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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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지 마라.(수정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230

13-07-31 10:06

본문

자성(自性)이 공하여서 청정(淸淨)하다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맑고 깨끗하면 이미 맑고 깨끗함에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법에서 말하는 청정은 한 물건도 없는 것, 한 모양도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맑음도, 탁함도, 깨끗함도 더러움도, 바름도 삐뚦도 옳음도 그름도, 선도 악도, 거룩한 것도 속된 것도 없는 것이 자성이 청정한 것이다.

 

대저 수행하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것이 바름에 물드는 것인데, 이는 모두가 자성에는 한 물건도 한 모양도 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육조를 찾아오자

육조혜능(六祖慧能)은 찾아온 회양에게 물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하자, 회양이 답했다.

“한 물건이라고 말씀드린다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니 대사께서 물었다.

“그러면 닦아(수행) 증득하는가?”

그러자 남악회양은

“닦아 증득함을 없지 않으나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대사께서,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는 바이니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그러하니라.”

하였다.

-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 -

 

회양이 말한 오염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닦아 증득함에서 즉, 수행에서 지켜야할 것들에 오염된다는 말이다.

이 수행에서 지켜야할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마지막 관문까지 자신을 옭아맨다. 즉, 법집이요 바름에 물드는 것이다.

 

청정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오염과 청정이라는 상대적인 청정을 생각을 하고 더럽지 않는 것 물건이나 모양, 그리고 생각 등을 청정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생각은 모든 것을 늘 그렇게 이분법(二分法)으로 본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성의 청정함이라는 것은 깨끗함과 더러움 모두를 여의어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상이 없는 것이다.

 

자성은 본래 공한 것으로, 그 공함은 공마저 공한 것이다.

그래서 역으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이다.

즉 우리를 비롯하여 삼라만상이 모두 이 한 법의 연기에 의해 생겨나고, 또 연기에 의해 자라고 변하며 흘러간다.

그래서 이미 일체만법이 모두 자성을 여의지 않았고 자성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모든 것이 자성의 성품과 하나로 늘 청정하다.

그래서 자신을 비롯해 일체만법을 그냥 보고 그냥 그 인연대로 사는 것이 청정한 것이고, 이것을 어떻게 하려는 것이 바로 오염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청정하니 따로 청정이라는 것조차 그곳에 붙을 수가 없다. 그래서 깨끗함이니 더러움이니 하는 것도 역시 없는 것이니, 이러함을 아는 것이 진정한 청정을 아는 것이다.

 

이는 법이 본래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본래 그러한데 수행에서 말하는 바름이라는 것이 어디에 따로 설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회양이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머물 수 있는 상을 가진 것은 자성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성은 형체가 없고,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일어나고 변하고 사라지기에 잠시도 머물지 않아, 찰나간의 형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머물않고 흘러가는 한 단면일 뿐 고정된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자성에 의해 생기고 존재하는 이 세상 역시 잠시도 머물지 않아 고정된 무엇이 없다.

고정된 무엇이 없으니 무슨 티끌이 붙어 오염이 되겠는가?

그것을 일러 청정이라 하지 청정이라는 것이 붙어 있으면 이미 오염된 것이다.

 

자성이 공하다함은,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무명(無明)의 바람에 의해 생멸문(生滅門)이 열려 세상만물이 나투고 있다고는 하나, 그 생멸문은 바로 연기법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는 문이다.

그런데 연기는 서로서로 영향을 주어 섞이고 끊임없이 변하며 흘러가는 것이어서 어떤 것이든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므로 ‘이것이다.’ 하고 잡으면 이미 자신이 잡고 싶은 것은 사라지고, 손에 잡히는 것은 마치 물속의 모래같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것이다.'라고 할 것도 없고, 송곳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그래서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다’ 할 것이 없으니 잡을 것도 없고, 잡을 것도 없으니 분별할 것도 없다.

그래서 자성은 분별을 여의었다하고 또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분별을 여의고 머물지 아니하고, 따로 ‘이것이다’라고 할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그것이다.

 

분별하여서 보면, 바른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고, 선한 것이 있으나, 분별이 사라지면, 바른 것, 깨끗한 것, 선한 것이라는 것이 없다.

옳으면 모든 것이 옳은 것이요. 그르면 모든 것이 그른 것이지, 어떤 것은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은 그른 것이 한 통속에 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다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인연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모두가 평등하다.

이 한 법의 연기법이 아니라도, 어떤 법에 의하더라도 인연이라면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니 어찌 평등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더욱이 이 한 법의 법칙에 의해 생겨난 삼라만상이니 어찌 평등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것에 대해 가치적인 의미를 붙일 수가 없고, 그러하기 때문에 모두가 차별이 없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는 분별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없으니 청정하다고 하고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니 앉을 티끌이 없어서 또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며, 잠시도 머무르지 아니하니 잡을 수가 없어서 공하다고 하며 또 깨끗하다 더럽다는 분별이 없으니 또한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도 붙을 수 없으니 공하다는 모양조차 붙을 곳이 없으니, 공마저 공한 것이 공이라 하는 것이니,

이러한 공은 그냥 이름하여 공하다고 할 뿐이요,

청정이라는 것 역시 일체가 모두 이 한 법의 인연에 의하고, 한 모양도 없으어 깨끗하다 더럽다 할 것이 없는 것을 일러 청정이라 하니,

청정 역시 이름이 청정일 뿐 모든 것이 그냥 있는 그대로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 한 대로 혜능 조사께서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不汚染)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

하신 말씀 중에서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

한 말씀과 같이,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오염되지 않는 청정함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뜻을 모르고 수행하는 사람들은,

수행이란 뜻에 오염되어 만사에 수행이란 잣대를 두고 의미와 가치를 나누니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

보다 나아 보이는 것,

보다 깨끗해 보이는 것,

보다 좋아 보이는 것,

보다 선해 보이는 것만 얻으려고 한다.

그래야 그 잣대에 맞는 청정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언뜻 보기에는 거룩하고 청정해보이나 그것은 거룩과 청정에 오염된 냄새나는 것이 아닐 수가 없다.

 

부처님은 무소득(無所得)이라고 하였다.

무소득이 무엇인가?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어서 얻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것이어서 특별하게 이것이다 하여서 따로 얻을 귀중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모든 것이 본래 청정하여서 다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따로 구해서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말이 그뜻이다.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는 것이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 이 우주 삼라만상이라면,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하겠는가?

모두가 한 통속으로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늘지도 줄지도 않는 늘 그대로의 세상인데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신다.

 

“일체중생(一切衆生)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어 이미 다 깨달아 있다.”

 

일체중생이라고 하면, 또 사람들은 사람만 생각하거나, 생명 있는 것만 생각하거나 한다.

아니다.

우주 만물이 자성이 없으면, 먼지하나 티끌하나도 생겨날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바로 일체 중생이다.

그 모든 만물은 모두 자성의 성품을 받아서 이 세상에 나오니 이미 모두 깨달아 있어 어느 것 하나 평등하지 않고 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하니 어디에 가서 청정한 것을 따로 얻을 것겠는가?

 

이것을 일러 무소득(無所得)이라고 한다.

 

얻을 것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세상은 이미 충만하여 따로 찾아서 얻어 채워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소득은 이러한 것을 말하고, 모든 조사들 역시 이러한 무소득을 이야기 하였다.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는 자에게 무소득을 이야기한다면, 정말로 아무런 소득이 없는 무소득(?)일 것이다.

허나, 이미 자신을 구하고자 발심을 한 사람들이라면 구하지 않음을 구하여야 한다.

구하지 않음을 구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다만 그 구하는 마음 하나만 쉬면 되는 것이다.

모든 선현들의 말이 다 이것을 말하고 있다.

 

구한다는 것은 구하려는 그 것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이다. 즉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고 있는 이상 그는 언제나 스스로 부족한 자로 여겨질 뿐이다. 그에게 완전함이란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마음을 버릴 때에 완전해지며, 그것은 우리에게 불성이 있어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니 오직 구하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절로 완전한 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세속에서도 이런 말을 한다.

“자유를 바라는 자는 자유가 없는 자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자유를 바란다는 것은 자신에게 자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가 자유를 바라고 있는 이상 그는 언제나 자유에 속박되어 있는 자이다.

스스로의 생각에 속아서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자유를 바라는 그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 오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환경에서 다른 환경으로 옮겨가는 것이 자유라면,

그 환경은 인연으로 서는 것이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니,

환경으로 얻은 자유는 인연이 다하면 또 사라져 버려서 그는 또 다시 자유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바라는 이상 껍데기밖에 없는 자유를 찾아 끊임없는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 역시 그러하다.

삶에서 어떤 것을 얻어서 깨달음이 온다면, 삶이라는 것은 바로 인연이요 인연은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니, 그 깨달음 역시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또 깨달음을 구하는 악순환으로 들어갈 것이고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

 

구하는 자는 부족한 자요. 부족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일 뿐이다.

수행도 노력도 그 결과도 부족하여 그는 결코 완전함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말의 장난이 아니다.

이성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진실로,

진실로 완전함을 얻고 싶다면,

먼저 그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부처님께서 이천 오백년 전에 외치신 바의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이미 다 깨달아 있구나.’

하신 그 말씀에 귀의(歸依)하여서 이미 자신이 깨달아 있음을 알라.

 

하늘에 구름(구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청정한 하늘(우리의 완전함)은 절대로 볼 수가 없다.

다만, 그 구름이 걷혀질 때에 이미 푸르고 청정한 하늘이 그 곳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처럼, 구하는 마음(구름)이 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우리의 완전함(청정한 하늘)을 얻을 수가 없다. 우리에게서 구하는 마음(구름)이 사라질 때에 이미 우리가 완전함(청정한 하늘)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래 청정한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로 구할 것이 없다.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행복하기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안다.

 

구하지 마라.

 

댓글목록

땅콩얼굴님의 댓글




완전함이 확인이 안 되니까 자꾸 찾게되는거 같아요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요?

윤기붕 님의 댓글




확인이 안되면 안되는 채로 사시면 됩니다.
되든 안 되든 그것이 바로 님이고 자성이니까요.
확인이 안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확인하고 싶어하는 놈이 문제를 일으키지요.^^

수냐타님의 댓글




긴 장문의 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수행의 습이 얼마나 깊은지 모든걸 다 알고난 지금에도 불쑥 불쑥 솟아나곤 합니다. 뭔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더 완벽해지려는 욕구가 말입니다 ^^ 바른견해와 바른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절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른길을 인도해주시는 스승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무더운 날씨에 건강 잘 돌보시길 멀리서나마 기원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
님께서도 더위에 건강 보중하세요~*^^*

웃음꽃님의 댓글




자꾸 확인하고 싶은 간절함이 생긴답니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합니까?

윤기붕님의 댓글




비밀댓글 확인하고 싶은 그 마음이 마구니입니다.
그 마음이 올라오면 마구니인 줄 알고 내치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그냥 냅두십시오.
그러면서 자신의 일을 하시면 됩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확인을 시키거나 확인의 시기를 당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과 알음알이만 일으켜 공부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더운 날 몸 조심하십시오.*^^*

나그네님의 댓글




잘읽었습니다.질문 있습니다.
개인적차원에서 이 실상을 확인하는 일과는 별개로 현상계는 엄연히 인과율에 의해 굴러작동하는것 아니겠습니까? 자업자득이라는 말도 있듯이요
물론 자성의 바다의 자리에선 그 인과법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자체 마저도 자성의 현현인데요.
그러나 또 한편으론 분명히 세간법이 관철되는 까닭에 세간법을 무시하고 살다간 제명에 못사는것
아닙니까? ^^ 그것마저도 자성의 인도하심인지요..제법이 그대로 여래자성인데, 그러면 극악무도한
환경 조성에 직간접적으로 자의반 타의반 관련되어 있다면 그건 자리이타의 보살정신에 위배되는 가르침이 아니온지요?,,,

좀 길었네요..()..

윤기붕님의 댓글




세간법을 굴리는 것과 세간법에 얽혀 굴림을 당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자성을 뚜렷히 아는 사람은 세간 법에서도 불이법을 벗어나지 않아 법속에서 세간 법을 굴리지만
자성을 모르거나 머리로만 이해하고는 세간에 관심을 많은 사람은 세상의 이분법에 휩쓸려 저도 죽이고 남도 죽이며 남은 것은 세간법의 대립된 날카로움만 남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간법을 굴리거나 굴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그리고 보살은 세간법의 옳고그름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간 법도 어기지 않습니다.
즉 세간에 살지만 세간에 물들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님의 댓글




네.가르침 감사합니다.
인드라망세계에서 세간에 전혀 물들지 않을재간이
있을까요? ..
그러나 예토속에서는 인연. 업보등이 얽혀 판을 쳐
자기자신이 그 인드라망(특히, 별업말고 공업) 의
영향하에 바로 노정되는데...쉽지않은 얘기 같습니다.그렇다고 마음공부 하는것에 회의적이라는것은 아닙니다. 저혼자라도 대자유를 접하면되는 것이니까요. 이 분야에서 흔히 일컬어지는 이공부는 세상을 바꾸는게 아니라 내자신을 바꾸는것이다...라는것처럼요.범부들이야 세간법에 고통을받아 신음하던 말던 저도 선생님가르침대로 자성을 뚜렷이알아 불이법속에서 세간법을 굴리고 싶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세간 사람들이야 고통받아 신음하든 말든...'
이라는 생각이 바로 알음알이입니다.
님께서 이 자리를 분명히 아시고 분별이 떨어지면 그 도리를 아실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분별 속의 일일 뿐입니다.

조졸님의 댓글




아 그렇군요.
이것이 참 난제군요.우짜겠읍니까.
알때까지 오버하지않고 사는수 밖에...

나그네님의 댓글




이런답 예견했구요.ㅜㅜ
견성전의 범부에게 좀다른 각도의 방편말씀좀
주세요.^^ 견성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리가 뚜렷하시다면 자신있게 일갈해주세요.

공업이든 별업이든 자신이 원치않게 관련되어
직접적으로 영향하에 놓이게 되는데 무슨말씀이신지요? 견성자의 이구동성이,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우면 자고 돈벌고 싶으면 돈벌고 ..,등등.
그 어느것하나 현상계와 직접되고 있는상황인데요...어찌보면 다 유의법아닌지요?

같은 맥락으로 ~하고 싶으면~~한다. 는게 다
그것아닙니까? 현상계에서 벌어지는 모든일들이
다 자성아닌게 없다면 번뇌가,망상이,소혜(알음알이)가 모두 보리라는 조사들의 가르침아닌가말입니다

나그네님의 댓글




갑자기 글을 쓸수 없다고 떠서 순간 당황해습니다.
이어지는글은 이따 퇴근후에 쓰겠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하는 행위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행위는 같아도 세상을 보는 시각과 그 마음이 다릅니다.
그래서 달마조사께서
"마음이 있으면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다 거짓이요.
마음이 없으면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다 진실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이란 바로 분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은 분별을 떠난 곳인데
옳고그름을 따지는 분별의 세간적시각으로는
아무리 법을 논해 봐야 별 무소용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사실 세간 입장에서만 들으면 알음알이만 더 지을 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태정이할배님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