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누가 나를 중생이라고 하였는가?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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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중생이라고 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고 부처가 되려고 한다. (석가모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성을 구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내가 이 제목처럼 “누가 나를 중생이라고 하였는가?” 라는 글을 쓰는 이유가, 우리의 생각위에 구성되어있는 관념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엉성한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중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처가 되지 못한 것(여기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이 아닌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또는 범부라고 스스로 지칭을 한다. 스스로 중생이라면, 부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부분을 잘 생각해 보라.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부처가 아니다.’ ‘부처가 아니다.’ 라는 것은 ‘부처가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럼,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겠는가?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면’, ‘부처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부처를 모르는 자가 어찌 부처가 아님을 알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부처를 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부처를 모르는데 어찌 부처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부처를 모르는데 어찌 스스로 중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다시 종합해 말해서, 스스로 중생이라 함은 자신이 부처가 아님을 안다는 말이다. 자신이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부처를 알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가 아님을 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결국, 자신은 부처를 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부처를 안다는 것은 바로 내가 부처라는 말이다.
부처가 무엇인가? 깨달은 자가 바로 부처이다.
결국, 부처를 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부처라는 말이요. 자신이 부처라는 말은 이미 자신이 깨달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다시 말하건대, 곰곰이 생각해보라. 중생을 알려면 부처를 알아야만 된다. 다시 말해서 중생이라는 것을 알려면 자신이 부처가 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중생이 있다는 것은 부처가 있기에 가능하고, 자신이 중생임을 알려면 자신이 부처여야만 가능하고, 자신이 중생임을 증명하려면 부처를 증명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즉,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것이 참임을 말하려면, 증명하려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모두 배제해야 가능하고 그것을 배제하려면 양쪽을 모두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중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중생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하고 중생이 아닌 것은 부처밖에 없으니 부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를 알려면 부처의 상태를 알아야하고 부처의 상태를 안다는 것은 바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안다고 할 때 자신이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것이 옳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고 남들에게 그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냥 들은 것 가지고 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아는 것이 아니다.
다시 중언해서 말하건대, 자신이 중생이라는 믿음을 가지려면, 중생과 부처를 다 같이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중생임을 증명하려면 자신이 부처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스스로 깨달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부처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란 말이다. 그렇듯이 부처가 되었다면 이미 자신은 깨달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 말이 틀렸는가?
내가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은, 절대로 말장난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님들...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의 허구성을 보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조사들의 선문답에서 수없이 나오는 말들.......
“스님 저를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누가 너를 구속했던가?”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님들을 중생이라고 했는가? 스스로 중생이라고 했다면, 님들은 알던 모르던 이미 부처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 남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믿었다면 믿는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믿는다. 그러니 그것은 이미 안다는 말과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라.(정말로 곰곰이...)
그냥 오랜 세월 속에서 남들이 우리에게 중생이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렇게 믿었다면,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남이 이야기한다고 해서 어찌 믿을 것이며, 남들이 이야기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중생이라고 했다면, 부처를 모르면서 어찌 스스로 중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 모든 것이 생각의 놀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가? 내가 말한, ‘부처가 아니다.’ ‘부처가 아님을 안다.’ ‘부처가 아님을 알려면 부처를 알아야 한다.’ 는 것처럼, ‘부처다. 아니다. 부처를 알려면 중생을 알아야 한다.’ 하는 이런 말에 걸리지 마라. 물론 이 말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정말 중요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쪽에 치우쳐 있느냐하는 그 허구성이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이 허상이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님들께서 굳게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 그리고 님들께서 성현들이 말했다고 해서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설사 그것이 진리요, 성현들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체에 거르듯이 님들의 생각으로 걸러서 만들어낸, 즉, 님들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허상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내가 진실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가 ‘맞다.’고 믿고 있는 그 밑바닥에는, 이렇게 엉성하고 한쪽에 치우쳐 있는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요, 그냥 들은 이야기와 작은 내 몸(안이비설신의)으로 경험하고 본 이야기를 마치 온 세계를 다 경험한 듯이 짜 맞추어서, 그것이 마치 진실인양 행세하고 있는 허구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진정한 우리는 생각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생각의 놀음이라면, 그리고 진정으로 생각의 놀음을 하려면 생각이 이곳까지 미쳐야 진정한 생각놀음을 한다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나의 말을 말장난이라고 치부해도 괜찮다. 스스로 듣고 아니 듣고, 택하고 아니 택하고는 스스로의 몫이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시절 인연일 뿐, 자기 삶속의 주인은 오직 자신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의 말을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라고 던지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그러한 믿음을 누가 주었는지, 자신이 믿어온 생각의 그 깊은 곳, 그 뿌리를 한번쯤 스스로 들여다보라고 하는 나의 미련한 짓이다. 그리고 인연 속에서 얻고 버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일뿐이지, 남이 자신에게 주는 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맞으면 갖고, 아니면 던져버리면 될 것을.....
내 말을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고 욕을 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나의 상태가 아니라 세상의 주인인 님들의 상태이니까
다시 묻는다. 님들께서 어떻게 스스로 중생임을 알았는가?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라.)
모든 것이 생각의 놀음인 것을..... 도니, 깨달음이니, 진리니, 하느님이니, 거룩함이니 하는 그 모든 모양 좋은 것들 역시,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믿지 못하여 만들어낸 허상이요, 생각놀음일 뿐이다.
님 들은 이미 깨달아 있다. 그 모든 것이 님들의 생각이 만들어낸 한바탕 꿈이라는 것만 안다면, 생각의 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요. 그 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니, 도니. 깨달음이니 하는 그 모든 것이 스스로 못났다고 치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버려두고 더 나은 모습을 찾기 위해서 분별하면서 꾸며낸 헛된 망상임을 알 것이다. 그러면 그토록 질긴 생각의 끈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그대를 중생이라고 했는가? 진실로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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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무석님의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자유와 구속도 결국 둘다 스스로가 짓는 허구인셈이군요. 오직 불이중도!
윤기붕님의 댓글
일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스스로 속이고 속지요.
날이 차갑습니다.
허동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윤기붕 님의 댓글
차가운 날씨 몸조심하십시오.
산호초님의 댓글
생각놀음과 자주 말씀하시는 한법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윤기붕 님의 댓글
비유하면 한법은 나 자신이고 생각놀음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즉 꿈을 꾸어도 나고 깨어 있어도 나이지요.
다만 꿈을 꿀 때는 온갖 망상을 부리고 있어 참나가 누구인지 모르고 온갖 시비분별로 번뇌와 고통에 빠져 사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을 떠나 있지는 않지요.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내가 아니지는 안찮아요?
그래서 꿈만 깨면 되지 따로 나를 찾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청산님의 댓글
한법은 나 자신이고 생각은 꿈을 꾸고 있음이다.
이 보다 적확한 표현은 본 적이 없읍니다.
우페카님의 댓글
꿈에서 깨면서 간혹 긴 한숨을 내쉽니다.
꿈이 꿈임을 알고 꾸면 꿈속의 일들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듯
이 생또한 꿈과 같다면 그 무엇에 의미를 둘수 있을 까요.
꿈이 꿈임을 알고 사는것과 모르고 사는 삶의 차이는 뭘까요.
윤기붕님의 댓글
알고 살면 속지 않고 또 자신이 한정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번뇌와 고통이 없음은 물론 생사의 문제가 사라지고 남의 시선과 자신의 생각에도 걸리지 않게 되어 어 늘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이집니다.
하지만 모르면 이 모든 것들(번뇌 등)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지요.
생각이 꿈인데 또 생각으로 의문을 일으키고 생각으로 답을 듣고 생각으로 알려하면 절대 그 차이를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어보여도 삶의 질은 전혀 달라집니다.
이것 역시 생각으로 아무리 가늠해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는 님의 지금 질문을 하듯이 이분법으로 상대를 두고 비교하는 생각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페카님의 댓글
윤기붕 감사합니다.
태정이할배님의 댓글
법문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최성철님의 댓글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로군요. 허상이고 생각 놀음 뿐~~ 우리들은 이미 깨달아 있네요.ㅎㅎ 생각이 만들어 낸 한바탕 꿈이로다! 감사합니다. ^-^
윤기붕님의 댓글
네~ 시비하지 말고 그냥 살면 됩니다.
아무 일이 없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굴참나무님 반갑습니다.
일체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자주 오시면 됩니다.*^^*
조졸님의 댓글
이름을 부르고 대화를 하지만 무슨뜻인지 네가 뭔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횡설수설 비몽사몽의 인생을
살았구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