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단상
생사가 열반이다.
작성자 : 윤기붕추천수 : 0조회수 : 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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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 한 법은 무루(無漏)이다.
원래 불교에서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이 있는데, 유루법은 당장의 번뇌는 아니지만,그냥 두면 번뇌를 증장(增長 : 성질과 행실이 나쁜 방향으로 더 심해짐)시키는 작용을 하는 모든 허물의 법을 말하고,
무루법은 번뇌가 끊어진 상태, 또는 번뇌를 끊어지게 하는 법을 말하는데,
이 글에서 무루라고 하는 것은, 일체가 온통 한 법이어서,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이 티끌만한 것도 이 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로, 어떤 것도 이 법에서 새어나가는 것이 없어 무루하고 하였다.
그처럼 삼라만상이 모두 이 한 법이어서 단 하나라도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법이 아닌 것이 없다.
다만, 이 한 법과 만 법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한 법은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법의 몸(體)이요,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성품 그 자체여서 영원불변하는 것인데 비해,
만법은 이 한 법의 법칙인 연기법의 작용으로 세상에 나고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인연에 의해 찰나에만 존재할 뿐, 고정되고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체가 이 한 법으로부터 건립(建立)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찰나지만, 드러난 그 순간의 만법은 이 한 법과 다름이 없어, 모두가 법이요, 자성이요, 부처요, 진리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만법이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 인연으로 나투는 그 순간에만 진실 되게 존재할 뿐, 잡으려하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찰나의 그 순간만이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법이 찰나에 존재할 뿐 사라져버린다고 말하면, 마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단멸(斷滅)에 빠진다.
하지만 이 사라짐은 그 찰나의 모양이 변해가니 사람의 눈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해갈 뿐이다.
이는 이 한 법의 작용인 연기법(緣起法)이 늘 변함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법은 매 순간의 모양만 가지고 있을 뿐, 곧 변화해버려 사라진다고 하지만, 연기의 법칙에 의해 끊임이 없어 그 다음 찰나, 그 다음 찰나가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무루이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인 것이다.
비유하면, 내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고, 일어나서 걸어가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는 것이 이 법이고,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 이 법이며,걸어가면 걸어가는 것이 또한 이 한 법인 것이다.
여기서 좀 설명이 복잡해지는데 우리에게는 기억이라는 것이 있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걸어가는 것을 모두 이어 붙여서 그 모든 것이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는 그것이 나이고, 일어나면, 앉아 있는 나는 사라지고, 일어난 것이 나이며, 걸어갈 때는 일어난 상태는 또 사라지고, 걸어가는 것이 나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그저 생각 속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재의 세상에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는 매 순간의 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금에 내 생각이 좀 전의 나를 생각한다고 해도 실제로 좀 전의 내가 어디에 있는가?그리고 생각이 미래의 나를 생각한다고 해도 실제로 미래의 내가 있는가? 우주 그 어디에도 그런 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이라하여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고 하는 것이다.
과거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은 분명히 지나가버리고 오지도 않은 것이니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현재의 마음은 왜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그것은 일체가 연기법에 의해 인연으로 변해 흘러가기 때문에 현재라고 하며 잡으려 하면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라는 것도 사실 이름이지 현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실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나’라는 상(相)을 만들어 ‘내가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면서 생각이 지은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고정된 내가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며, 바깥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온갖 시비와 투정을 부리면서 온갖 번뇌 마구 쏟아내고 있으니 중생의 세상은‘불타는 집’이라 하여 고통속의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의 기억 때문에 습관을 만들어 우리 몸이 삶을 편리하게 영위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의 습관인 기억 때문에 온갖 집착과 시비와 분별을 일으켜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생각의 착각과 망상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유루(有漏)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이 기억에 의지하여 내가 매 순간의 내가 이어지고 있어서 마치 고정된 내가 있다고 믿고 고집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나라는 것은, 매순간의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가며 드러나는 다른 내가 있을 뿐, 어떤 완성되고 고정된 나는 우주 어디에도 없는 것이 실상의 세계이다.
그래서 제법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앞에서 말했듯이 만법이 찰나의 모양으로 변해가니 사람의 눈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해갈 뿐이고, 그렇게 매 순간 변하면서 드러나는 일체 만법이 인연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기 때문에, 우주는 매 순간 모습을 바꾸며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 법에는 사라지는 것이 없고, 또 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사가 없는 이유를 드러난 실상의 세계를 설명하는 위의 글에서 다 이야기 했지만,
우리의 한 생각은 일체가 법이라고 해도 꼭 자신은 제외시키는 참으로 중생 노릇을 제대로 하는 놈이어서, 다시 이 실상법(實相法)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설명해야 한다.
사실 나도 이 법을 깨치기 전에는 생각의 노예생활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늘 그러했다. 들은 것은 많아가지고 일체가 법이라고 하면서도, 그 일체 에는 나는 늘 제외시켜 중생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실상의 법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도 앞에서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는 이야기처럼 역시 그렇게 매 순간 모양을 바꾸어가며 끊어지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몸이 사라져도 무수한 세균에 의해 분해되고, 그 분해된 수많은 법(원자, 분자, 세포, 또는 여러 영양분 등)들이 다시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가며 조금도 이 한 법에서 벗어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가진 이 몸이 매 순간 변하며 삶이 흘러가지만, 늘 이 법과 함께 하고, 그 과정에 가장 큰 변화로 우리의 몸이 해체되어 이름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만나더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로 변하여 여전히 이 한 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사가 없는 것이다.
서장(書狀)을 짓고 간화선(看話禪)을 창시한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의 서장에 향시랑 백공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부처님께서는 구경에 도달한 사람은 꿈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 없음은) ‘있다 없다’의 없음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일 뿐입니다.”
라고 한 말이 있다.
여기서
있다 없다’의 없음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일 뿐입니다.
라고 할 때, 없다는 것이 우리가 통상 쓰는 상대적인 의미의 ‘있다 없다.’하는 ‘없음’이 아니라,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는 것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있어도 이 자리고, 없어도 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이 없다.’하는 말은 꿈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꿈도 이 자리요, 생시도 이 자리니, 꿈이니 아니니 하고 나눌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혜종고 스님이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일 뿐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오직 하나요, 한 법이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는 말은 우리의 삶에 인간의 소견으로 볼 때에 삶과 죽음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이 한 법이니 살아도 이 자리요 이 법이요, 죽어도 이 자리고 이 법이기 때문에, 생과 사가 하나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생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은 번뇌의 불을 꺼서 보리를 증득한 것이어서, 이 한 법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일체가 한 법이니, 이 한 법을 깨달은 사람이나 깨달은 법이나, 또 이 한 법이나 모두 이 한 법이어서, 같은 것이니, 열반이 바로 이 한 법이다.
그래서 생사도 이 한 법이요, 열반도 이 한 법이니, 생사가 바로 열반인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열반이요 한 법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를 세우면 상대가 서고, 하나가 사라지면 상대도 사라지는 법,
결국 생사가 있어 열반이 있었지만, 생사가 없으니 열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생사를 벗어나서 열반에 이른다고 여기고 생사를 벗어나려고 온갖 애를 쓴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이 한 법이요, 이 한 법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이다. 그리고 생사가 있다고 여기니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생사가 오직 생각의 착각임을 모르는 이런 소견으로는 수억 겁을 닦는다 하더라도 끝내 자신의 생각에 갇혀, 결코, 있지도 않은 생사를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있지도 않은 열반을 얻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떻게 살든, 어떤 곳에 있든 우리는 이 한 법을 절대 떠날 수 없고, 이 한 법과 같은 성품이어서(몸에 갇힌 생각을 내지 말라.) 우리가 바로 부처요,진리요, 법이다.
그러니 어찌 법이 법을 구하겠는가?
그래서 달마조사께서는 혈맥론(血脈論)에서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임을 알면 마음 밖으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요 부처로 부처를 헤아리지도 않으리라.”
고 하셨고
“또한 부처로서 부처에게 예불할 수가 없고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생각할 수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다.
그러니 오직 일체가 한 법이요 자신이 법이요 부처임만 믿고, 법으로서 법을 구하지도 말고, 부처로서 부처를 찾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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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無事人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_()_
윤기붕 님의 댓글
잘 지내시지요?
無事人 님의 댓글
전 뭐 한결같이 그대로 평안입니다.
조금도 걸림없이 불편함이 없으니
스승님께서는 전혀 염려치 마십시오...!!!
아니면 염려해주셔도 좋습니다요...^♡^
윤기붕 님의 댓글
無事人 ㅎㅎ 일체가 그러하니 염려하나 하지 않으나 매 한 가지이지만, 그래도 삶은 또 삶이니 정이 오가면 삶이 더 감칠나지요. 집착하지만 않으면 말입니다.*^^*
無事人 님의 댓글
無事人 15.10.19. 00:20
윤기붕 선생님...
저는 제 삶의 굴곡이 참 고맙습니다.
공부를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점검하게 해주니까요...!!!!
천변만화하는 경계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털끝만큼도 움직임없는 경계를 빙자해 요동질하는 자기 마음이 문제지요...!!!
질곡많은 세상이 이대로 보리라는 걸 어찌 모르는지들...ㅋㅋㅋㅋㅋ
_()_
무석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_()_
태정이할배님의 댓글
법문 감사합니다.()
금싸래기님의 댓글
선생님 . 감사합니다.
일체가 법이다. 덕분입니다. _()_
윤기붕님의 댓글
님들과 한 길을(물론 일체가 한 길이지만^^) 가는 것이 저도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편안한 저녁 되세요~*^^*
김창석(윈드)님의 댓글
감사합니다_()_
윤기붕님의 댓글
저도 님들이 계셔서 고맙습니다.*^^*
초당님의 댓글
법문 감사합니다. 법성게에 나오는 "생사열반상공화"가 이런 의미였군요!
윤기붕님의 댓글
윤기붕 15.10.19. 00:05
그렇습니다.
일체가 오직 이 한 법이어서 나고 죽음 또한 이 법이지요.
그리고 이 법이 곧 열반이니 생사열반상공화입니다.^^