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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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緣起法)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616

13-06-29 17:14

본문

 

연기법(緣起法)

 

 

"세존이시여, 연기법은 세존께서 지은 것입니까? 다른 이가 지은 것입니까?'

"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이가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법계로서 상주하는 것으로,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을 성취하였으며, 여러 중생을 위하여 말하였으며, 열어 보여 드러나게 하였다."
                    (잡아함경 권 12의 제 299경)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며, 만약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중아함경 권 7의 상적유경)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은 깨달은 사람이, 즉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나오든 아니 나오든 우주 법계에 상주하는 법이라 했고, 그 법인 연기법을 알아야 법을 본다고 했다.

 

우주 삼라만상에 상주(常住 : 영원불변하는 것)하는 것은 오직 진여불성이다.
본성이라 하고, 불성 불심 자성 도 등등 으로 부르니 그저 그것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라, 어떤 이름을 붙여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똥이니 개니 손가락이라해도 상관 없다.그것은 그저 그것일 뿐이고, 삼라만상을 만들고 함께 하며 또 삼라만상을 거두어들인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법계로 상주한다.'고 하신 것은 바로 연기법이 진여 법성임을 말씀하신 것이고 연기를 알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안다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 사후 여러 종파가 생기면서.
연기법도 종파에 따라 개념을 달리 하여 다양한 연기설이 생겨나는데.

무명의 업식에 의해 서로 연기한다는 업감연기(業感緣起),
중생의 업식의 주체인 아뢰야식에 의해 연기한다는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일체제법의 실체인 진여의 성품에 의해 연기한다는 진여연기(眞如緣起),
만법이 본성의 발현이므로 만법이 곧 본체라, 만물이 서로 인이 되고 연이 되어 끝없이 연기한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
법계연기에서 나아가 법계의 구체적 실체를 지, 수, 화, 풍, 공(空), 식(識)의 6대(六大)라고 인정하는 6대연기(六大緣起) 가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을 적는 이유는 이런 다양한 연기설을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사실 복잡함에 머리 아프고 잘 모른다.
다만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열거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할 내용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나는 부처님의 견해처럼 이 도리를 알고보니 삼라만상에 오직 존재하는 것은 연기법임을 알았다.

다르게 말하면 진여연기와 상통하는데,
진여연기는 진여의 성품에 의해 모든 만물이 나오고 성주괴멸하는데 그 법칙이 연기법이라는 것이다.
즉 만물은 진여본성이 생하고 연기의 법칙에 의해 서로 인연이 되어 생하고 머물고 변하고 낡고 소멸한다는 것이 바로 진여연기이다.

우리를 비롯해 만물이 진여의 성품을 여의지 않는 것은 진여가 바로 만물이기 때문이다.
진여 따로 만물 따로가 아니라 성품이 형상화 된 것이 바로 만물인데,
이는 마치 바다와 물방울과 같은 관계이다.
물방울의 입장에서는 마치 자신이 독립된 존재로 보이지만 바다의 입장에서는 그냥 바다일 뿐이다.
다만 물방울은 바다가 일렁이는 파도에 의해 생겼다 매순간 변하가며 사라지니, 마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시적이요, 또 그런 모양과 특징과 성격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방울이 바다가 아닌 것이 아니니, 
그 모양과 성격이 고정되지 않고 변할 뿐 바다의 성격이 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물방울 그 자체로서 바다인 것이다.

그래서 물방울은 물방울끼리 인연이 되어 모양이 계속 변하지만, 
물방울 자체는 바닷물이니 아무리 모양을 바꾸어도 바다다.

 

그처럼 이 우주 삼라만상도 마찬가지여서
비록 연기에 의해 수없이 바뀌어도 그 자체는 진여의 형상화여서 진여가 아닌 것이 아니다.
즉 아무리 연기에 의해 성주괴공하여도 진여인 것이다.

다만 연기의 작용에 의해 모양만 바뀔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진여 그 자체가 형상화 된 것인줄 모르고 바뀌는 모양에만 집착하여 모양이 실재로 있다고 집착하니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바로 알면 모양은 그저 인연으로 변하는 것일 뿐 영원하지 않음을 알아 집착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만약 변하는 모양을 취하는 것이 다만 연기에 의해 생겼다 사라지는 한정적인 것이라면
우주의 만물이 아무리 셀 수 없이 많다 하더라도 한번의 연기로 모든 것이 끝이 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주가 탄생하고 지금까지도 그 질량과 에너지가 조금도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는 것은 모양이 변하는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모양만 변할 뿐 그것은 끊임없이 연기에 의해 재생산 되고 또 허물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과 연이 만나 과를 이루고 그 과가 다시 인이 되고 연이 되는 무한반복을 하는 것이다.

법계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은 오직 진여본성 밖에 없다면 수없이 변화를 반복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그것 역시 진여본성인 것이다.


즉 진여 본성이 연기를 하는 것이다.

바다가 물방울이 되어 수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진여가 모양을 취하여 수없이 모양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진여본성의 성질마저 연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기에 의해 형상화된 모습만 연기할 뿐이다.

바다가 아무리 바람에 의해 파도를 쳐도 바다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고

또 깊은 바다에서는 바람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조용한 것처럼,

비록 진여가 모양을 취하여 변하는 것 같으나 그 성품은 변함이 없고 깊은 바다처럼 늘 청정하고 고요한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나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 인연된 모습을 띠어 나라고 하는 모양을 취하고 살지만, 
죽으면 모양이 흩어져 나라는 것도 자연히 사라진다.
그러나 나를 이루던 수많은 것(원소)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다른 것들과 연기하여 또 다른 모양을 짓는 것이다.

즉 불변하고 본질은 변하지 않는 진여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저 지금 모습을 가진 나를 있다고 여기고 집착을 하니 죽음이 마치 끝인 줄 아는 것이다.

 

또, 혹 나라는 것이 계속 변하여 존재한다고 하니 나를 이루는 것들이 온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나를 이루던 것들은 분해되어 다른 수많은 것들과 인연되어 수많은 것들로 변하기 때문에 지금 나를 그 때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 원각경에서도 말했듯이
마음은 몸 즉 육근(六根 :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뜻)이 대상인 육경(六境 :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의식)이 만나 생긴 그림자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가 죽어 분해되면 자연히 거할 곳이 없어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윤회니 전생이니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힌두교에서 유입된 것으로 만약 윤회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단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런 것을 무기(無記)라고 했고 무기란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못하면서 수행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나라고 여기던 것이 사라질 뿐 진여본성은 사라지지 않아 계속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 나'는 연기로 모양으로 나타나 계속 변하는 허망한 모양이 아니라 연기의 주체인 진여본성인 것이다.

 

그럼 연기의 법칙은 무엇인가.
연기의 법칙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법계에 상주한다.

우주가 생긴 것도 연기의 법칙에 의한 작용이 있기에 가능했다.
연기의 작용은 무명에 의해서 생겼다고 하지만 아무리 따로 무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연기를 할 재료가 없으면 무명이 작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연기의 재료가 바로 진여 본성이니 연기의 작용이 무명이든 말든 연기의 작용 주체는 바로 진여본성인 것이다.
그래서 무명의 작용과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합쳐 연기의 법칙, 즉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一心)에 대입하면

일심이 있고 일심에 두 문이 있어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 있다.

심진여문은 진여의 성품으로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법문(法門)의 몸(體)이다.
즉 우주 삼라만상과 그것의 근본 몸체를 말한다.
그 성질은 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텅 비어 움직임도 없다.
다만 수연(隨緣 : 인연을 따름)하는 성질이 있어 생멸문의 작용에 의해 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 준다.
그러나 청정하고 고요하여 만상을 분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또한 만상을 차별없이 비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텅 비었지만 만물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텅 빈다는 것은 텅빔마저 비어야 진실로 빈 것이다.

 

심생멸문은 무명의 바람에 의해 생멸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치 바다에 바람이 불어 파도와 물방울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물방울의 입장에서는 생겼다가 사라지니 생멸이 있으니 생멸문이라 한다.

그런데 진여는 생멸이 없는데 생멸문에는 생멸이 있으니 어떻게 일심에 진여문과 함께 있는가?
그것은 비록 물방울은 스스로 생멸이 있다고 생각하나, 물방울은 바다에서 나왔고 그 성질 또한 바다와 똑 같으니 바로 바닷물이다.
그처럼 삼라만상이 비록 전도된 눈으로 볼 때는 생멸이 있는 것 같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으니 그 속에 진여의 성품이 있는 까닭이다.
그것을 여래장이라고 한다.
생멸문에는 여래장이 있어 진여문과 더불어 일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여문과 생멸문을 합쳐서 일심이라 하고 그 일심이 바로 진여불성인 것이다.


그러니 연기법과 이름만 다를 뿐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은 오직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심진여만 보신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이 우주에 두루한 우주의 변화의 원인까지도 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다르게 설명을 하면,
연기법은 부처님 말씀처럼 법계에 상주하고 있어 그것은 나지도 죽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만약 연기법이 자체의 작용에 쓸려 연기를 한다면 연기법이 변질되고 다른 것이 되어버리니 우주는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즉 지금 우주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 수행하고 있는 나도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모든 것이 존재하니 연기법이 법계에 상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주의 변화의 법칙이 조금도 변한 것이 없고 연기하는 것들의 성품 역시 진여의 성품을 빼앗긴 적도 없다.
그래서 또한 진여의 성품을 여의지 않고 변화하는 연기법은 법계에 상주하는 진여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명의 바람에 의해 만물이 연기를 하여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하지만 그 질량이나 에너지 총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법계에 상주하기 때문이다.

상주한다는 것은 비록 모양은 변하나 그 성질과 총량(總量)은 전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진여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이며,

진여의 성질을 여의지 않고 변화하는 연기법은 법계에 상주하는 진여의 심진여와 심생멸을 그대로 가지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진여불성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진여연기이다.

 

만약 연기법을 단순히 법과 법이 만나 변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면 법에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니 소승에서 말하는 업감연기를 말할 뿐이다.

그러나 연기하는 법도 상주하여 불변하는 진여의 성품을 지니고, 
연기하는 각각의 법도 계속 모양만 바꿀뿐 조금도 소멸되지 않는 여래장 즉 진여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 대승에서는 진여연기를 참된 연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진여연기를 두고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 고 하신 것이다

 

우주에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진여불성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변하는 모양은 단지 연기의 작용에 의해 서로 인연이 되어 찰라간으로 모양을 보일 뿐 잡을 수도 없이 변해간다.

그러나 그 연기하는 것들은 진여의 성품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이 끊임없이 연기를 한다고 해도 진여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곧 법계 진여의 세계에 있고 진여의 세계는 오직 진여만이 실재하니 만법이 모양만 다를 뿐 그대로 진여불성인 것이다.

 

그리고 연기법 따로 진여 따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진여불성에서 나오니 바로 연기법이 진여불성인 것이다.

진여불성이라하나 사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기 위해 붙인 것이니 그것을 진여라 한들 연기법이라 한들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법계에 상주하며 변하지 않는 것인데...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이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길게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연기하는 우주의 모든 모양 있는 것(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들이 조금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고,
또 연기법을 모르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재한다고 믿고 그 본질인 진여불성을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것이다.

 

아뭏든 이런 설명이 있든 없든 여전히 진여의 연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 속에 사는 이 몸 역시 연기의 작용에서도, 진여 불성의 성품에서도 절대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 
비록 나고 변하고 죽는 모습이 눈에 보이나 그 성품은 영원불멸의 진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눈썹을 움직이는 것도 그것이요.
말하는 그 놈도 역시 그것이요.
길가고 보고 듣고 아는 것도 역시 그것이요.
이 몸 그대로도 그것이요.
이 몸을 분해하여 눈코구입 그 놈이요.
그것으로 느끼고 아는 것도 그것이고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 분자, 원자, 또 원자를 이루는 미립자도 그것 아님이 없다.

 

그러니 따로 찾지 마라.
지금 이 순간도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오직 그것!
진여불성 아님이 없고

우주에는 오직 진여만 존재한다.

 

그럼 그대는 누구인가?

 

 

댓글목록

천지불인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명백한 이치입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첫 댓글을 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mnb6396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셔요
카스의 네임은 "그냥... 그대로있는 청정화"입니다
카페 가입하면서 네임이 어쩌다가 휘~리릭~바뀌어 버렸네요
공부 할 수 있는 기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ㅎㅎ 반갑습니다.^^
자유게시판에도 카스처럼 일상이나 재밌는 이야기나 유익한 이야기나 아무거나 마음 가는 대로 자주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SummerRain님의 댓글




선생님 한번 읽었어요.

물론 진여본성의 성질마저 연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기에 의해 형상화된 모습만 연기할 뿐이다.

이 부분이 그동안 가장 헷갈렸어요
그리고 석가모니께서 <연기를 보는 자 나를 보리라> 고 하신 말도 납득이 안 되었구요
한 때 연기=공(마음)=중도 라고 공식처럼 외우던 때가 있었는데..ㅋㅋ
연기법 사유로서, 매순간순간의 드러난 현상들이 동시성으로 하나로 짜맞춰진 상태에서 나타난다..는 통찰의 단계에서 더이상 넘어가지 않아 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여영부영 세월을 좀 보내다가 심법공부로 들어섰어요

마음을 통달했다는 분들도 연기에 대해서 제대로 꿰뚫고 있는 분들은 드물더라구요

SummerRain님의 댓글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틈틈히 계속 읽어봐야 할 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진여본성의 성질마저 연기해버리면 연기의 성질도 변해버려 더 이상 연기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리고 진여의 성질은 텅 비고 분별이 없는데 연기해서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면 더 이상 텅 비어 있지도 않을거고 분별이 생겨서 만물이 그 안에서 생기지 못하겠지요.

태정이할배 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우페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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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졸 님의 댓글




연기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긴글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스스로 한번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