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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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것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2,134

20-03-21 15:03

본문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것

 

수행은 마음을 고요히 하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것을 알려면 진리가 마음밖에도 마음 안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가 마음밖에도 마음 안에도 없으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마음이 곧 진리다.”

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 밖에 있다고 하면, 마음 바깥세상이 따로 있는 줄 안다.

그러한 것은 없다. 세상 만물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우리가 바깥세상을 인식하지 않으면 내게는 그러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인식하든 하지 않든 이 한 법으로 된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들 끼리 서로 인연이 되어 흘러간다.

그래서 실제로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여 내 세상에는 없는 것들이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내게 영향을 주고 내가 변하는데 기여를 하며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에 존재한다.

다만 우리의 인식 기능이 제한적이어서 우리의 물리적인 경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인식하지 못하여 내가 인식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의 분별하는 마음은 늘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과 바깥이 둘인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우리가 사는 좁은 세상은 물론이요. 우주전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에 우주전체가 존재한다는 그림이 없으면 그 우주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에서도 밝혀진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우리가 인식하기 전까지는 내게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인식해야만 내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그러니 대상과 우리가 어찌 분리가 되어 있을 것인가?

그러니 마음바깥이라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 마음 안에 있다고 하면, 마음 안이 또 따로 존재하는 줄 안다.

하지만 매 순간 일어나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비록 우리의 마음이 수많은 갈래로 분주히 움직이고,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가지만, 그 많은 생각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일어날 그 당시에는 온통 그 하나밖에 없다.

 

이처럼 찰라 간이라도 시간을 두고 생각들이 하나씩 일어나지,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즉 한가지의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또 그 생각에 대한 또 다른 어떤 생각에 인연되어 일어난다.

그래서 가끔 뜬금없는 생각도 일어나지만, 그 역시 우리의 아뢰야식이 그 당시 생각에 인연이 되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그처럼, 서로 다른 모습의 생각들이 서로 인연이 되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지, 마음속에 또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마음 없다는 것은 이어져 일어나는 모양이 다른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둘 셋 넷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모두가 한 놈이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매 순간 일어나는 그 생각은 바로 자성의 법칙과 작용에 의한 발현이니 ‘마음과 그 마음의 움직임 자체가 바로 진리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이 만들어낸 이 삼라만상과 우리와 우리의 삶과 생각들 역시, 그 자체가 바로 진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삼라만상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삶은 삼라만상을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남의 일을 보고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은 남의 일을 보고 있고,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분별하고 있으면 우리의 삶은 분별하는 삶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우주요, 타인의 삶이요.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바로 진리가 마음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요. 마음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마음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삼라만상과 우리와 우리의 삶과 생각너머 어딘가에 하느님이 존재하듯이, 그렇게 이 한 법인 자성과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요. 있지도 않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안 어디 깊숙한 곳에, 마치 숨겨진 보석같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매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순간순간의 삼라만상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과 삶과 생각 그 자체가 바로 진리요 자성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생각이라는 필터로 각색되어 나는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개인차로 인해 각색이 되어 있음을 알고, 그렇게 각색이 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는 늘 마음이 고요한 것이다.

 

그냥 마음뿐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마음, 그래서 늘 변화하고 한시도 머물지 않는 마음, 그러면서도 늘 있는 그 마음, 이것이 진리가 마음 안에도 바깥에도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 그 자체가 진리라면 마음이 아무리 시끄럽고 어지럽고 엉망이라고 하더라도 시끄럽고 어지럽고 엉망인 그것이 그대로 진리다.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의 삶을 기획하니 우리의 삶 역시 있는 그대로 진리다.

마음이 이러함을 알고 어떻게 흔들리고 뛰어다니고 변덕을 부리더라도 그대로 놔둘 수 있으면 그것이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요함이라는 단어와 어휘의 뜻에 사로잡혀 그것이 꼼짝도 안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본래 그러한 마음을 자신의 생각의 뜻에 맞게 흔들리지 않게 하여 바로 잡으려함이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과 생각을 착각을 한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아 내가 있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저 인연을 비춰주어, 이것이 나타나면 이것을, 저것이 나타나면 저것을 그냥 비추어줄 뿐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란 놈은 그것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마음은 보지 못하고 그 마음에 비치는 모양만 보고 따라다니면서 스스로 마음이 어지럽다고 여기고, 그 모양을 가만히 없애려 시비한다.

 

하지만 거울은 본래 비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다 비춰주는데, 그것을 없애려하는 것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은 되지도 않은 일에 부산하니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본래 자신의 모양이 없어 세상의 인연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을 알면, 그 생각은 그 마음을 어떻게 하려 하지 않고 또 마음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모양을 그냥 바라볼 뿐 시비분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곧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수행이다.

 

하지만 진리를 얻기 위해, 진리라는 어떤 상을 만들어 놓고 그 곳을 향해 가는 수행은 그 모든 것을 두고 분별하지 않는 수행보다 오히려 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많은 세월을 분별하고, 인정받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노예가 되어서, 항상 어떤 무엇이 되어야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되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하는 삶을 강요받으면서 살아왔고,

또, 그러한 생각에 대해 의심이 없이 살다보니, 어렵더라도 그것이 참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로만 알고 살아왔으며,

그러한 세월이 오래이다 보니 습이 들어 시비하는 것이 시비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더 쉬워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본래마음이 인연을 그냥 비출 뿐 그것을 추구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고요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비치는 것마다 시비하여, 좋은 것은 얻어야 하고 못한 것은 버려야하는 생각의 습을 키워 그 생각의 바람을 채워주기 위해서 늘 목마른 세월을 살아오다보니,

어느 듯 마치 생각의 바람을 채워주는 것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처럼 습이 되어, 생각의 시비분별에 도구가 되어 생각이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 쫓고 쫓기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비록 그렇게 쫓기는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면서도, 그러한 삶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옳은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에 속아 항상 시비 속에서 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 되어야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에 매몰되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처럼 분별하는 마음, 즉 생각이란 놈은 본래 없는 것으로 마음 위에 기생하는 놈이어서, 자신이 존재함을 느끼려면 항상 뭔가를 문제 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는 무언가를 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분별하고 시비하여 우열을 정하고는 뭔가 낫다고 여기는 곳으로는 노력해서 나아가고, 만약 자신의 모습에서 부족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없애고 완전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안심을 한다.

 

이처럼 분별하는 생각이란 놈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문제 삼지 않거나 어떻게 하지 않는 그러한 삶에서는 도저히 불안해서 살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우리를 볶아 댄다.

 

하지만, 한 곳을 향해 가는 수행은,

진리가 마음 안 깊숙이 있는 것도 아니요.

마음 밖 저 멀리 우주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매 순간 일어나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진리요.

그 마음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삶,

즉 매 순간 끊임없이 인연으로 변해가는 것이어서

‘한 곳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하기에 한 곳에만 존재하는 그런 진리를 향한 수행은 신기루를 쫓는 사막의 여행자의 길과 같이 끝이 없고, 종내 진리의 자취조차도 얻을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두고 분별하지 않는 수행은,

세상은 모두 진리에서 나왔고 그 나온 모든 것이 진리 그 자체로써,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모두가 이 한 법의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비록 이 수행의 길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처음엔 너무나 막막하고 어렵게 여겨지겠지만,

그렇게 설쳐대는 어지러운 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비춰줄 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설쳐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점점 자신 속에 잠자고 있는 거울과 같은 본래마음을 깨울 수가 있고, 종내는 그냥 비춰줄 뿐, 거울에 비친 모양을 쫓아다니며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 고요해질 수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바깥세상의 모든 것도 역시 분별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가 있으니, 왜냐하면 바깥의 모든 것 역시 이 한 법이 인연의 세상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서 고요한 자는 바깥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역시 바깥으로부터도 고요해진다.

 

그리하여 그 어려운 수행은 끝이 난다.

 

이것이 참 수행이다.

마음 안이니 마음 밖이니 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곳에서 있지도 않은 마음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을 그만두고, 매 순간 일어나는 세상의 인연이 이 한 법의 일이요, 그것을 비춰주며 매 순간 함께 하며 어묵동정지(語黙動靜止)하는 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이요, 우리의 삶이요, 진리임을 알고,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시비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이것이 바로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요, 분별하는 마음에서 떠나는 것이요.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따로 마음을 고요하게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세간의 말로

“마음을 고요히 한다.”

는 것이다.

 

이제 내버려두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내버려두기 위해선 일어남을 인정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일어남을 인정한다함은 따라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느낀 것들을 되돌아보면 일어난 생각이라고 해서 다 따라 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일어나도 그냥 문제 삼지 않으면 그냥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냥 사라진 생각들에게는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라.

 

그리고는 그냥 흘러간 생각들을 문제 삼지 않고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동안에는 일어나는 생각 중에 그냥 흘러 보내지 못하고 걸리는 생각에도, 그리고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무심코 바라보지 못하고 걸리는 일들에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 보라.

이것이 바로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듣고 행한다고 해서 바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옳고 그름의 시비에 잡혀 살면서 그것에 걸리는 생각이나 일들은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항상 문제를 삼고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것이 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처럼 바로 내 버려두지 못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인내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나 일들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남을 인정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그러한 생각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 그것을 내버려둘 수 있고, 그것이 한 번 두 번 경험하면서 시비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냥 일어난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가 계획된 어떤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계획된 생각은 사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가치를 중시하는 분별하는 생각은 별로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이 마음에 들면 쓰고 들지 않으면 그냥 버릴 뿐,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지?’하고 자책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지나, 마음에 들어서 쓴 계획이 결과가 좋지 않으면, 좋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생각은 마치 미래인 지금의 현재를 그 당시에 이미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을 하고는, 그때의 생각이 지금의 이 현실까지 대비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쥐어뜯고 있기는 한다.

물론 이 놈은 한 놈인데, 핑계와 시차에 따라 변신술을 기가 막히게 하는 놈이다. 그리고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옷을 바꿔 입고는 자신이 아닌 척 등을 돌리고, 그 다음 생각은 바보같이 좀 전의 자신에게 속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지만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선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명을 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하지 않은 척 시쳇말로 ‘쌩 깐다.’는 행위를 하듯이,

과거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과 미래에 할 생각이 같은 한 놈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책임 질 일이 있으면 더욱 유난하게 자신이 아닌 척 과민하게 반응하며 과거의 생각에 책임을 전가하여 쥐어뜯고 괴롭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미래를 위한 후회라고 하고 뉘우침 또는 반성이라는 말로 미화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모든 생각과 일들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생각들이나 일들이고, 결과 역시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하더라도 인연에 따라 어긋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우리와 우리의 생각과 일들이 일어남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남을 인정하라는 말은,

일어나는 생각이 좋고 나쁘다는 측면에서 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는 그런 생각이 일어날지 절대로 모르고, 또 일어나는 것 역시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를 인정하라는 말이다.

 

우리의 인식기능은 어떤 생각을 할 당시에는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 일어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모른다.

즉 생각을 하는 주체이지 그것을 판단하는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능력의 한계이고, 또 이 우주 역시 매순간 그것만 있을 뿐, 그것을 판단하는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매 순간의 인연이 다음의 인연으로 끊임없이 변해갈 뿐, 판단하거나 과거의 과정을 되짚어보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뇌에는 기억이라는 기능이 있어 과거의 생각을 떠올릴 수가 있고, 그 과거의 생각을 현재의 관점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생각도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금의 세상이 어떤 인연의 모습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매 순간만 있을 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이 현재의 기억이란 놈이 과거의 것을 반추하면서 마치 현재의 것을 과거에서 미리 알고 고칠 수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서는 현재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미련한 우리의 생각은 과거와 현재를 두루 섞어 마치 과거가 현재에도 있거나, 현재가 과거에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우리의 생각이 착각할 수가 있는 것이, 삶은 대부분 큰 변수가 없는 이상 비슷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나면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하듯이 늘 그러하니, 이 생각이란 놈은 과거를 반추하면서 늘 그런 것을 알 듯이 과거에도 왜 미리 알지 못했는가 하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의 착각일 뿐,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예언이라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 이어지는 것을 종합하여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 것일 뿐, 100% 맞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밥을 먹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일어났는데, 아니 아직 잠 속에 있는데도, 큰 변수가 생겨 나를 깨워 일어나게 하고, 너무나 급해 밥은커녕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가는 일도 있다.

물론 이런 일은 아주 드문 일로, 보통은 아침에 일어나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통계를 내어 예언이니, 사주니, 해몽이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측한 일도 사실 세밀히 들어가면 똑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세수하는 물의 양도 다르고, 얼굴을 문지르는 횟수도 다를 것이고, 밥의 양도 다를 것이고, 또 그 맛도 다를 것이다.

다만 그러한 것은 비슷하니 같다고 여기고 큰 문제를 삼지 않을 뿐, 세상에는 어떤 것도 같은 것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일어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또 내게 일어나지 않은 것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숭산스님의 ‘오지 모를 뿐’이 바로 이런 뜻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던지, 또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어떤 인연이 있든지 결과는 찰라 간이라도 시간이 지난 후에라야 비로소 알 수가 있고, 또 그러한 것을 좋으니 그르니 하고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분별하는 요놈의 요상한 마음은, 일어난 결과만 놓고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서, 결과를 알았으니 원인도 알 수가 있지 않느냐는 무식한 생각으로 미리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우리를 닦달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고 또 닦달한다.

 

이처럼 우리와 세상의 이치가 이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뜬금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조절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일어나는 그 수많은 생각의 인연과 일들의 인연을....

 

그런데도 과거를 기억하는 그 놈이 이것을 현재 시제에도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아! 그때에 이렇게 했으면.... 저렇게 했으면 일어나지 않을 터인데...’

하고 마치 자신이 미리 그것을 알 수가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교만을 떤다.

 

내가 인정하라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정하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음을 알 수가 있고, 이미 일어나버린 것 역시 지나가버린 것이니 또한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모든 생각들을 내버려둘 수가 있고, 그 생각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일어나는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세상의 어떤 것도 잠시도 내버려두지 못하고 끊임없는 시비 속에서 뒹굴 것이다.

 

일어남을 인정해야 모든 시비와 분별, 나아가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는 삶이요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삶은 선택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결과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설사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인연으로 엮여 드러날지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설사, 일어나는 생각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내어 치는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그 뒤의 결과는 또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세간의 삶에는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불행한 일을 당할 수가 있고, 죽일 놈 같은 사람도 오히려 잘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행이니 잘 사느니 하는 것 역시, 각자의 분별하는 관점에서 보는 편향적 가치기준일 뿐이다.

오히려 그러한 기준 때문에 분별이 늘고, 서로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는 다툼이 일고, 또 좋은 것은 취하지 못해서, 나쁜 것은 버리지 못해서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번뇌가 죽 끓듯 힘들어한다.

 

숭산스님이 왜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이라고 하였겠는가?

 

우리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살아야 하니 내게 일어나는 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 되기 때문이라는 억울한 코스프레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 살아가듯이, 하늘을 날지 못하기 때문에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지 않듯이, 물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헤엄치지 못하면서 물에 뛰어들지 않듯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에 맞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그리고 설사 한 생각으로 용기를 내었다 하더라도 결과가 그것이면 용기를 낸 시점은 이미 지나갔고 현실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니, 그 결과는 우리가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 하나의 일만 치르고 우리의 생을 마감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그 마음속에는 욕심이 들어 있고, 그 욕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삶은 심상치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고,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는 인연으로 살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새색시같이 받아들이고 산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늘 고요한 것이다.

 

따라가지도 말고 내어 치지도 말고 그냥 인정하라, 그냥 일어났을 뿐이다.

그렇게 일어났을 뿐임을 인정하면 어떻게 하려는 마음이 일지 않는다.

그러면 내버려둘 수가 있고 종내는 어떤 생각이 왔다 갔는지 관심도 없어진다.

그러면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 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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