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마음의 장난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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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생각의 장난이었다.
1999년 이른 봄....
고등학교 때부터 있어왔던 변하지 않는 삶에 대한 갈망이 그 순간에 결집이 되었는지,
이제는 정말로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 깨달아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그 생각에 갇혀버렸다.
그렇게 갇힌 상태에서 나를 돌아보니,
보통 사람으로서의 삶으로 볼 때는 모범시민은 아니라도 원만하고 법을 어기지도 않고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사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가진 깨달음이란 잣대를 들이대고 보는 순간부터, 점점 나는 가증스럽고 도를 깨달을 수 없는 두꺼운 마음을 가진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존재로 변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런 내가 너무나 싫어서 그 싫은 것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나를 질책하고, 질책해도 여전히 그러한 내가 너무나 싫고 화가 나서 울다 시피 내게서 일어나는 못나고 더러운 모습을 없애야겠다는 결단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려고 어쩌면, 아니 정말로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나 자신과 싸움을 시작했다. 사실 그 싸움은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로 돌아가라고 하면 다시 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렇게 나를 채찍질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결단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끊임없는 망상과, 싫은 생각들, 분노, 짜증, 원망, 나를 정당화시키려는 모든 생각과 몸짓, 그리고 핑계... 자랑하고 싶은 생각, 게으른 자신, 그러다가 언제 또 다른 생각에 넘어가 버려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 등등의 못난 모습들...아아....... 그 끔찍한 생각의 장난들.......
그러한 나의 추한 모습의 반복 속에서 수많은 시간들을 차를 타고 다니면서, 길가의 벽이나 전봇대를 보면 달려가 콱 쳐 박아 죽고 싶은 그 순간들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죽으면 이놈의 아상이 사라지겠지 하고 밤에 술을 마시고 칼을 목에 대었지만, 차마 찌르지 못하는 나의 용기 없음을 삶에 집착하는 추한 모습으로 혐오하면서 무너져 내리던 시간들이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얼마나 그 싸움에 매몰되었던지 나중에는 너무나 힘이 들어서 차라리
“그냥 이렇게 그냥 살자. 까짓것 못 깨닫고 망하면 되지.”
하고 그만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온통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면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 생각이 내 머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태를 지금 생각하면 화두선(話頭禪)에서 말하는 화두를 성성하게 잡는 의단(疑團)의 상태와 같았다. 그 생각을 뗄려고 해도 떼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나는 그 고통을 너무나 성성하게 잡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생각은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사이에 끼여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나의 삶은 오직 눈물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옥과 같이 흐른 어느 날 어느 순간,
그냥 한 생각이 순간의 화살처럼 휙 지나갔다.
“생각이네?”
그 순간 그 사 개월의 시간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내 머릿속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마치 뽕(?)을 맞은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통의 사 개월, 아니 그 이전부터 깨닫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에 대해 모아둔 모든 생각의 자료가 다 이 ‘한 생각’이 지은 장난이었을 뿐임을 알게 되었다.
깨닫고자 한 것도 생각이요,
깨닫고자 하면서 만든 잣대도 생각이요,
그것으로 비교하여 내가 잘못되었다고 나무라는 것도 그 생각이요,
그 잘못하는 것을 몸서리치고 후회하는 것도 역시 그 생각이요,
뉘우치면 뉘우칠수록, 그 깊은 곳에서 싸늘하게 올라오는 딱딱한 생각, 그 역시 그 놈이요,
그것을 없애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그 생각이요,
잘난 모습의 상을 그리고 있는 것도 역시 그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전봇대에 콱 쳐 박아 죽고 싶어 할 만큼 자신을 더럽게 여기는 놈도 바로 그 생각이었던 것이다.
생각 그 한 놈,
그 한 놈이 다 저질러놓고, 자신은 아닌 듯 핑계를 대고 있더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난 척할 곳이 있으면, 체면 불구하고 얼굴을 내밀고는
조금이라도 책임을 질 곳에는 언제 사라졌는지 쏘옥 사라지고는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 그 냉정하고 뻔뻔스러운 그 놈.
그러면서 마치 다른 얼굴이라는 듯이 나타나 또 나를 쥐어짜고 후회하게하고 눈물을 흘리며 코스프레하는 그 놈...
그 모든 게 생각이란 그 한 놈이 짓고 털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생각과 싸우는 일을 그만 두기 시작했다.
아니 절로 그만 둬졌다.
물론 그 순간의 뽕 맞은 느낌이 서서히 사라지며 과거의 습이 올라와, 내 나이의 세월만큼 쌓은 시비의 습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비록 필요했지만, 결국 나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졌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되고 싶은 모양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는 그 잣대를 가지고 자신의 삶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하고, 그 잣대에 들어가지 못할 때에는 아파하고, 자신을 쥐어뜯고, 또 후회하고, 싫어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잣대는 너무나 당연시되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도 그 잣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교육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여기고 살아오고 또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잣대라는 것이 자신이 받아들이고 추론하여 생성해낸 것이지만, 애초부터 삶이란 인연 속에서 얻어진 것이지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어서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살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자유와 평화가 오는지 알지도 또 직접 살아 경험해보지도 못했으면서도, 단지 다른 이들이 특히 어른들이 그것이 옳다고 하니, 또 어른들이 어른들이나 좋은 말, 교훈 등을 마음에 새기고 본받고 행하라 하니,
좋든 나쁘든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권위에 그렇게 길들여져 믿어버린 생각의 잣대를 마치 내가 만든 것처럼 우리의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놓고는, 새롭게 들어오는 정보 하나하나마다 옳네 그르네 하는 딱지를 붙이고 시비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처럼 그 권위의 잣대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지도 모르는 채, 습관처럼 그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옳은 잣대라고 믿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 잣대가 우리를 후려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과 그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과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다면 어찌 그러한 생각이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게 놔두었겠는가?
생각이란 놈은 기억의 집적체(集積體)이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은 이미 사라진 것이고, 그 당시에만 적용되는 죽어버린 가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권위에 굴복한 생각이란 놈은 그것을 마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절대적인 가치요 잣대인양 들고는 매순간의 삶에 시퍼런 날을 세우고 우리를 지켜본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상관없이 우리의 삶은 절대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 즉,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해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이 생각이란 놈은, 이미 사라진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현재의 삶에 대입시키고는 비슷한 모양이 있으면 마치 우리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처럼 여기게 하여 그 잣대에 맞으면 우쭐거리게 하고 그렇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후회하게 하고, 뉘우치게 하고, 스스로를 쥐어뜯게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생각이 엉터리 판단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엉터리 재판정에 서서 벌벌 떤다. 마치 자신이 진정한 죄인인 것처럼.......
그렇게 이 생각은 지금 현재에 맞지 않는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판단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워낙 오랫동안 생각의 권위에 길들여 왔기 때문에 생각의 잣대가 엉터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늘 우리의 현실의 삶, 그리고 나의 그 순간의 생각과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도 당연히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이제부터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잘못된 것은 우리의 지금의 삶이 아니라 그것을 과거의 어느 틀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오직 나만의 생각이기 때문에, 나만의 생각으로 만든 그 잣대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법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만의 인연과 생각이 있으니까.
그리고 또 비록 다른 사람과 같은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때의 인연에 맞는 생각이지 지금의 현실에는 이미 지나간 잣대일 뿐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늘 부산하고 고통스러운 이유가 이 생각이란 놈은 항상 자기만 옳은 줄 알고 우리를 다그치고, 우리는 마치 노예처럼 매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물론,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조차도 그 생각에 맞춰 시중을 들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또한 우리의 생각이 늘 부산하고 고통스러워졌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잘못된 것은 우리의 순간적인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지도 않는 머릿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현재에 성성히 살아있는 진리처럼 착각하고는 매 순간 현재의 것을 마구 난도질 하면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 즉, 과거의 생각,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판단기준은 단 한 번도 현재인 적이 없는 과거의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생각은 매 순간 살아서 펄펄뛰는 지금의 일들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도 없고 그것에 대한 판단기준이 마련되어있지도 아니하다.
그런데도 마치 생각은 자신의 기준이 현재의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우리는 그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매순간 살아있는 자신을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생각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그날...
그것을 안 나는 그때부터 생각을 내버려두기 시작했다.
생각이란 놈은 원래가 없는 놈이기 때문에 어떻게든(칭찬을 하든, 나무라든) 자기를 건드려주기를 원하고 그래야 생각인 자기가 존재한다는 정체성(正體性)을 느낀다.
이것이 생각이 우리를 자기의 틀에 자꾸 집어넣으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즉 순간적으로 생기고 사라지는 티끌 같은 생각이 생명을 가지려면 자신이 존재한다고 여기게끔 자꾸 건드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을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생각에 길들여져 와서 의심도 하지 않고 생각의 말을 듣는 종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생각에 대해선 조금도 비판하지 않고, 도리어 생각이 우리의 종인데도 불구하고 생각이 우리의 주인이 됨에 조금도 의심치 않고 생각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파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렸으니, 생각은 늘 우리의 위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내 생각이라고 하지 내가 생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은 내 가방, 내 집, 이라고 하는 것처럼 내 생각이다. 소유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 역시 우리에게 인연된 것일 뿐 저할 대로 내 버려두기만 한다면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기존의 생각은 어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 때에 그것이 자신의 잣대에 거슬리거나 뛰어넘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달이 나는 놈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생각은 어찌하든 거슬리는 것은 내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은 따라가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그것이 바로 시비분별이다.
깨달은 자들이 시부분별을 그치라고 하는 것은, 이 시비분별이 이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만들어낸 연극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로지 이 생각의 잣대로만 판단한...
그리고 이 생각은 이 우주의 뜻이 아니라 한 개체가 살아온 아주 작고 좁은 세계의 경험으로만 이루어진 정보의 조합이다.
생각이 이러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생각이 어떻게 하려고 하든 말든,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내버려 둬버리면,(내치거나 따라가지 말고 그냥 생각일 뿐...) 생각은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없는 놈이니까.
그렇게 과거의 잣대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생각은 매순간 지금의 삶에만 반응하고, 그 반응은 나의 삶을 받쳐주는 것으로 더 이상 나를 시비하지 않게 되고 주인노릇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분별하는 것은 생각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다.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그 생각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과거의 잣대로 존재하지도 않는 망상이요, 과거의 망령이다.
깨달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생각이 분별판단하지 않는 우리의 순간순간 인연에 즉하는 그대로의 삶이다. 마조스님은 그것을 일러 즉심(卽心)이라 하고 그 즉심으로 살 때에 부처와 다름이 없다 하여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였다.
즉심(卽心)은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고 내버리고 싶은 것들...
화, 미움, 짜증, 분노, 원망, 게으름, 외로움, 불안, 기쁨, 행복 등등...
그때그때 인연에 반응하는 그 순간의 그 모습을 말하고,
즉심시불(卽心是佛)은 그것이 바로 매순간 진실한 우리의 모습이요, 완전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가 났음을 예를 들면,
화가 났다는 것은 그냥 화가 났음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실한 현재의 모습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는 나쁜 것이니까 그런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이 바라고 있는 상에 맞추어 화를 없애려는 노력을 하거나, 화를 따라가려는 생각을 막는 것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특히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행동은 지금은 내가 화속에 있는데, 화속에 있는 이것이 지금의 현실인데, 생각은 화에서 벗어나려는, 즉, 현재에 있지 않는 모습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화를 내는 내 상태가 실제가 아닌 잘못된 것이고, 지금 실재하지 않고 오직 그 생각이 그림 그려놓은 그 꿈같은 상태가 제대로 된 실재하는 현재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었을 때에 현재에 있다는 것은 화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좋다 나쁘다 분별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즉, 화만 있지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이 현재의 그 인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화는 자기가 있을 만큼의 시간을 살고 사라진다.
그리고는 다른 생각이 들어와서 살고, 또 그것도 분별하지 않으면, 제 살만큼 살다가 가고, 또 다른 생각이 들어와서 살다가 가고, 그렇게 우리는 매 순간 세상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순간순간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실재 삶이요 우리의 진실한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그 일어나는 생각과 세상의 인연에 그냥 맡기고는,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간섭하거나 피하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참된 모습인 것이다.
일어나는 무수한 생각이나 감정을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바라보고 깨어있으면,
그 생각이나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그것이 알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런 집착도 내침도 없기에,
즉, 생각을 두지 않기에,
그것이 사라지면,
자신에게 무슨 생각들이 오고 간지를 모른다.
즉, 어떤 생각들이든 습(習)을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각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늘 여여하게 깨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는 말과 같은 것이며,
또 달마어록에서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사물에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없으며, 거스름과 순응함도 없다.
(이때의 '사물'은 우리 안(內)의 사물을 가리킨다. 곧 위에서 예로든 불안이나 게으름, 외로움, 화(분노), 미움, 짜증 등등을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이 있다.
(자신에게 맡긴다 함은 과거의 생각의 잣대를 가지고 현재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인 생각과 감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 취하고 버리려한다는 말이다.)
만약 생각을 열고 사물에 맡길 수만 있다면 이것이 곧 이행(易行 : 순조로운 행)이며,
그것에 저항하여 사물을 변화시키려 함이 곧 난행(難行 : 거스르는 행)이다.
사물이 오면 오는 대로 그에 맡겨 거스르지 말고 떠나면 떠나가는 대로 내어버려 두어 좇지 말라.
이를 두고 도(道)를 행한다고 한다.”
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전심법요(傳心法要) 마지막 편에
배휴가 황벽스님에게
“어찌하면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황벽스님이
“종일토록 밥을 먹더라도 일찍이 한 톨의 쌀을 먹은 적이 없고, 하루 종일 길을 걷더라도 일찍이 한 조각의 땅도 밟은 적이 없는 것과 같으면 이럴 때에 아상과 인상 등이 없어, 종일토록 일체의 일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경계에 미혹되지 않으니 바야흐로 이름을 자재(自在)한 사람이라고 한다.
어느 때나 어떤 생각이라도 일체의 모양을 보지 말고 전후 삼제(三際 :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지 마라. 전제(前際)는 가고 없고 금제(今際)는 머물지 않고 후제(後際)는 오지 않았으니, 편안하게 앉아 흐름에 맡겨 구속되지 않으면 바야흐로 이름을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의 삶을 두고 말하기를
“깨달은 사람의 삶은 하늘을 날아가는 새와 같이 자취가 없다.”
고 하는 것이다.
매 순간 인연에 응하여 일으키는 생각과 감정은 그저 인연화합일 뿐 그것에 시비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은 매순간의 인연에 응할 뿐 과거의 생각과 감정은 절대로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화니 미움이니 짜증이니 분노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살아있는 괴물이 되어 그것에 대한 기억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러한 이름들은 과거의 기억의 잣대로 분별하는 생각이 이름 붙여놓은 것이지, 실제로 우리 속에 이름과 같은 그러한 어떤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있는 보기 싫은 모습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 없애려는 생각이 보기 싫은 모습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번도 고정된 모양 없이 이 한 법의 인연으로 살아가는 이 한 법 그 자체로,
언제나 살아서 펄펄 뛰는 생선처럼, 생동하는 이 한 법의 인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다른 이들의 모습도 그렇게 보게 되고, 그러면 각자 자신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듯 다른 이들의 인연도 소중히 여기면서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야 말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주는 것으로 자신에게서는 버리는 것이니 매 순간 인연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시비를 버리는 것만 한 보시만큼 법을 잘 따르는 바라밀은 없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 이 우주에서 가장 큰 계는 바로 인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연기법은 이 한 법 자체이니 인연을 따르는 것은 연기법을 지키는 것이니 이만한 지계바라밀 또한 어디에도 없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 인욕은 욕됨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가장 큰 인욕은 자신에게 오는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 정진은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니,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만큼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는 바라밀은 없다.),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 선정은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이니 인연에 시비하지 않는 것만큼 삿되지 않는 선정이 있겠는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 반야는 지혜다. 이 한 법의 지혜, 즉 인연을 따르는 것만큼 큰 지혜는 이 우주에 없다.)
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실제로 우리의 참 모습이요, 참 삶이다.
우리 자신과 세상은 너무나 완전하다.
다만
생각이란 놈이 과거의 기억의 분류의 잣대로
분별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좋고 나쁨이 생기고,
좋고 나쁨이 생기니까,
가지거나 버리고 싶은 것이 생기고,
가지거나 버리고 싶은 것이 생기니까,
우리 자신과 세상이 불완전해 보일 뿐이다.
즉 문제는 우리 자신과 세상이 아니라, 분별하고 비교하는 그 못된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道)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생한 삶에 바로 맞닿아 있고, 아니 우리의 매순간 이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 그 생생한 삶이 그대로 도다.
그리고 만약 삶을 떠난 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다시 예를 들면,
만약 화를 내었을 때
그 순간 화내는 것은 나인데
또 누가 있어 내가 화내는 것을 나쁘다 하는가?
화낼 때의 자신인가?
아니다. 그때에는 그런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화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바라볼 틈이 없고,
그것이 나쁘다 좋다고 판단은 더더욱 할 수가 없다.
다만 생각이 거칠어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해,
그 모든 것이 지나 사라지고 난 뒤에
한 생각이 일어나 이미 죽어버린 과거 인연의 미이라를 들고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한 순간에 하나의 행위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를 낼 때는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를 하지 못하므로 화만 존재할 뿐,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그 기억을 놓지 않고 화낸 행위가 끝난 그 순간 그것을 시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너무나 빨라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여 마치 화를 내는 것과 그것을 판단하는 것을 동시에 한다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착각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스스로 나쁜 줄 알면서 그 짓을 한다고 착각하고 때론 그것 때문에 또 자신을 쥐어뜯기도 한다.)
세상과 우리의 삶은 이처럼 인연에 응하여 흘러갈 뿐이고 그냥 그럴 뿐이다.
그런데 생각이란 놈이, 방금 말한 것처럼 화를 낸 시간이 끝나고 모든 것이 변했는데도, 과거의 것(화낸 자신의 모습)을 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고 분별 시비하는 것이다.
화를 낼 시점과 모든 상황이 다 변한 다른 시점에서 앞의 화낸 시점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고 있는 그 순간에 그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있었다면 왜 화를 내고 있겠는가?
우리의 생각은 한 순간에 두 가지를 함께 하지 못하고, 또 그때에는 그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에(그 당시엔 그것이외엔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를 내었던 것뿐이다.
만약 그때에 다른 최선이 생각났다면(그것 이외의 행동을 할 수가 있었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늘 최선을 행하지 최선을 두고 차선은 절대로 행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지나 그 행함의 결과가 나오면 이놈의 한 생각이 결과를 가지고 그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 시점으로 가서, 결과를 모르는 그 생각에 왜 결과를 몰랐느냐고 시비를 하는 것이다.
이 생각과 같이 우리는 스스로에게, 또는 자녀에게, 또는 후배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왜 그때 지금과 같은 결과를 생각하지 못했느냐?”
고 시비한다.
우리는 점쟁이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매순간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결과는 그것이 끝난 시점에 생기는 것이지,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에는 그런 것은 이 우주에 존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생각은 그처럼 환경이 이미 지나 모든 것이 달라진 시점에서, 과거의 기억의 잣대를 들고 현재의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는 당시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쥐어짜며, 소환할 수 없는 그 당시의 일을 소환하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이미 지나 가버려 있지도 않는 사실을, 이미 과거에 세워버린 지금은 있지도 않는 기억에만 존재하는 잣대로 판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을 떠난 도의 잣대요,
이런 생각에 휘둘려 자신을 시비하고 세상을 시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을 떠난 도를 행하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그 순간, 사개월동안, 아니 그전부터 나의 모든 삶에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생각의 장난임을 알고 생각을 내버려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게서 고통은 사라져갔으며 있는 그대로 살게 되기 시작했고,
자성이나 불성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나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삶이 바로 자성이요 불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촛불과 빛이 둘인 것 같으나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듯이,
비록 우리가 자성에서 나왔으나 자성과 우리가 떼어놓을 수 없고,
또,
우리와 우리의 행동과 생각과 삶이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라는 이치인 것이다.
그리고 분별을 하지 않게 되니,
분별하지 않음이 바로 공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성이 공하다 함은,
자성이 허공과 같이 텅 비어서,
허공이 세상 우주 만물을 담고 있듯이
모든 것을 다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하지 않음이 바로 공인 것이다.
우리 역시 비록 과거의 잣대가 지금의 삶을 시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의 삶은 순간순간 인연에 즉하여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니
(분별하는 생각이 없으니까)
우리가 바로 자성이요, 자성의 공한 이치인 것이다.
모든 것이 생각과 생각들을 내버려두는 데에서 시작한다.
내버려둔다 함은 없애려 하는 것임이 아니다.
그리고 또 따라간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냥, 매순간의 인연에만 반응하여 사는 작용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라는 것을 알고 시비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뇌는 수많은 인연의 삶을 저장하여 다음 삶을 준비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런 준비는 다음 인연에 응하는 내 모습으로 나타날 뿐 거기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처럼 우리의 삶은 인연에 응하여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이것이다 하고 보여주려야 보여줄 수도 없는, 그냥 순간 순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인연의 모양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라고 부처님께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하셨으니, 곧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라는 뜻이다.
인연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그냥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그러한 흐름의 한 단면을 잡고 과거의 것과 비교하여 분별하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실재의 세상은 과거의 것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그것을 알고 스스로 분별하지 않으면 세상은 그냥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음을 보고 늘 마음이 여여할 것이다.
마치, 세상에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때론 태풍처럼 격렬하기도 하고, 따뜻한 봄바람처럼 감미롭기도 한 것이 세상의 일처럼, 그냥 그러한 일이 그처럼 일어났다 사라졌을 뿐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모양일 뿐이니, 그렇게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이미 화석이 된 과거 기억 속에 빠져 고뇌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삶을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살아갈 때
이 그냥 그럴 뿐인 이 삶은 너무나 기적 같고,
또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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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윤기붕님의 댓글
글이 길어 글자크기를 좀 키웠습니다.
키우고 보니 보기가 훨씬 편하네요.
다음부터 키워서 올리겠습니다.
도반님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법회를 하지 못하지만 보고 싶네요^^
법회를 못하기 때문에 글로라도 소통하고자 매일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하시고,
이러한 일이 끝나면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반야지님의 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
요새 적천단상이 풍요러워 집니다.
생각, 그놈에 대해서 다시 숙지하도록해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꾸벅()()()
선생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법회때 뵙겠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총무님께서도 건강 잘 챙기시고 건강한 얼굴로 만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