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897

20-03-08 23:26

본문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이 하나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 24절) 

 

사람들은 경전의 유명한 경구를 인용하여 자신의 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거나 설명을 한다.

그 중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말들이 있는데 위의 글귀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밀알이 하나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이 말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과 함께 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밀알이 썩는다는 말을 단순하게 썩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밀알이라는 모양이 사라지고 밀이라는 곡식의 싹을 틔운다는 것으로, 세상이나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자기희생의 비유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우리가 얼마나 경전을 잘못 읽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글귀 중에 하나이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다는 의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세상과 남을 위한 거룩한 일을 하라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라고 예수님이 말해놓고,

“그래 내가 밝힌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할 테니, 너희들은 네 몸을 던져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을 구하란 말이야. 아니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뭐라도 내 놓아야지 되지.”

라고 했을까?

애써 얻은 자유가 목숨 걸고 세상을 구하는 빚더미가 된다면 그것이 무슨 자유이겠으며 누가 그런 자유를 바라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불경이나 성경,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전은 세상을 위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전의 말은 모두 깨달은 사람의 말을 옮겨놓은 것이고,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 사실을 몰랐을 때 겪었던 그 답답함과 괴로움에서 사람들도 벗어나게 하려고 한 말이다.

그리고 경전은 그것을 옮겨 그것을 읽는 사람이 그렇게 되게 하려고 쓴 것이다.

 

세상을 구하거나 남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은 먼저 우리 내면의 갈등을 먼저 해소하고 난 뒤에 선택할 그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의지요 의사다.

물론 경전의 말씀을 한 사람들은 그 자유를 세상을 위해 던지는 데 사용했지만, 그것을 강요하기 위해 성인들이 깨닫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내면의 갈등이 해소되고,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저절로 사랑이 나온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사랑이 넘치고 남의 일이 자신의 일처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그가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 것이지,

애초에 성인들이나 경전 등이 이제 깨달았으니 밥값을 하라는 식으로, 자신은 내버려 두고 세상만 위하라고 경전이 쓰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글들은 오직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기 위해 쓴 것이다.

 

사람들은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겨났는가?’하는 물음을 한다.

이처럼 이것은 인간의 오래고 가장 궁극적인 질문 중의 하나다.

 

답은 우리는 이 우주와 함께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우주시간으로 아주 최근에 인간의 모습을 띠고 이 세상에 나타나서 각각의 인간이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다시 그 개체가 멸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모습을 띠는 것이나,

이 세상에 생겨나는 것이나,

하나의 개체로 모습을 가지는 것이나,

그 개체가 변화하고 멸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우리, 즉 내가 해온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생각하고 내가 살아가고 움직이게 하는 그것, 바로 본성(本姓)이 해온 것이다.

 

그것이 나를 만들고 여러분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세포하나하나, 그리고 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인연되게 만들어주고, 그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게 하며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켜나간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다.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움직임도 없고 변화도 없다.

그리고 형체를 결속시키는 힘도 그것에서 나왔으니 그것이 없으면 우주라는 형체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성이 없으면 나와 나의 몸, 그리고 생각 등을 비롯해 이 우주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물에 물방울이 일어나서 각각의 물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이름을 붙이다보니 이 물방울 저 물방울이라 하지만, 그 물방울의 본성은 오직하나인 물과 같다.

 

그래서 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우주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 분들도 바로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나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이고, 이 모든 것이 바로 우주 만물의 존재들이다.

 

만약 이것을 떠나 그대들과 내가 분리되어 있는 내가 있다면 그 나는 내가 아니다. 아니 그러한 나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처럼 그대들 역시 그대가 아니다. 그런 그대와 나는 이 우주에 단 한순간도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것은 오직 우리의 착각 속에만 존재한다. 지금도...

 

그렇게 분리된 나와 그대와 세상이 없기 때문에, 분리된 나와 그대가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분리된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던져 무엇을 하라는 의미의 글로 쓰인 경전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늘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경전의 의미조차도 그렇게 읽는다. 그리고는 그것이 아주 그럴 듯한 글로, 또 본받아야할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이 받들면서...

그러면서 그대와 나, 그리고 세상이라는 분리된 상태를 더욱 고착화 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고착화된 의미는 다시 되돌아와 우리의 착각을 끊임없이 심화시킨다.

 

경전은 절대로 그런 의미로 쓰여 진 것이 아니다. 경전은 우리는 단 한 번도 서로 분리된 적이 없고, 그대를 떠난 내가, 나를 떠난 네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하나의 밀알이 썩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는 바로 위의 글에서 다 말했다.

분리된 의미의 나와 그대를 죽이라는 말이다. 내 속에 있는 나와 그대를 분리시키고 있는 모든 생각과 관념들을 깡그리 죽여 버리라는 말이다.

 

어떻게 죽이는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하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백 척이나 되는 긴 막대기위에서 던져버리라는 말이다.

‘생각의 죽음’

그것을 말한다.

그 생각의 죽음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썩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이분법적 생각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모든 관념들을 깡그리 죽이기 위해서는

단 하나,

옳다 그르다하는 한 생각을 끊어내는 것 밖에 없다.

 

자성을 알면?

견성을 하면?

체득을 하면?

하지만, 수십 년을 쌓아온 분별하는 습이 견성했다고, 체득했다고 한 순간에 사라질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견성(見性)하자마자 모든 분별이 떨어진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초견(初見)이니, 대오(大悟)니, 마지막 밑구멍이 빠졌느니, 말후구(末後句)를 안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들이 생겨나고, 그리고 수많은 깨달은 자들이 보임(保任)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하는 그것을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큰 사건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죽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거기서 멈출 것인가?

자성을 발견했으면 스스로 자성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자성임을 알고도 끊임없이 번뇌와 의문이 일어난다면 오히려 더 힘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보임을 한다.

그것이 바로 견성을 한 지혜로, 아니면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으로 남아 있는 분별의 먼지들을 떨쳐내는 것이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삼라만상은 서로 인연으로 만들어졌고, 인연으로 변화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어떤 것도 고정된 무엇이 없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옳다 그르다는 것은 모두 생각에서 나온다. 옳다 그르다는 판단도 생각에서 나오지만, 우리가 봐서 옳다 하는 모습이나 행위, 말 등도 모두 생각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무의식(無意識)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것도, 그 무의식도 처음에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했다. 그것이 반복되고 하나의 습관으로 형성되면서 우리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것을 우리는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도 절대로 저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대상과 인연이 되어 정보를 받아들이고, 뇌는 그 정보를 받아들여 기존의 정보와 비교되고 분석을 하여 자신에게 맞게끔 재해석해서 저장하며, 그것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판단하는 종자식(種子識)이 되는데 그러한 모든 것이 생각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것을 비교 분석, 판단하는 그 저장된 정보가 생각이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은 기존의 정보가 새로운 정보를 비교 분석 판단하는 생각활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우리라는 존재를 유지해나가려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을 서로 공유를 하고, 때론 뜻이 바르다고 해도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절대로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교, 분석, 판단하는 근거들이 오직 그라는 한 개체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축적한 것에서 나오고 또 재해석되어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생각이나 감정을 절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서로 약속된 언어나 문자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대입시켜 서로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고, 또 같은 몸과 생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경험을 하면 비슷한 느낌을 가지기 때문에, 이 생각은 마치 남의 생각을 아는 듯 착각한다.

그래서 남이 아프다 하면 자신이 느끼고 있는 비슷한 감정을 떠올려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는 마치 내가 그 사람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서로 생각이나 감정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서로가 그 의미를 알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아픈지, 그 아플 때 느끼는 상태가 어떤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즉, 자신의 감정으로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뿐,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의 감정으로 느낄 수가 없다.

이는 책으로는 절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생각으로 남의 상태를 추측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를 참으로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해라는 것은 자신의 정보를 바탕으로 재해석하는 것으로 철저히 개인적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정보가 없으면 절대로 이해를 못하고, 이해하더라도 상대방은 긍정적이라고 하는 정보가 자신의 뇌에는 부정적으로 저장되어 있을 때에는 오해라는 것도 한다.

결국 이해라는 것은 순전히 내 식으로 생각하되 좀 더 자신의 많은 정보를 동원해서 깊이 생각하여 자신의 정보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을 한다는 말일 뿐이다.

어쨌든 자신의 한계를 깨뜨릴 수가 없다.

 

물론 오해보다는 이해가 서로의 사이를 부드럽게 하고 세상을 부드럽게 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해를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 산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상대를 본다는 것이므로 사실 똑같이 바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못하고, 결국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공부에서 우리가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그것을 선지식들은 ‘인연 따라 살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몇 번의 이해로 마치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아는 것 역시 상대가 알 것이라고 여기고는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을 때에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원망하고 미워한다.

이것이 이해의 어두운 면이다.

 

애초부터 우리의 이해는 모두 주관적인 이해이지 정말로 상대와 똑같이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오해를 했다고 화를 내거나 다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

서로가 다르고 또 모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이 이해의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니, 이해와 같은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세월동안 집단적으로 모여,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양변을 만들고, 그러한 양변을 깨뜨릴 수 있는 아주 거룩하고 멋진 의미로 포장이 되고, 결국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 존재 전체를 지배해버리고, 자신은 저 높은 자리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것을 배우고 또 옳다고 믿고는 자신도 그것에 끼워 맞추려고 하고 상대와 세상 역시 그 속에 집어넣으려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생각이 철저히 개인적이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의 정보를 통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우주적으로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조차 결국 자신의 정보에 기초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집단적이고, 사회적이고, 국가적이고 우주적인 선과 악 조차도 낱낱이 분석해 들어가면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에 의해 이해가 다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선과 악이 될 뿐이라는 것으로, 세상에는 공통된 선이나 악이라는 기준이나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아이러니에서는 애써 눈을 돌리고, 어쨌든 세상에 누구에게나 통하는 기준이나 잣대가 존재한다는 착각을 지우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약속된 언어를 공유하고 또 경험은 달라도 찌르면 아픔을 느끼는 같은 구조의 몸과 같은 방식으로 생성되는 생각 구조를 가지고 있어 마치 우리가 감정이나 생각까지도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일어나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착시현상으로 선이니 악이니 하면서 서로 대화를 할 수가 있어서 일정부분에서는 공감도 할 수가 있다고 여기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사실을 두고 선과 악을 나누면서 계속 파고 들어가면 결국 각자의 생각으로 나뉘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게 된다.

 

이는 본성은 비록 하나이지만 각각의 존재로 나눠져 세상에 나옴으로서, 세상의 어떤 것도 결국 자신의 가치관과 경험과 정보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숙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깊이 통찰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준이나 잣대가 모두에게 통하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아는 기준에 어긋난 사람을 나쁘다, 틀렸다고 판단한다.

그러니 늘 바깥과 충돌을 일으킨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사람과의 관계조차에서도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자유로울 수가 있으며 행복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말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체가 한 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절대로 생각과 감정,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여기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근본적인 진리, 즉, 인연이라는 진리가 있기에 우리가 생겨났다는 진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 그렇게 오직 하나의 본성에서 나와, 그 나온 것끼리 역시 이하나의 본성인 연기 작용에 의해 생기고, 그 작용에 의해 매 순간 움직이는 인연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인연의 본성에 의해 우리는 바깥의 수많은 인연덩어리와 인연이 겹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겹치면서 살아가지만, 결국 이 우주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인연덩어리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인드라망처럼 존재하는 것도 인드라망 같은 인연의 조합인 인연 덩어리이고, 세상은 그 모든 인연덩어리가 서로 겹치는 인연덩어리이기 때문에 서로 인연이 되어 비슷한 경험을 하며 마치 같은 느낌,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여기지만,

결국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인연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인연덩어리 속에 들어 있는 정보는 이 우주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정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절대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다.

 

아무리 이해를 해도 한 순간, 때로는 좀 긴 시간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평생을 똑같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다.

 

그러니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남에게 알아달라고 해서도 안 되고 나의 기준이나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거나 심판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하고자 하는 진리다.

 

우리는 자유를 바란다.

하지만 자유는 남에게서 벗어나는 것만 자유가 아니다.

남에게 벗어나도 우리는 먹고 사는 것, 매순간의 내가 처한 자리와의 인연, 병드는 것, 춥고 더운 것 등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연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 모든 인연에서 벗어나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는 우리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절대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어 서로 간섭하고 살기 때문에 자유를 구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인연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자유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셨다.

 

“밀알이 하나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이 썩는다는 것은 생각이 죽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삿된 생각, 즉 자신만을 알고, 자신만의 경험만 옳고,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하는 생각, 즉 아상(我相)을 말한다.

 

그 생각이 죽지 않으면 끝내 홀로 세상과 다투면서 살아갈 것이니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라고 하신 것이고

 

그 생각이 죽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으니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여기서 진리란 바로 이 세상은 오직 이 한 법의 법칙과 작용으로 흘러갈 뿐, 개체적이거나 개인적인 생각에 한 톨의 눈길도 정(情)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를 남이 알아주길 계속 바라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결코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허공의 헛꽃만 바라보는 고통 속에서 세상이 멸할 때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게 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의 망상을 허공의 헛꽃이라고 말하셨다.

그 헛꽃을 진짜 꽃이라고 믿고 바라고 있는 이상 그에게는 결코 자유라는 것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까?

바로 밀알이 썩어야 하는 것이다.

백척간두에서 생각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썩어야 할 밀알,

그것은 바로 남이 나를 알고 내가 남을 안다는 착각,

그 때문에 자신의 가치와 기준과 잣대가 세상 모두에게 적용되는 옳은 것이라는 착각 그 착각의 망상,

그 한 생각이 죽어야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연으로 존재하기에 우리의 생각 역시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내가 나의 고집을 부리고 나만 옳다거나 나의 가치가 분명한 진리라고 하고 있으면 나와 인연된 상대 역시 그 인연으로 자신의 고집을 부리게 될 것이고, 결국 나에게는 자유가 없고 상대와의 관계도 나아질 기미는 더 더욱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별이요, 분별이 만든 열매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잣대(분별)를 버리고 나를 편하게 하고 상대를 편하게 함으로써,

상대도 그러한 인연에서 그러한 환경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켜서 같이 행복해질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 역시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여 고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역시 앞으로 내가 어떻게 변해갈지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절대로 알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나도 모르고 그대도 모르고 세상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 경전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 다는 것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안다는 그 생각을 내려놓는 것도 함께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무수히 아는 것이 많다. 책도 알고 음식도 알고 물체도 알고, 어떤 것은 반드시 행하면 결과물이 있는 것도 알고 때리면 아플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한 것들조차 모른다고 하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알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고집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 생각이 맞은 들 무엇하고, 틀린 들 또 무엇하겠는가?

그런다고 살아있는데 숨을 쉬지 못하는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는가?

좀 기분이 다를지 몰라도 우리의 뇌는 여전히 제 할 일을 할 한다.

그래서 아상이 있는 자는 생각에 좌우되니 맞으면 좋고 틀리면 좋지 않겠지만, 아상이 죽은 자는 그냥 인연이 그럴 뿐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유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면 서로 바라는 것이 없어질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생각을 내려놓게 될 것이고, 따라서 갈등과 번뇌가 사라지니 행복과 자유라는 무수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이 말하기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고 하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