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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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 인연의 주체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044

13-06-07 20:25

본문

공(空)이란 말은 마음공부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은 자주 듣는 단어이다.

특히 동양이나 불교성향이라면, 아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 단어일 것이다.

 

공이란 단어는 하나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말을 끌어내려는 이야기는 아주 다양할 것인데 여기 이 글도 역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하나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도 연기법을 말씀하셨고,

그 연기법이라는 것이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셔서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근본 법칙이다. 그 연기라는 것이 쉬운 말로 상호 법칙이다. 즉, 세상 만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관계....

 

참으로 우습고 재미있는 것이 관계라는 것인데, 우리가 배우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다 관계로부터 얻어지고, 관계로 되돌리는 삶인데, 우리는 남에게 배우는 것은 관계라는 것을 존중하면서 남에게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계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가 아마 사람들이 항상 나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을 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세상의 중심일지라 하더라도, 나와 인연된 존재들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도 없고 더구나 중심은 더더욱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나라는 존재(남과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붙이려고 온갖 노력을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 속에나 존재할 뿐, 실제적인 삶에서는 주위, 즉, 나와 관계를 이루는 것들이 없으면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절대로 성립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행하게도 늘 나는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로서 꿋꿋하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세상을 마음만 먹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러다보니, 홀로 존재할 수도 없고 인연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자신 마음대로 되어주지 않는다고 늘 한탄하고 원망하고 짜증을 부린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니 삶이 늘 어긋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자.

관계....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 배우고 관계를 통해서 나의 감정을 드러내고 배출을 한다. 나는 나 혼자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공이다.

인연에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는 것, 그래서 인연의 주체가 비어있다는 것,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인 것이다. 모두가 그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거나, 혹시 어떤 인연으로 누구에겐가 들었는데,

‘쳇!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거나, 알면서도 아직까지 생각의 노리개를 벗어나지 못해 머리는 아는데 마음은 받아들이지를 못해서 인연이 주체가 아직까지 나(허상)인 줄을 안다. 그러니 사실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 공, 공... 하면서 아무리 궁구해도 그놈의 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공이라는 것은 어려울 것도 쉬울 것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나를 내가 아니다 하고 부정해도 나는 내가 아닐 수가 없듯이,

우리는 아무리 착각하고 헤매고 못 찾아도 우리는 공을 벗어날 수가 없다. 엄연하게 공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남들이 나를 취급할 때에는 나만의 독특한 존재로 취급받기를 바란다.

똑같이, 내가 바깥을 판단할 때에도 나라는 독특한 존재로서의 판단으로 세상을 보려한다.

 

독특한 존재.... 이렇게 스스로를 독특한 존재로 매김하려는 것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거의 무의식에 가깝다.

그런데, 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뭔가 모순된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똑같이 독특한 존재가 적용된 두 상황(주체와 객체)에서 자신이 남들에게 판단 받을 때에는

“야?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어떻게 너와 똑같을 수가 있어? 나는 나고 너는 너야, 그리고 저기 저 사람 봐, 저 사람은 지금 우리 모습과 전혀 다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똑 같을 수가 있어?”

 

자기 생각으로 남을 판단할 때에는?

“야? 너는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다른 사람들 좀 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는 거야? 그래, 지금의 너의 감정과 상황은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너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도대체가 이해가 안 돼!”(정말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

 

위의 두 예에서 자신이 독특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내게 전화로나 메일로나, 또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상담을 원하시는 분들 중에

공부의 방법을 묻는 분들도 계시고,

공부의 끝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공부에 임하는 마음 상태를 묻는 분들도 계신다.

그리고 또, 삶에 대해서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을 묻는 분들도 많다.

그 중에 삶에 대해서 힘이 들고 어려움에 대한 물음을 묻는 분들의 분포도가 좀 높다.

그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정말로 평화를 원하고 행복을 원하시는 분들이다.

즉, 그것 하나만 해결되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는데... 라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많다. 그리고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신데렐라처럼 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풀리는 줄로 착각을 하고 산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행복과 평화와 자유를 원한다. 또 그런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도 똑 같이 그렇게 바라고 염원하고 있다.

 

그래서 이글을 쓴다.

 

그것 하나만 해결되면....

이것 하나만 해결되면 정말로 나는 행복하고 세상(내게 가장 가까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을 것인데....

 

정말 그럴까?

제가 위에서 판단의 주체에 대해서 비유를 들은 것을 생각해보라.

정말로 지금 아픈 어떤 것이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은가?

 

오래전에 경험한 아주 작은 일화이지만 재미가 있어서 가끔씩 주위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있다.

 

오래전에 느낀 것인데, 어느 날 방에 아무 것도 덮지 않고 누워 있었는데 발이 좀 추웠다.

그래서 밑을 보니 발밑에 이불이 있었다. 그래서 이불을 끌어다가 추운 발을 덮었더니 조금 지나자 발목이 시려왔다. 그래서 이불을 더 당겨서 발목을 덮었다. 조금 더 지나니 이제는 무릎이 시려왔다.

또 당겨서 덮었다.

결국..... 어떻게 되었겠는가?

 

또 내가 90년대에 시골에서 잠시 돌팔이(돌팔이란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격증이 없다는 의미도 있다.^^)로 침을 놓으며 밥벌이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치료를 받으면서 하는 말이,

 

“저번에는 여기만 아팠는데 여기가 나으니 저기가 아프네요?”

 

발이 시려 이불을 덮었더니 발목이 시리고, 다시 종아리가 무릎이 시리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참 희한해요. 온몸이 다 아파도 제일 아픈 것에만 신경이 가 있어서 다른 것은 몰라요. 온몸이 다 병인 사람이 아픈 것이 나으면 다음에 뭐겠습니까? 자연히 다음 것이 아프겠지요.”

 

온몸이 다 병이라는 말이 무엇이겠는가?

즉, 병의 원인이 뿌리 깊게 스며들었다는 말이다.

온몸이 다 병이라는 말을 마음의 병통으로 돌려 말하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요 분별심이다.

그 뿌리인 분별심을 치료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어떤 현상만 바뀐다고 과연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을까?

신데렐라처럼 되면 분명히 다른 후궁들과의 다툼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고 애를 쓸 것이고, 또 아이를 낳으면 태자로 앉히려고 고민을 하고 암투를 벌일 것이다.

온몸이 다 병이라는 말은 바로 마음의 근원에 분별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만 해결된다고 어찌 마음의 병이 다 낫겠는가?

 

지금 ‘이것만 해결되면...?’ 하고 바라고 있는가?

과연 그것이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세상을 위해서 이 몸 하나 기꺼이 던질 수가 있겠는가?

 

위의 글을 끌어 당겨서 다시 쓴다.

 

자신이 남들에게 판단 받을 때에는

“야?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어떻게 너와 똑같을 수가 있어? 나는 나고 너는 너야, 그리고 저기 저 사람 봐, 저 사람은 지금 우리 모습과 전혀 다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똑 같을 수가 있어?”

 

자기 생각으로 남을 판단할 때에는?

“야? 너는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다른 사람들 좀 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는 거야? 그래, 지금의 너의 감정과 상황은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너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도대체가 이해가 안 돼!”

 

똑 같은 상황을 두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과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다른 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아무리 이불을 끌어당겨서 덮는다 하더라도 그 몸은 절대로 따뜻해 질수가 없는 것과 같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이요 행복이나 자유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모두가 공하다.

세상은 인연으로 되어있는데 세상에는 인연의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주체가 있다면 모두가 주체요, 객체가 있다면 모두가 객체이다. 그런데 홀로 존재하는 주체도, 홀로 존재하는 객체도 이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공하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공하고,

이 글을 보는 님들도 공하고,

님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도 공하고,

님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공하고,

님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공하고,

또 그것을 힘들다 하는 님도 공하다.

모두가 공하다.

 

관계...

인연....

우리는 인연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인연의 객체이기도 하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공하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난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해질 일도 더 불행해질 일도 없다.

댓글목록

솔개님의 댓글




인드라망~~~

윤기붕님의 댓글




*^^*

태정이할배님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