자가 존재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정말로 완전했다면

예수가 비록 부활했지만,

남에게 비난받고 처형당하지 말아야 했고,

부처님도 외도가 찾아와 시비를 걸지 않았어야 하고,

길가는 데 누가 부처님의 등을 때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완벽의 상징인 신도 욕을 얻어먹지 말아야 했다.

영화나 소설 같은데서 실패하거나 힘든 사람이

하늘을 보고 신을 욕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가?

 

우리가 존경하는 모든 이들의 삶은

비록 남들에게 비난 받거나 영생을 하지 못했지만,

스스로의 삶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자유를 얻은 자들이지

우리가 생각으로 세워놓은 관념적으로 완전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 한 법이 만든 세상에서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에 의해 생기고 그 법칙과 작용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 그리고 그 존재들이 서로 인연지어 생기는 매 순간의 모든 상황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현상으로 우리는 그 인연이 현실화되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세상이니, 우리가 성공도 하지만 실패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패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에 매달린 그 생각이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니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이 한 법의 인연으로 살아가는 존재이지

우리의 생각이 세운 그런 잣대에 맞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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