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유불선(儒佛仙)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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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손님이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께 물었다.
"유교(儒敎), 도교(道敎), 불교(佛敎)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대주스님이 말했다.
"도량이 큰 사람이 활용하면 같고, 기틀이 작은이가 집착하면 다르다.
모두가 한 성품 위에서 일어난 작용으로서, 근기의 견해에 따른 차별로 셋이 된다.
미혹함과 깨달음은 사람에게 달렸고, 교법의 같고 다름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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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고 다름이 어찌 손님이 물은 유(儒), 불(佛), 선(仙-도교)만이랴?
도량이 크다고 하는 것은 분별이 없어서 모든 것이 한 성품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요.
기틀이 작다고 하는 것은,
사물의 형상과 소리에 집착하여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이는 자신이 부처라고 하면서도 말로만 부처라고 할뿐,
깨달음을 구하는 그것 자체가 이미 자신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대변하니
스스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자다.
부처가 되려면 부처의 생각을 가져라.
부처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세상에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같고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따로 구할 부처가 없다.
그래서 부처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처를 구하는 자는 결코 부처의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는 중생의 생각으로 부처는 이러할 것이라고 분별하고 궁리만 하니,
어찌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중생심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고 했다.
우리가 늘 쓰고 행하는 모든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부처의 마음을 찾으니 중생으로 살뿐이다.
기틀이 작은 자는
부처와 중생의 뿌리가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드러난 모습만 보고 중생이니 부처니 따지고 있을 뿐이다.
뿌리가 같으면 그 줄기도 같고 그 가지도 같고 그 잎도 같다.
다만 나타난 형상만 다를 뿐이지.
형상이 다르다고 종자가 다르다면서 맞다 틀리다 하지마라.
세상에는 맞고 틀리는 것이 없다.
맞고 틀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다시는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맞고 틀리다 하며 둘로 갈라서 시비하고는,
한쪽을 선택하여 맞다 하여 맞는 것을 찾은 사람은
항상 틀린 생각만 할 뿐, 한 번도 맞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찌 그런가?
일체가 한 법이어서, 우주 삼라만상이 온통 하나인데,
맞고 틀리는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맞고 틀리다 하고 나누어 맞는 한쪽만 찾기 때문이다.
맞는 것을 찾지 않는 사람은 항상 맞지만,
맞는 것을 찾는 사람은 언제나 틀린다.
불교에서 만행이라는 것이 있다.
혹자들은,
깨달은 자가 기행을 하는 것을 만행이라고 생각을 하고,
만행이 깨달은 자의 특이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만행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만행이 무엇인가?
滿行이다.
보살이 깨달음을 얻어 일체의 행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체의 행이라고 하는데도, 보살이라는 말에 걸려서,
보살이 하는 일체의 행은, 중생을 위한 일, 착한 일, 좋은 일 등으로
또 세상을 좋고 나쁨으로 나눈다.
일체가 한 법인데, 무슨 보살이 따로 있고, 부처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인연에 즉하여 시비 분별없이 하는 모든 행이 바로 일체의 행이요, 만행이다.
즉, 배고프면 밥 먹고, 일 있으면 일하고, 남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우고, 또 형편이 안 되면 할 수 없고, 피곤하면 쉬고, 잠 오면 잠자는, 그 행이야말로 진실한 만행이다.
마조스님이 말한 ‘평상심이 도’라고 하였듯이 일체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모든 일이 다 만행인 것이다.
그 곳에 무슨 깨달은 이의 행이 있고 중생의 행이 있겠는가?
어찌 유불선의 차이만 차이이랴?
우리의 삶은 유불선의 차이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러 가지 다른 삶의 형태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손을 쥐면 주먹이 되고 펴면 다섯 손가락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성품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차이임을 알라.
도량이 큰 사람은 주먹과 다섯 손가락이 둘이 아님을 아는 자이고,
기틀이 작은 사람은 주먹과 다섯 손가락이 다르다고 할 뿐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조차도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그 모양에 집착하고 분별하고 따라가는 자이다.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은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의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부처이다.
즉,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모두들 이야기한다.
모두가 다 부처라고,
그럼,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부처의 생각을 해야 하지 않는가?
부처의 생각을 하는 자가 과연 부처를 찾겠는가?
대주혜해스님은
"미혹함과 깨달음은 사람에게 달렸고, 교법의 같고 다름에 있지 않다."
고 했다.
교법이 무엇인가?
유불선의 교법만 교법이 아니다.
세상에 나투어진 만물과 그 만물이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모습과 소리이다.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들이다.
안다고 하나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업식(業識)에 또 하나의 짐을 더한 것뿐이다.
부처가 되려면 부처의 생각을 하라.
부처와 중생이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생각이 부처와 중생이 같으니 다르니 하고 나눌 뿐이다.
머리로만 알려고 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그럼 부처가 따로 있지 않음을 알고
다시는 부처를 찾지 않으리라.
그리고 스스로 부처라고 이름도 붙이지 않으리라.
댓글목록
달밤님의 댓글
좋은 법문 감사합니다. 합장
태정이할배님의 댓글
법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