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적천단상

본래부터 아무 일이 없었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495

15-04-03 12:33

본문

사랑, 미움, 만남, 이별, 얻음, 잃음...

 

삶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희노애락은 이 한 법이 인연 따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냥 인연 따라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헤어지고 얻고 잃으면 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들을 자신이 이해 안에 두려고 한다.

그래서 행과 불행이 생겨났다.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수도 없는 수많은 변수들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삶의 현상들을

자신의 생각이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는 참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우주 어디에도 없다.

삶의 현상들은 그냥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현상에 인연되어 개입되는 요인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령, 내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과거의 두려운 일이 생각이 나서 이불을 덮었다고 치자.

여기에 개입되는 요인을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자.

 

먼저 생각을 일으키는 내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존재하려면, 먼저 부모님이 존재해야 하고,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이 존재해야 하고,최초의 인간이 생겨야 하고,

그리고 최초의 인간이 생기기 위한 그 이전의 요인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원숭이든, 침팬지이든, 오랑우탄이든, 유인원이든, 돌연변이든...

그리고 그런 것이 존재하면 또 그것이 최초로 생긴 요인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우주 최초로 돌아가야 하고, 세상의 모든 일은 그때부터 이 인연이 시작이 된 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배제하면 지금의 어떤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내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 두려운 일을 만나기 위해서 그와 관련된 인연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두려운 일이 일어나기 위해 두려운 일을 만드는 주체와 객체가 있어야 하고 또 주변 상황도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일이 일어나야할 조건들이 충족해야 한다.

그러면 주체역시 존재해야 하고 또 그 존재가 존재할 모든 조건을 올라가보면, 결국 우주의 최초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최초부터 그렇게 분화된 모든 요인들을 다 거치고 그것을 낱낱이 분석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알 수가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각각의 요인들이 왜 그렇게 만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또 각각의 요인마다 따져야 한다.

 

그리고 또

왜 내가 그러한 일과 하필이면 그 시점에 인연이 된 것도 시작점부터 따져야 한다.

그러면 집을 나온 일부터, 아니 그 시간에 집을 나오려면 또 그 이전으로 따지고 따지고 따져 올라가야 한다. 그냥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올라가면서 만나는 모든 인연과의 관계에서 매 순간 만나는 것들의 모든 요인들의 각각의 인연도 모두 따져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인연이 그 순간에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이유를 도출해 낼 수 있다.

 

그리고 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왜 그 인연을 내가 두려워한 것인가를 또 따져야 한다.

그러면, 또 그러한 일에 두려움을 느낄 최초의 인연을 따져야 하고, 또 그 최초의 인연이 생기게 된 그 이전을 또 따져야 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손 치더라도 그 순간에 그 생각을 일으킨 이유의 인연은 또 하나 하나 따져 들어가 봐야 한다. 하나라도 틀리면 그 때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또

내가 덮은 이불이, 내게 오기까지의 모든 인연이 내게 올 상황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내게 올 수 있고, 또 그 날 하필이면 그 이불을 꺼내어 덮고 있을 이유가 충족되어야 그 순간 그 이불을 덮을 수가 있다. 그 날의 날씨까지 곁들여서...

 

그 외

우리가 감지 못하지만, 그 순간에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많은 인연의 요인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한 인연들을 또 낱낱이 규명해야만, 그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여기는 이 하나의 현상인 것 같지만, 그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 관계되는, 생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인연들....

과연 세상에, 아니 이 우주에 그 누가 그 방대한 요인들을 모두 한 치도 틀리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풀 한 포기도 그저 피지 않는다.

 

방거사가

“모든 눈이 앉을 자리에 앉는구나.”

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일체의 인연이 거기에 떨어지도록 한 것이다.

 

온도, 수증기의 양, 떨어지는 cm, cm 마다. 아니, 그 보다 더 작은 단위의 순간마다 주위의 온도와 수증기의 양과 눈의 무게와 눈이 녹는 속도가 다 다르다.

그것을 단 하나라도 다르면 거기에 떨어지지 않는다. 절대로....

 

우리의 삶은 단 0.1초의 사이에 살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말 한마디의 바뀜에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또 부부간에도 싸움이 되고, 화해가 된다.

 

어찌 그러한 작은 것들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단 하나라도 틀리면, 내가 과거의 두려움을 떠올릴 수 없거나, 그 떠올리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틀려야지, 실제로 일어난 것과 꼭 같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어찌 사람들은 이 삶의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대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미워하고 원망한다.

 

더 웃기고 어리석은 것은

자신에게 그러한 일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그러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분노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지 그 원인도 모르면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들을 말이다.

 

도대체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이 있어 이 삶의 현상을 판단한단 말인가?

 

우리는 절대로 그럴 수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우주의 어떤 존재도 티끌하나가 왜 생겨나는지 조차도 아는 자는 없다.

물론 과학적으로 티끌이 일어나는 이유는 밝힐 수는 있어도,

그 티끌이 하필이면 그 순간에 그 장소에서 그러한 재료와 그러한 분자구조로, 또 그러한 모양으로, 또 그러한 식으로 일어나고 날아다니는지를 아는 자는 절대로 없다.

그것을 알려면 또 우주의 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 다 따져야 한다.

티끌 하나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불교에서 삼라만상은 중중무진법계(重重無盡法界)라고 했다.

중중무진법계는

‘겹치고, 겹치고 또 겹쳐서 그 겹치는 인연의 요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또 그 겹치는 인연들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끝이 없는 법의 세계’

라는 뜻이다.

즉, 하나의 일이 하나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주의 모든 일이 겹치고 겹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것도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깨달은 사람은 이 한 법을 깨달으면서 이것도 함께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복잡한 인연의 그 근본에는 이 한 법이 있고 그 법의 작용은 연기의 법칙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고 사라지는 데는 우주만큼의 요인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마치 운동경기하나가 만들어지고 정해진 규칙은 몇 개만 있으면

수많은 다양한 경기와 일들이 일어나고 이기고 지고, 때론 부상도 입고, 또 관객들이 몰려오고 몰려오기 위한 교통이 여러 가지로 만들어지고, 때론 사고도 생겨나고, 또 경기장 안에서 소주도 팔고 오징어도 팔고 술 취한 사람도 있고, 그 속에서 인간관계가 갖가지로 일어나는 것과 같다.

 

지리산 하나가 먹여 살리는 인구가 삼도(전라남북도, 경상남도)에 걸쳐 수백만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처럼

이 한 법의 연기법이란 법칙 하나가 이 우주의 모든 현상들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의 근원에는 이 한 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조스님은 우리가 바다에서 목욕을 하면 온 바닷물을 다 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깨달은 사람들은 이 한 법을 깨달았을 뿐,

우주의 모든 현상을 다 알아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한 법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삶의 현상을 이해하기엔 우리의 개체적 존재는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도 안다.

중중무진법계의 일을 알면 우리가 얼마나 작고 초라하고 별 것 아님을 절로 안다.

우리의 뇌 속에 세포가 수 조개에 달한다 하더라도 우주의 모든 일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작은 컴퓨터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깨달은 자들은 삶을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개인의 성향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앎을 만족시키려는 것 자체가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삶의 현상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열심히 할 뿐이다.

그리고, 결과를 이루는 것은 나의 노력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인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되지 않는 일이니, 우리가 그냥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사실에서 아무리 분하게 생각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그대가 아무리 분하게 생각해도 손해 볼 일이 있으면 인연따라 생기고, 병도 생기고, 결국은 원하지 않아도 이 몸을 떠나고 끝날 일은 끝난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라.

이 세상에 과연 누가, 티끌만큼도 다치지 않고, 감기 한 번 하지 않고, 길가다 넘어지지 않고, 손해 한 번 보지 않고, 부모를 잃지 않고, 자식이 단 한 번도 속 썩이지 않고, 사고 한 번 나지 않고, 늙지도 않고, 얼굴에 주름지지도 않고, 배고파보지도 않고, 뒷간에 가지도 않고, 밤에 자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일이 내가 원해서 하는가?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것은 삶에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그러하여 삶의 현상이 그러한 것뿐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원하지 않고 또 붙들려고 울부짖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법이다.

우리가 아무리 원하지 않고 또 붙들려고 울부짖어도 말이다.

 

행복과 불행은 원하는 것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차이에서 올 뿐이다.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는 것만큼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어리석은 일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되지도 않을 일에 애를 쓰고 원망하고 뒹구는 것이 바로 망상이다.

 

그래도 일체가 법이요 법은 아무런 일도 없다.

그런데도 개체적 존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고 되지도 않을 일을 바꿀 수 있다고 끝까지 놓지 않고 애를 쓴다면

그대는 망상이란 꿈속에서 호랑이와 싸우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을 뿐이다.

댓글목록

허동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조졸 님의 댓글


지인과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발앞에 돌멩이를 들고 이돌의 본질을 보려면 무수히 많은 조건을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원인자를 알아야 본질을 알겠지 하며 머리도 않좋은 내나 니나 우에 알겠노.농담조로 했던말을
오늘 그의미를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포세인죤 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달그림자님의 댓글


중중무진법계....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비가 오는 주말이네요.
전국이 가물어 비가 간절한 이때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비가 옵니다.
뭐... 일체가 법이니 안 와도 할 수 없지만요...^^
주말 오후 잘 보내십시오.*^^*

우페카님의 댓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글을 잘못 이해하는것일테지요.

윤기붕님의 댓글


그렇습니다.
이 자리를 깨달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허망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좀 지나면 내가 애써서 할 필요가 없음을 알면서 삶이 편해집니다.

보리아빠 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윤기붕님의 댓글


글은 보는 사람이 있어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도 고마운 일입니다.^^
서울에 계시니 법회에도 참석하시면 더욱 많은 것을 얻어가실 것입니다.
편안하십시오.*^^*

신기한님의 댓글


선생님의 요글 ㅡㅡㅡ!!! 대박 ㅡㅡㅡ!!! 감사합니다 ㅡㅡ!!

윤기붕님의 댓글


어서 오십시오.
오늘 가입하셨군요.
좋은 인연이 되시길 빕니다
서울에 계시니 법회어도 참석하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心明님의 댓글


일체가 오직 한 법이요,
온통 한 법이라.

우리도 또한 이 법이어서

따로 나는 것도 없고
따로 사라지는 것도 없다는
말씀!

최고의 법문입니다.
그래도 용을 쓰게 됩니다.

자경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