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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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돈수와 보림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300

11-10-30 04:58

본문

나도 한때는 참으로 아는 것이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안다고 한 것이 얼마나 무지의 소행이었나는 것을 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이지 
‘진정한 내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진정한 내가 된다는 것은,
지금 매순간 여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비록 못나고 부족하고 덜 떨어져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그것이 현재의 진정한 내 모습이지,
생각 속에서 바라는 어떤 되고 싶은 내 모습은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라 생각이 지어낸 허깨비와 같은 허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지도 않는 생각속의 허상을 쫓지 않고,
그냥 매 순간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이요.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내가 된 자는 행과 앎이 일치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내가 된 자는 
자신이 살아왔거나, 살거나,  앞으로 살아갈 모든 행이 
단 한순간도 법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알고, 
단 한순간도 법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
따로 닦아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돈오돈수가 옳다) 
그래서 알았다 할 것도 없고,
지금 매순간 살아가는 행 이외에 따로 배워서 행할 거룩한 행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것을 아는 자가 진실로 아는 자인 것이다.
이렇게 아는 자는 앎과 행이 따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서 앎과 행이 일치하게 된다.
그러니,
따로 알아야 할 진리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자신이 아닌 느낌과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속에 살아간다. 
마치 어떤 것 하나만 해결되면 될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이 안다고 하는 것이 상인지 모른다. 
깨달음의 상.... 
그런데 깨달음은 상이 없다. 
그래서 이런 것이 깨달음이라 하고 하는 것이 없다.
깨달음의 상이 없고 
이런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없기에,
모든 것이 깨달음의 상이다.
그래서 알아야 할 것도 없다. 

깨달음에 대한 상! 
뭔가를 고치고 발전시키면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지... 
이미 완전한 자신을, 이미 모든 것을 갖춘 자신을, 
이미 보물이 가득 찬 자신의 창고를 열어볼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은 보잘것없고, 바깥에 뭔가 있을 것 같고 
현재보다는 노력해서 더 나아질 것 같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깨달음에 대한 상이다. 
즉, 생각이 지어낸 하나의 허상인 것이다.

그것도 진정으로 자신 스스로 알아서 안 지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막연히 듣고 보고 배워서 
그것들을 나름대로 분별하고 조합하며 이해해서 알은 지식을,
마치 진짜 아는 것 인양 착각하는 그 헛된 생각 말이다.
그리고 그 헛된 생각에 대한 의문은 조금도 가지지 않고
정말로 그러한 상태가 있는 줄 알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으니
그 헛된 생각에 속아서 마치 그러한 삶이 따로 있는 양,
그 삶을 살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분별하고 채찍질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에 대한 헛된 상이 있으니,
깨달음의 행이 따로 있을 수밖에 없고,
자신이 알고 있는 깨달음을 입으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늘 헛헛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앎과 행이 일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힘겨운 삶이 아닐 수가 없다.

절대적인 지혜는 
뭔가를 배워서, 뭔가를 알아서, 뭔가를 고쳐서, 
뭔가를 더 완전하게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 스스로도 뭔가 모자라는 것 같고, 부족한 것 같은 지금 그 자신이 
바로 온통 그대로의 지혜인 것이다. 

앎 즉 행, 자신 즉 지혜, 그것이다. 
지혜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나 자신 이외의 것을 아는 것도 아니요,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가기위해 
배우고 이해하고 분류하여 축적한 지식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냥 매 순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부족해 보이든, 완전해 보이든, 어떤 형태이든.... 
그래서 자신 = 앎 = 행인 것이다.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지혜이고,
아니...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하니까 또 다른 자신이 있는 줄 오해할 지도 모른다
지금 그대로의 자신이 바로 지혜이고
그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모습이요. 
또 이글을 읽으면서 의심이 들면, 드는 그 모습 역시 그것이요. 
읽다가 코가 간지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코를 긁는 그 모습, 
눈을 깜박이는 모습, 하품하는 모습 등등... 
매 순간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도를 깨치기는 세수하다 코를 만지는 것보다 쉽다”

라고 하신 것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에서 우리가 잘 못 이해한 것은
수(修)라는 글자이다.
수(修)의 뜻은 원래 닦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에서는 수를 닦는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니고
이미 닦여져 있음의 의미로 말했다.

깨달으면 이미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가
닦을 필요 없이 원만구족 하다는 것을 알고
살아왔기에
따로 닦을 게 없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로
돈오돈수라고 한다.
여기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얻어서,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상태가 되는 것이 허상이라는,
즉, 분별 망상하는 한 생각이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지극한 지혜는 매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고
지혜의 행은 역시 지혜이니
따로 닦을게 없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그래서 돈오돈수라고 한다. 

단경 첫머리에 육조스님의 말,

“만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서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
고 하였으니,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부처님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곧 활연히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과 같이
이미 우리가 바로 자성의 발현이니, 
새로 닦아야 할 무엇이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돈수는,
깨쳐서 닦는 것이 아니라,
깨치니 이미 닦여 있음을 아는 것이다.

허나,
깨닫고 난 뒤에 보림이라는 과정이 있는 이유는
비록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한,
지금의 자신과 바라는 자신과의 분별 때문에,
늘 지금의 자신보다는 있지도 않는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한
그 한 생각 속에 너무나 오랜 세월을 속아 살아왔기에,
그 생각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봄은 왔으나,
연못의 얼음이 한 순간에 녹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얼음은 서서히 녹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림인 것이다.

비록,
그 생각이 허상이요 무명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지만,
그 오랜 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 까닭에,
삶은 늘 있는 그대로 살아가나,
자신의 삶을 매순간 분별하는 그 놈의 짓거리는 당장에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보림이 점수(漸修)나, 해오(解悟)와 다른 점은,
점수나 해오는 자신의 삶과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바꾸기 위해서 무언가를 계속 배우고 수행을 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보림은 배우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그 분별하는 생각을 가만히 놔둠으로서
생각이 허상임을 알게 되고,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앎이 오면,
생각을 중요시하지 않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분별하는 그 생각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그 생각이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을 내버려두는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분별하는 생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돈수라는 것은,
이미 우리의 모든 것들이 완전하여서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보림은 그 완전하여서 닦을 필요가 없는 그 삶에서,
오랜 습으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분별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고치려고 하는
못된 버릇(생각)이 사라지는 과정인 것이다.

보림이 새로운 어떤 것을 얻어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점수나 해오와 다른 것이다.

보림은 마치 감나무에 감이 열려서 홍시가 되고, 그 홍시가 땅에 떨어지는 과정과 흡사하다.

돈오는,
자신이 이미 깨달아 있음을 아는 것이다.
즉, 감나무에 비로소 열매가 열린 것과 같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면,
감나무가 이미 감나무인데,
또 감나무가 되려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을 돈오라고 비유할 수 있다.
그 짓을 하지 않게 되면,
깨달음이라는 열매가 열린다.
그것이 감나무에 열매가 열린 것과 같다.

그러나,

댓글목록

수냐타님의 댓글




선생님, 수자상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부탁드립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을 하더군요.

윤기붕님의 댓글




수자상은 말 그대로 세월과 관계된 것입니다.
오래 산다...
또는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내가 너보다 공부한 세월이 얼마인데...
내가 너보다 먼저 머리를 깎았는데..
등등 세월을 가지고 우열을 드러내려는 생각들이 수자상입니다.

그러나 수자상이라는 말을 제가 만든 것이 아니고 불교에서 만든 것이라,
제가 생각하는 것 이외에 더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온 뒤라 훨씬 시원해진 것 같습니다.*^^*

수냐타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수자상은 생명이 있다는 상을 내는 것이라 하더군요^^
생과 사가 하나인데 산다 죽는다하는 상을 내는 것도 착각이라는 것이지요^^
너무 멀리 간 느낌도 드네요 ㅎ

수냐타님의 댓글




또 한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
육경의 색,성,향,미,촉,법에서 법에 관한 해석을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진리를 뜻하는 법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나툼을 의미하는 법인지요?
그리고 육근의 안,이,비,설,신,의 중에서 의란 의미, 혹은 뜻이라고도 하고
생각이라고도 하던데, 이 중 마지막 '의'가 육식의 식과 만나는 이'의식'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의 의식(정신)과는 다른 것이지요??
귀찮게 해 드린 것은 아닌지....ㅎ

윤기붕 님의 댓글



육근의 의(意)는 앞의 오근, 즉 다섯가지 감각인 안, 이, 비, 설, 신의 감각을 거두어 쓰는 정신활동을 말하고,
의식은 그 정신활동으로 생각을 짓는 것이고, 법은 그 지은 생각으로 상을 만들어 낸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지요.

수냐타님의 댓글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해석중에 당연 최고입니다~ 너무 이해가 잘 되네요!!
역쉬 최고 최고 ~~ *^^*

윤기붕님의 댓글




ㅎㅎ 오랜만언 비가 시원하게 내렸네요.^^
오후시간 잘 보내세요.*^^*

태정이할배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포세인죤 님의 댓글




( ) 감사합니다.

조졸님의 댓글




진정한 내가 된다는 것은,
지금 매순간 여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초당님의 댓글



보림과 점수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